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에 상대방의 진심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랑의
경우에는 더 그런 것 같다.
하찮은 자존심때문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인데, 떠난 사랑에 대하여 그 진실을 알고자 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떠난 이유에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확실한 이별의 이유를 알고자 하지 않는 소심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날 슬며시 연인의 곁을 떠나는 그런 사랑도 있을 수 있다. 되도록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남기기 보다는 여운을 남기고 떠나는
사랑.
<종이약국>의 주인공인 페르뒤는 21년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 그의 연인이었던 마농은 아무런 말도 없이 홀연히
떠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페르뒤는 그 편지를 읽지 않는다. 그 편지 속에는 결국에는 남편에게 돌아간 연인의 핑계
아닌 핑계가 담겨 있을테니까.
페르뒤와 마농은 약 5년간에 걸쳐서 연인 관계였는데, 그들의 만남은 첫 눈에 반한 사랑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그러나
마농에게는 프로방스에 결혼할 사람인 루크가 있었고, 얼마 후에 루크와 결혼을 한다. 그렇지만 마농은 루크와의 결혼 생활 중에도 몇 달씩 파리로
와서 페르뒤와 연인관계를 유지한다. 일종의 불륜...
마농은 남편 루크에게서는 자유로움을 주기 때문에 장 페르뒤와는 진짜 사랑을 하는 관계이기에 한 사람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두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 나는 루크를 위해서도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장을 원한다. 그 모든 것은 내가 지금껏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을 넘어섰다....(...) 자유는 요구한다. 내가 나를 문제 삼아 부끄러워하면서도
갈망하는 모든 걸 누리는 삶을 자랑스러워하라고." (p. 195)
마농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가? 두 사랑을 모두 유지하고자 하는 이기심(?)내지는 부도덕성.
그런 마농이 아무런 말도 없이 홀연히 페르뒤를 떠난 것이다. 그렇다면 페르뒤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당연히 마농이 자신을 버리고 남편
루크에게 돌아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페르뒤는 마농이 떠난 후에 그와의 추억이 깃든 라벤더 향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가재도구를 처분한 후에 거실에서 큰 퍼즐을 맞추면서
외롭게 21년을 살아왔다.
그래도 페르뒤에게 위안을 준 것은 책이었다. 그는 센 강위에서 수상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서점이름은 종이약국, 책은 무수히 많은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이기에 책을 파는 페르뒤의 서점은 종이약국이다. 페르뒤는 자신의 서점을 찾는 손님들을 보고 그 손님에게 맞는 책을
추천해 준다. 사랑에 버림받은 사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
손님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 맞는 책을 처방해주는데, 때론 손님이 원하는 책이 그 손님에게 맞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팔지를
않는다. 그만큼 손님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에게 맞는 책을 추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책에 일가견이 있는 독서가이기도 하다.
이런 일상 속에서 페르뒤는 마음의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살고 있는 몽타냐르 길 27번지의 옆 방에 카프린이
이사를 온다. 그녀의 남편은 새 연인과 집을 떠나면서 현관 앞에 카트린의 옷이 담긴 트렁크 한 개와 그 위에 이혼서류를 남겨 놓은 채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이사온 카트린을 위해서 페르뒤는 자신의 집에 있는 식탁을 주기로 하고 21년 만에 추억이 깃든 방을 열어 본다. 마농을
보낸 후에 절망과 슬픔과 외로움에 지쳐서 열어 보지도 않았던 그 방. 다음날 식탁을 받았던 카트린은 한 통의 편지가 식탁과 함께 있었다고
주는데.....
21년 동안 더 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읽지 않았던 그 편지, 그 편지 속의 사연을 읽어본 페르뒤는 마농이 자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21년만에 알게 된다.
" 이럴 수가? (...) 그럴 리 없어. 마농이 그럴 수는.....! " (p.
103)
진실을 알고 난 페르뒤는 이미 때늦은 자책으로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마농을 만나러 가야한다는 생각에 그의 종이서점인 배를 남쪽으로
몰고 길을 떠난다.
연인을 만나러 떠나는 배 안에는 우연한 계기로 작가인 조당이 타게 되고, 얼마 후에는 요리사 쿠에노도 함께 가게 된다. 조당은 페르뒤와
같은 집에 살던 20대 작가인데, 그가 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됐지만 그의 소설을 폄하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며, 그 소설을 쓴 후에 다시
작품을 쓰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져 있다. 쿠에노는 사랑했던 사람을 찾아서 21년을 헤맸는데 15년 전에 그녀를 찾기는 했지만 이미 결혼을
했다.
페르뒤의 수상서점은 파리를 지나 아비뇽까지 그리고 아비뇽에서는 걸어서 마농의 포도 농장까지 가게 되는데, 그 중간 중간에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랑으로 인한 배신과 절망, 좌절, 아픔,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페르뒤가 종이약국을 찾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책을 추천해 것처럼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니나 게오르게'는 순문학, 미스터리, 스릴러,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으며 수상 경력도 각 장르에서 골고루
수상할 정도로 다양한 장르에 소질을 가진 작가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마농의 행동은 질책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책 속에 마농의 일기가 실려 있는데,
" (...) '하나가 가능하려면 다른 것도 있어야 해'를 뜻했어. 당신 두 사람,
루크와 장, 남편과 연인, 남쪽과 북쪽, 사랑과 섹스, 하늘과 땅, 육체와 정신, 시골과 도시, 당신 두 사람은 내가 하나이기 위해 필요한 두
존재야. 숨을 들이쉬는 것과 숨을 내쉬는 것과 그 사이에 마침내 존재하는 것. (...)" (p. 313)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 있듯이 어떤 이유로도 불륜은 용납될 수 없다. 마농의 행동을 결국에 알게 된 남편이
받았을 사랑의 상처.
결혼할 남자가 있음을 알고도, 결혼한 후에도 마농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페르뒤의 행동은 마농의 행동과 함께 사회의 지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페르뒤가 21년을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산 것도 멍청한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페르뒤가 사랑의 배신을 겪은 카트린과 새로운 사랑을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는 페르뒤도, 카트린도 이제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하게 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같은 사랑, 첫 눈에 반한 사랑 등 열정적인 사랑도 좋지만, 우연인듯, 필연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훨씬 잔잔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 그런 사랑이 반짝 반짝 빛나는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 책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책이 가지는 마력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덧붙여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