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의 시집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를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떤 시에 나오는 구절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 한 문장이 가슴에 남아 가끔씩 떠오르곤
했는데...
궁금해서 찾아보니, '사랑의 이율배반'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사랑의 이율배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이정하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서정적 감성시인이다. 떠나간 사랑때문에 상처받은 청춘들의 마음을 대변한 시인이라고 해야 할까?
10년도 훨씬 지난 그 시절에 마음에 와닿았던 그 한 편의 시를 생각하며, 이정하의 최근작인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를
펼쳐들었다.
저자의 글에 의하면 이 책은,
" (...) 그동안 독자들이 사랑해왔던 시들과 새로 쓴 시 여러 편, 그리고 왜 이
시를 써야 했는지에 대한 나의 변(辯)을 묶어 함께 엮었다. 시로 다할 수 없는 이야기, 시 속에 감춰진 나의 고백 같은 것을 덧붙였는데,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내내 자책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때는 왜 그리 바보스러웠는지,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 새로 시작하고 싶다. (...) "
이 책에 실린 시와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예전에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라는 그 구절을 접했을 때에 가졌던 느낌과는 또 다른 그런 느낌이 든다.
가슴에 저미는 시와 글들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감성에 젖어본다.
책 속의 글들은 사랑, 기다림, 만남의 순간, 사랑의 아픔, 이별, 그리움, 삶...
그런 주제를 담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떠난 사랑에 대한 회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사랑한다면?', '왜?', '떠나 보내야 하는가? '
'이런 저런 이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구질구질한 변명이 아닐까? ' 하는 생각들.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요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떠벌리는 불륜이 아닌 진실한 사랑이라면....
지나간 세월에 대해서 왜 후회를 하는가? 흘러간 세월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시인도 역시 "그래서 훗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헛된 망상으로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라는 말을 덧붙인다.
역시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드는가 보다!!
길 위에서
길 위에 서면 나는 서러웠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므로,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왔고,
계속 가자니 끝이 보이지 않아
너무 막막했다.
허무와 슬픔이라는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여, 너는 왜 저만치 멀리 서 있는가.
왜 손 한 번 따스하게 잡아주지 않는가.
길을 간다는 것은,
확신도 없이 혼자서 길을 간다는 것은
늘 쓸쓸하고도 눈물겨운 일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
바람불어 흔드리는 게 아니라
들꽃은 저 혼자 흔들린다.
누구 하나 눈여겨보는 사람 없지만
제자리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떨리는 게다.
그래도.... 들꽃은 행복했다.
왠지 모르게 행복했다.

살다 보면
살다 보면
떠나보내지 말아야 할 것을
떠나보낼 때가 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것 처럼
말해야 할 때가 있다.
허지져 죽는데도
입에 물 한 방울
들어가지 않는 때가 있다.
살다 보면,
살다 보면,
살아 있는데도
죽어 있는 때가 있다.

눈 오는 날
눈 오는 날엔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그래서 눈 오는 날엔
사람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눈 오는 날엔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별 1
밤하늘엔 별이 있습니다.
내 마음엔 당신이 있습니다.
새벽이 되면 별은 집니다.
그러나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당신은 아시나요?
그대를 만나고부터 내 마음 속엔
언제나 별 하나 빛나고 있습니다.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다.
그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가슴이 데워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 보고 싶다.
그대여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하렴.
이정하의 시는 진솔함이 담겨져 있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상황에 따른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옆에 앉아서 그의 마음을 엿 보는 것같은
그런 느낌이 있다.
그런데 그의 시를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 속에 작은 여울물이 고이는 듯한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