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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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서평꾼 로쟈(이현우)의 블로그에 2012년의 책으로 올라왔길래 호기심에 구매했다. 

파울 첼란의 시에서 따왔다는 무서운 말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제목도 물론 마음에 들었고 책의 주제인 '책읽기의 혁명성'이라는 두 단어의 조합 역시 흥미로웠다.


  최근에서야 이 책을 볼 생각이 든 이유는 나 자신이 책읽기에 너무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점점 내가 아는 것에 대해 의심이 가고, 왜 제대로 알 수 없는지에 고민이 되어서, 늘 좋아했던 책읽기가 무서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내 상태를 탈출하고 싶었다. 책읽기가 어떤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다.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읽기 자체가 위험한 행위이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의 음악,  예술, 삶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라고 말하는 이 책이 필요했다.


 이 책에서도 말하듯이, 문학이라는 우리가 아는 개념은 18세기에서나 형성된 개념이다. literature라는 말은 그 이전에 읽고 쓰고, 책을 만들고 편집하는 행위를 말했다. 이런 책과 관련된 그를 둘러싼 본질적인 행위는 너무나 당연하기 보다는 위험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어느 평론에서 읽었는데 사사키 아타루를 가라타니 고진 등 일본 사상계를 잇는 4세대 사상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 본인은 이 책에서 겸손하게 자신이 읽은 것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대신에 많은 것을 말하는 비평가와 하나로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문가에 대해 비판을 한다. 읽는 행위와 그리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일까?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읽기는 과연 쉬운 일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얻은 게 많다. 문학이라는 개념을 다시 알게 된 것, 그리고 루터의 혁명, 또한 폭력과 혁명의 관계, 텍스트의 신성함, 그리고 의외로 우리 삶의 근대적 형식을 만든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 등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앎의 역사를 새로 알게되었다. 도중에 저자의 저서 <야전과 영원>이 계속 인용되는데 이 책 역시 곧 번역되기를 희망한다.


 혁명의 힘은 폭력이나 정동이 아니라 텍스트 그 자체이다. 한 번 읽으니 다시 읽고, 이를 쓸 수 밖에 없고 고쳐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혁명을 이루어내고 그를 경험한다. 그래서 루터는 종교혁명을 이루어내고, 로마법을 다시 발견한 12세기의 중세 해석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교회법을 개정하고 이는 우리가 아는 삶의 형태, 번식 혹은 재생산을 위한 법, 삶을 위한 법을 만들어내었다. 이 엄청난 혁명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텍스트의 발견과 그를 둘러싼 신진대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인용되는 푸코나 니체의 말 그리고 르장드르라는 한국 학계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학자의 말을 솜씨있게 인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끌어가는 그 능력이 난 너무나 부럽다. 간만에 지쳐있던 나에게 다시 읽고 싶고 또 설렘을 주는 책을 만난 듯 싶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다분히 계산적이었지만 책읽기 자체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돈키호테가 생각나는 텍스트와 세계의 관계, 세계와 텍스트가 일치하지 않아서 텍스트의 준거를 밝히게 된 루터가 세계와 만나면서 변화시킨 그 혁명. 텍스트의 혁명은 법의 혁명으로 이어지며, 이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은 누군가의 삶이 걸려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읽고 고쳐쓰는 것이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다. 내 앎의 과정은 이처럼 수 세기 전에 책읽기의 혁명을 이루어 낸 누군처럼 치열함과 책임감을 가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부끄럽다. 


 지금 누군가는 문학이 끝났다. 철학이 끝났다라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이를 확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새로운 혁명을 만들어낼 힘과 능력이 사라진건가?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고 번역하는 단순한 행위를 하는 누군가에게 그 엄청난 변화, 혁명은 계속될 수 있다. 심지어 지금보다 글을 읽는 사람이 적은 그 당대에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의 종언은 쉽사리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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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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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실격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괴로웠다. 앓아 누웠다. 거의 모든 모습이지는 않지만 주인공 요조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무서움과 공포를 나 역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당스라는 익숙치 않은 용어가 계속 생각났다.


 그래서 요조가 가지던 공포와 우울을 몇 년 동안 계속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그래서 한동안 다시 이 책을 볼 수가 없었다. 괜히 읽었다 싶을 정도로 극히 예민하고 공포를 가진 사람에 대한 공감이 커서 나 역시 이러한 삶을 지속하는 게 가끔은 옳을까 자문했다.


 요조와는 다르게 그동안 나는 뻔뻔함과 무시를 익혔다. 그래서 다시 다른 번역본이지만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는 마지막에 요조를 회상하는 술집의 마담처럼 요조를 착하기만 했던 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공감이 가는 쪽은 술집 마담이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요조와의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을까?


 요조가 흥미로운 점은 엄청난 예민함과 공포를 가지고서도 그 삶을 이어가려고 사람들을 웃기며 그 안에서 살아나가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다. 가끔 그가 가진 내면을 꿰뚫어보는 이가 있었지만, 그런 가면극을 하면서 결국은 많은 사람들(특히 여성)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 요조는 이에 대해서도 편하게 느끼지 않았겠지만 그가 가진 감성은 그만이 가진 특별한 것이라서 사람들은 이유를 몰라도 그에게 끌렸던 듯 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만한 감성과 예민함을 느껴보지도 못했을 것인데 왜 가혹한 삶이 그에게 떨어졌던 것일까?  누군가는 그가 의지 없이 삶에 휩쓸렸다고 평가하겠지만, 내 눈에는 꽤 삶을 붙잡으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민음사 판본과는 다르게 뒤에 포함된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이 눈에 띄었는데 개를 무지하게 싫어하지만 결국 다른 어떤 이보다도 개를 아끼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단편의 주인공이 요조와 비슷한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던 이는 그 누구보다도 요조가 아닐까?


 요조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기가 힘들 것이다. 쉽게 져버리는 꽃과 같은 삶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자이 오사무 역시 요조와 같은 인생을 산 듯하다. 신문에 연재하다가 결국 자살을 택한 다자이 오사무에게 나약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짧은 삶을 사는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으리라고 으레 짐작해본다.


 엄청난 플롯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낸 탓에 세대가 지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그리고 요조의 삶을 응시하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는 그와 같은 삶을, 또는 무시하고 보통 사람들의 품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살아가겠지만 확실히 이 책을 읽은 전과 후는 나에게는 너무나 다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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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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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이라는 작가의 저서는 일단 저자 소개가 거의 필요 없어서 좋다. 모든 작가가 그러하지만 검색하면 일단 신상파악은 되고 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트위터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러한 매체에서 보여지는 진중권의 모습과 책을 통해 만나는 진중권의 모습은 다르다. 이 이상한 불일치 중 호감을 갖게하는 모습은 아마도 책을 통해 만나는 철학적 사유를 그려내는 진중권이다.


 마음대로 주체의 분열을 언급해서 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철학적 글쓰기 역시 분열적이고 가끔은 포토 몽타주를 보는 듯 하다. 생각의 지도라는 언어로 표상되는 생각의 전형적인 모습을 매핑한다는 시도, 기술 자체가 또한 흥미로웠다.


 또한 학술적 글쓰기보다 이러한 글쓰기에 더 익숙해져서 이질감이 없지만 오히려 학술적 글쓰기의 세계를 보면 갇혀있다는 느낌이 든다. 좀 더 자유로운 이야기를 내놓으려면 다양한 분야의 작가와 사태를 언급할 수 있어야 한다. 매핑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각의 생성, 혹은 짜임이 기대치를 높였다. 이 책은 그러한 점에서 내 기준에 맞다.


<생각의 지도>는 cine21에 게재되는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의 2번째 책이다. 전작은 <icon>이었다. icon이 떠올리는 아이디어의 간단한 구조를 말해준다면, 매핑이나 콜라주 같은 이미지의 결합을 글쓰기에 적용한다는 상당히 구체화된 방법론을 책 제목으로 삼은 듯 하다.


 글들은 재밌게 읽힌다. 아이디어는 있고 나에게는 얻을 것도 많다. 현대 철학자 중 들뢰즈, 푸코, 데리다에 대한 설명도 새롭게 읽히는 부분이 있어서 좋다. 저자 역시 좋아한다던 글은 책을 읽지 않고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다. 전공 시험을 준비하면서 나 역시 써먹은 방법인데 이에 대해 죄책감을 덜게 되었다.


 물론 철학적 기본 지식이 없다면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움에 놀라는 사람과 낯섦에 놀라는 사람 모두를 충족시키는 글쓰기였는지는 두고 봐야할 것 같다. 하지만 새로움을 찾아헤매는 독자인 나에게는 재밌는 책 한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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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ers for Architects 1 : 들뢰즈와 가타리 Thinkers for Architects 1
Ballantyne, Andrew 지음, 장정제.송규만 옮김 / 스페이스타임(시공문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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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에서도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은 매우 흥미로운 세계인 듯 하다. 그 중 관심을 두고 싶은 것은 바로크 시대에 대한 들뢰즈의 분석에서 나타난 접기folding이었다. 스치면서 읽은 바로는 접기 전략으로 공간의 형태를 생성하고 연계된 요소를 새롭게 관계하는 것이었다.


 형태를 구축하는 것 이외에도 건축에서 물질적으로 가시화될 수 없는 요소를 철학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단순히 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지내게 될 사람들의 생활을 만드는 기본 장치 혹은 기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창하게 들뢰즈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해서 건축과 철학이라는 흥미로운 두 주제의 혼성으로 이 책을 들었지만 다소 실망스럽다. 일단은 번역의 문제이고, 몇 몇 단어는 의아하기까지 하다. 명확하게 아는 바는 아니지만 interval이 차이로(간격의 의미가 가깝지 않을까?), intention이 관념이라니 어떤 맥락에 의존해서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워낙에 쉽지 않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인지라 기본 개념어들에 대한 소개나 해설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중요하게 읽히는 개념들의 설명은 부재하고 각주의 해설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다. 건축 전공자는 물론 일반인이 읽기에도 혼란스럽다. <앙띠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을 주요 텍스트로 삼아서 필요한 여러 학자의 텍스트를 엮어 읽는 듯 하지만 두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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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사유와 인간 - 푸코의 웃음, 푸코의 신념, 푸코의 역사! 산책자 에쎄 시리즈 4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산책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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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 그의 죽음 이후로 수많은 글들, 연구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를 학자로서 인정할 수 있지만 과연 철학자로서 역사에 기록될까? 아니면 고고학, 계보학적 탐구 방법을 이은 사회학자? 역사가? 혹은 정치철학 분야에 혁명을 일으킨 누군가? 수많은 평가들이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미셸 푸코와 한 세대를 산 폴 벤느는 그의 학문에 대한 글과 순간순간 맞닿게 된 푸코와의 기억을 이어서 책을 펴냈다.


 아직 국내에 출판되지 않은 <Dits et ecrits>를 상당수 참고했다는 말에 번역본을 찾아보았지만 아직도 번역이 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구조주의자, 68혁명을 참여한 당시의 지식인, 공산당원 등의 표지를 지워버리고 부정하는 폴 벤느는 아마 푸코의 입장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구조주의자의 주장치고는 그는 인간 자유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 어느 편도 강력하게 지지하지는 않았다.


 푸코에 대한 편견들을 없애고 나면 투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여정이 꽤 충실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과의 사랑을 통해(기억에 남는 건 음악가와의 사랑) 형식주의를 알게 되었다는 것과 또한 이상적인 학자의 모습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치 꼬장꼬장하고 히스테릭한 학자가 푸코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폴 벤느가 푸코랑 연을 쌓게 된 부분도 신기한데, 푸코가 막 그의 학문적 성과를 발표할 때가 아니라 니체에 대해서 그 중요성을 나중에 알게되고, 들뢰즈의 니체에 대해 말하면서 그의 책은 진리에 대한 문제를 말하지 않는다고 한 폴 벤느의 답변을 푸코가 좋아하면서부터다. 또한 폴 벤느의 책에 실린 푸코에 대한 역사학적 탐구 방법에 대한 논문에 대한 푸코의 평가를 듣고나면 푸코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보게될 것이다. 푸코의 사상을 쉽고 간편하게 알려주는 입문서보다는 그의 생각을 폴 벤느의 언어로 재해석한 책인 듯 하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빌려본 책이라서 꼼꼼하게 적어가면서 보지 않았으며, 아직 푸코의 용어와 개념이 낯설어서 푸코의 이론을 폴 벤느가 얼마나 통찰력 있게(penetration) 해설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마음에 드는 건 푸코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보다는 그가 놓친 부분도 자신의 의견을 담아서 해설한다는 것이다. 믿을 만한 학자가 또 다른 학자에 대해 쓰는 글은 왠지 더 궁금해진다. 푸코의 세계를 좀 더 알고 난 후에 꼭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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