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미술관展 : 고흐의 별밤과 화가들의 꿈 (대도록)
지엔씨미디어 편집부 지음 / 지엔씨미디어(GNCmedia)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이른 새벽 일거리를 위해 인력시장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처럼, 기차는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제각각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며 기차역에 서 있다. 이윽고 경적을 울리며 기차는 달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습관처럼 창 밖을 쳐다보며 상념에 잠기기도 하고 기대에 부풀기도 한다. 기차를 토해놓은 기차역은 잠시 조용해진다.  

1900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프랑스의 오르세 역은 화려한 개통식과 더불어 숱한 사람들의 다리가 되었지만 역의 설비들이 구식이 되면서 1939년에 운행을 중단한 채로 1973년까지 그 이름만을 가지고 거대한 황무지가 된 채 그 자리를 지켰다. 늙은 노인 취급마냥 쓸모 없어진 역을 없애고 화려한 고급 호텔을 짓자는 주장을 포함해 철거에 대한 생각들이 쏟아지면서 옛것과 새것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많은 논의 끝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을 철거하는 것은 범죄 행위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기차역의 보존의 형식에 대한 제안 가운데 '미술관'이 채택되었다.  

미술관으로 탈피하는 과정에서 제일 신경쓴 것은 오르세 역 시절의 '랄루'가 만들어 놓았던 장식들과 압도적인 규모에 눌리지 않을 정도의 강한 건축 재료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부르고뉴 지방에서 출토되는 불꽃 모양의 석회함인 '뷕시 석'을 사용하면서 기존의 녹색 철골 구조와 구분되도록 푸른색과 밤색으로 추가 구조물의 색을 정했고 미술관은 오르세 역의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 미술관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아래 그림처럼 프랑스 파리 센 강 좌안에 위치한 오르세 미술관은 그 건물 자체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며 순간을 박제화한 예술작품들을 가득 담고 있다. 이 책은 많은 예술 소장품들 중 이번에 한국에 건너온 작품들을 담아놓은 대도록이다.

 파일:Museudorsay22.jpg  

대도록을 미리 주문했으나 더딘 배송으로 인해 도록 속에 첨부된 초대권을 사용하지 못했고, 도록 속의 그림을 미리 접하지 못하고 미술관을 가게 되었다. 원 전시실이 아닌 공간임을 감안했지만 전시실 안은 갑갑했다. 사방이 막힌 흰 건물에 벽 따라 일률적으로 놓여진 작품들을 보면서 작품은 그 작품이 놓여진 공간도 같이 감상의 대상이 되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의 건물보다 낮은 천장 덕분에 그림들은 허름한 옷을 빌려입은 잘생긴 귀공자처럼 어설픈 느낌이었고, 그림을 설명하는 사람의 웅웅 울리는 마이크 소리 덕분에 돗대기 시장 같은 느낌도 조금 들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 한참을 서서 있어야지, 라고 생각했던 애초의 계획은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 때문에 애저녁에 접었지만 그래도 눈에 쏙 들어오는 그림이 제법 되었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전시회 제목이기도 한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검은 색은 전혀 쓰지 않으면서 별밤의 효과를 냈다,라고 하는 동행인의 설명을 들으면서 별밤에 매혹되어 밤마다 별을 그리기 위해 그림도구를 들고 밖으로 나갔을 고흐를 떠올렸다. 나중에 도록을 받은 후 제일 먼저 펼쳐본 것은 역시 이 그림이었는데 실물로 봤던 붓터치가 역시나 잘 보이지 않았고 유화의 느낌도 차이가 났다. 아하하. 이게 바로 실물로 그림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차이로구나! 실물을 본 기억은 대도록의 사진을 보면서도 실물의 느낌을 떠올릴 수 있게 했고 나는 이 그림을 그 뒤로 몇 번이나 들춰보면서 그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와~ 다음 번에는 오르세미술관에 직접 가서 봐야지~~그런데 언제? ( ") 

 

   
  당신의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삶의 강박관념이자 기쁨이고 번민일 것입니다. 어느 날, 무척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가는 침대 주변에서, 그녀의 비극적인 관자놀이에 나의 눈을 고정시킨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 죽음이 드리워지면서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내 스스로가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놀랐습니다. 푸른색과 노란색, 그리고 회색의 색조들로부터 나는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나려고 하는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아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붙잡으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먼저 변화하는 그녀의 얼굴빛들에 대한 전율이 기질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나의 일상적인 삶의 흐름이 다시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속에 빨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클로드 모네가 언론인 조르주 클레망소와 이 작품 <임종을 맞은 카미유>를 두고 나눈 대화 내용이다. 죽어가는 여자의 얼굴 밑으로 보이는 시커먼 것들은 내게 장작의 느낌을 주었고, 다비식의 의식이 떠올랐다. 어쩜 위의 말처럼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는 방식으로서, 모네는 가장 솔직한 방식을 택한 건 아닐까. 그림으로서 그녀의 영혼 한 자락을 지상에 잡아놓고 싶다라든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그녀가 보고플 때마다 들춰보고 싶다든지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빛깔'에 대한 전율의 느낌을 고스란히 그려냄으로서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솔직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림에 대한, 색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졌던 모네에 공감도 가고 그의 애처로움에 안쓰러움도 생기면서 이 작품은 오래오래 기억 속에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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