정치 공동체가 갑작스레 튼실해진다면, 단순히 시장 원칙에 충실해서나,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서나, 여론조사를 자주 해서나, 전국민적 이벤트를 자주 벌여서가 아니다. 정치 공동체의 유지와 지속에 필수적인 공적인 가치와 서사가 부재하는 한, 그에 기초한의사소통 능력과 갈등 해소 능력이 고양되지 않는 한, 자연 상태로부터의 탈피는 요원하다. _ 새로운 서사를 찾아서 중 - P265
사상가 폴 비릴리오는 비행기의 발명은 추락의 발명이며 선박의 발명은 난파의 발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인생의 발명은 고단함의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행기나 선박의 운행에서 사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삶의 운행에서 고단함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삶이 고단하다는 것은 상당 부분 동어 반복이다.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이다. _ 프롤로그 중 - P10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그냥 사는 인생이나 마냥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 아니라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정치적 동물의 길》은 바로 그러한 삶과 정치에로 초청하는 작은 손짓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 응답이다. _ 프롤로그 중 - P13
인간이 그저 행복해지는 게 불가능할 때 정치가 시작된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이며,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정치가 있다. _ 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중 - P17
매사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거기에 정치는 없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당연해 보이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해 보이지 않을 때 정치가 있다. 당연한 듯한 현실의 그늘에 금방이라도사라질 듯 위태롭게 존재하는 이들이 있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것을 낯설게 보는 데 정치가 있다. _ 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중 - P22
폴리스는 어디 한구석에 틀어박혀 은거하기에는 너무 소규모사회였다. 그러나 인구 1000만이 넘는 현대 도시와 국가에 살면서 익명으로 숨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정치는 권력욕을 주체못하는 중늙은이들에게 맡겨놓은 채 애착 인형을 끼고 그저 숨이나쉬고 있기란 얼마나 편한 일인가. 짙어진 풀냄새를 맡으면서 아무도 없는 산책길을 고적하게 걷는 일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조용히은거하면서 자기 삶의 안위와 쾌락만 도모하다가 일생을 마치는일은 얼마나 유혹적인가. 그러나 폴리스 시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아테네 사람들은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초탈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한다." _ 인간은 제법 ‘잘’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중 - P29
정치학 용어로서 자연 상태는 시골이나 전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질서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원초적 상태를 말한다. _ 자연 상태를 상상하라 중 - P35
그래서 조선 후기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명론(名論)〉이라는 에세이에서 말했다.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서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박지원이 보기에 전쟁, 지진, 홍수, 판데믹, 호환, 마마보다 참담한 재앙이란 바로 담담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다. 다 귀찮아하는 상태다. 그래서는 이 세계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귀찮아하는사람들의 관점이 아니라 정치하는 이의 관점이다. 뼛속 깊이 귀찮아하는 사람은 삶 자체도 귀찮아하므로 인류의 멸망 따위를 크게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을 감히 책임지고자 하는 정치인들은 다르다. 이 세상이 사라지면 큰일이다. 책임질 대상이 없어지잖아! 나는 뭔가 책임지고 싶은데! _ 귀찮음이 기본이다 중 - P43
박지원이 보기에 사람들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중 명예(이름)가 가장 중요하다. "만물은 쉽게 흩어지기 마련이니, 어떤 것도 그것을 붙잡아둘 수 없다. 이름으로 붙잡아둔다." 어떤 선망하고 욕망할 것이 있기에 사람들은 귀찮음을 이기고 세상에 나와 그 욕망의 대상을 좇는다. 마침내 경제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정치가 필요해진다. _ 귀찮음이 기본이다 중 - P44
이 모든 것이 어느 한순간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도, 덕성, 리더십, 권력, 권력의 감시, 소통 등 제반 요소가 균형을이룰 때 가까스로 바람직한 정치가 이루어진다. 그 균형도 시간이흐르면 다시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심신의 건강에도 일상의 관리가 핵심이듯이, 정치 공동체의 건강에도 일상적 관리가 핵심이다. _ 무인도에 불시착한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중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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