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장 폴 사르트르, 「유예」, 「자유의 길 - P16
비껴 앉은 아버지의 야윈 잔등을 보면서 민홍은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는 고생대의 한 화석을 떠올렸다. 그 화석에 대한 일차적 기억은 앙상함이었고 그리고 가슴 답답한 세월의 무게였다.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_ 쥐집기 중 - P25
흡사 지구의 과거를 연구하는 지질학자들 같았다. 하늘의 청, 사암의 적, 굳은 용암의 흑, 관목의 녹이 진한 색의 대비를 이루었다. 암반과 암벽의 수많은 주름들이 창망한 바다의 물비늘 또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의 기하학적 무늬처럼 느껴졌다. - P11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가네단 한 번도 흘러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식어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_ 뜨거운 돌 중 - P77
허기로 견디던 한 시절은 가고, 이제밥그릇을 받아놓고도 식욕이 동하지 않는 시대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자갈밭 같은 시대_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중 - P78
새가 너무 많은 것을 슬픔이라 부르고 나니새들은 자꾸 날아와 저문 하늘을 가득 채워버렸습니다이제 노 젓는 소리 들리지 않습니다_ 기러기떼 중 - P51
같은 자리로 내려앉는 법이 없는저 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넨다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_ 저 물결 하나 중 - P53
그만 지고 싶다는 생각늙고 싶다는 생각삶이 내 손을 그만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_ 고통에게 중 - P66
오, 버섯이여산비탈에 구르는 낙엽으로도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으로도덮을 길 없는 우리의 몸을뿌리 없는 너의 독기로 채우는구나_ 음지의 꽃 중 - P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