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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황혼, 해가 뉘엿 뉘엿하여 어두워질 무렵.
황석영의 <해질 무렵>은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말쯤에 읽으면 더욱 가슴에 와닿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인생의 해질 무렵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많은 날들의 기억들. 그 기억을 더듬어 가는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들은 아주 많다. 그만큼 젊은 날의 흔적들은 먼훗날 생각해 보면 빛바랜 추억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으나, 그 순간들은 우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아니면 잊고 싶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날 문득 마주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옛 추억의 그림자가 살포시 떠오른다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지냈던 추억 속의 물건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인생의 해질 무렵에는 그 모든 것이 아련한 추억이면서도 그리움이 되는 것이리라.
이 책은 200 페이지 정도의 아주 짧은 장편소설이다. 무심코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밤늦었는지도 모르고 몰입해서 읽다보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게 된다.

소설의 화자는 두 명이다. 학창시절에 달골이란 마을에 살았지만 그곳을 빠져 나와서 나름대로 자신의 힘으로 출세를 한 건축가 박민우 그리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기도 하지만 만만치 않아서 각종 알바로 생계를 유지하는 정우희.
두 명의 화자는 서로 어떤 인연으로 맺어졌을까 소설을 읽는 초기에는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그들이 어떤 관계인가는 소설을 거의 다 읽을 즈음에야 그 비밀이 풀린다.
반전이라고 하기 보다는 '이런 관계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 가지는 매력이자, 황석영 작가의 탄탄한 구성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민우는 성공한 건축가이다. 그러나 어쩌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온 세상의 고향이 다 사라지는데 일조를 한 상업 건축가라 할 수 있다. 달골이라는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에게는 '강아지풀 홀씨' 하나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살았던 달골이 지상에서 이미 사라진 기억 속의 박제에 지나지 않듯이,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 (p. 102)
서울의 산동네에서 폭력을 일삼는 구두닦이 패들과 함께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그곳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 공부를 했고, 가정교사를 해 가면서 대학을 마치고 유학까지 가게 된다.
건축가가 된 이후에는 비리와도 타협하고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행동했다.
" 온 세상의 고향이 다 사라졌어요. 내 말에 김선배는 먼바다 쪽을 내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그거 다 느이들이 없애버렸잖아. " (p. 28)
어느날 강연을 갔다가 젊은 여성이 전해준 쪽지 한 장이 그를 아스란히 잊혀진 추억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산동네에 살 적에 좋아했던 차순아가 전화를 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박민우는 그와의 인연을 더듬어 본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박민우와 차순아의 옛 사랑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이 소설의 큰 얼개에 해당하고 그 얼개에는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작가는 신분상승, 젊은이의 희망과 좌절, 동반 자살, 고독사, 기러기 아빠 등의 사회적 문제들을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끼워 넣어서 그 문제들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박민우가 건축가이기 때문에 그의 사회적 성공을 통해서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도시재개발사업 등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 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편법과 부정, 비리가 일어났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그 밖에도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등을 생각하게 해주는 내용들이 소설 속에 자리잡고 있다.
" (...) 조금 살 만해지자 전통을 재해석다고 콘크리트에 단청을 입히는 식이 됩니다. 여기까지가 선배 세대의 작업이었고 다음 세대는 재개발과 상자 같은 아파트의 시멘트 산을 만드는 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대가로 우리는 수많은 이웃들을 왜곡된 욕망의 공간으로 몰아 넣거나 내쫓았습니다. 건축이란 기억을 부수는 게 아리라 그 기억을 밑그림으로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재조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같은 꿈을 이루어 내는 일에 이미 많이 실패해버렸습니다. " (p. p. 96~97)
언제나 황석영 작가의 소설을 읽고 나면 분명 우리 사회의 문제점인데도 내 일이 아니니까 스쳐 지나가 버리는 그런 이야기가 숨겨 있듯이 이 소설 속에서도 그런 사회문제들이 구체적으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문제들을 되짚어 보게 된다.
" 내가 간직했던 기억은 거기 살던 사람들이 식구들과 함께 간직했던 추억과는 다른 것들이다. 내 것은 주민들의 기억을 한꺼번에 밀어붙이고 휩쓸어서 말살해버린 과정일 뿐이다." (p. 181)
인생의 해질 무렵을 살고 있는 박민우의 일대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회한을 엿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