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학살사건, 제주 4.3 사건은 그래도 잘 알려져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상처들이지만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처음 들어보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한국전쟁이 남긴 비극적인 역사의 한 단면인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만화로 구성한 책이다.
최용탁 원작의 던푠소설을 만화가 박건웅의 만화를 통해서 우리는 접할 수
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한국전쟁 중의 민간인 학살 중의 한 사건으로 과거에 공산주의를 지지했기에
전쟁중에 북한군에게 이롭게 활동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그런 사람들을 모두 처형한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약 20만 명에 달하고,
그 학살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들이라는 점이다.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정말 북한의 공산주의를 지지한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이 책에서 그려지는 충청도의 시골마을의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시골의 갑남을녀들이다.
"연맹에 가입하믄 비료도 주고 쌀도 주고... 허허
좋더라구, 꼭 가지고 댕기라구 하던디."
"삼팔선 너머에서 우리 국군이 공산당을 몰아내고
있다던디."
" 지서에서 다들 모이랍니다.", " 뭐여 또?". "
뭐여, 또....?"



당시 학살당한 많은 촌부들의 수준은 이 정도였다. 이념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비료를 주고 쌀을
주니까 연맹에 가입을 하고, 증서를 가지고 다녔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서로 모이라는 말 한 마디에 그곳으로 갔고, 지서에서 굴비 엮이듯이
철사로 손을 묶이고, 좀 더 굵은 철사로 사람과 사람이 묶여서 수 백 명의 사람들이 깊은 산골짜기로 이동을 하였고, 거기에서 경찰의총에 맞아
골짜기를 피로 물들였던 것이다.


4년이 채 안 된 물푸레 나무가 있었던 숲은 이틀간의 굉장한 난리법석을 겪게 되고 피로
물들고 시체로 가득 메워진 골짜기로 변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단 한 마디의 어떤 설명도 없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너무도 잔인하고 처첨한 학살이었기에 작가는 사람의 시선이 아닌 어린 물푸레 나무의 시선으로 이 사건을 바라다
본다.


그래서 이 작품은 물푸레 나무의 기억을 통해서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재조명한다.

" 한 번 자리를 잡으면 결코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 없는 운명과 언젠가는 가장 가벼운 몸을 얻어 하늘로 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사이에 얼마의 나이테가 존재하는데, 어떤 굴곡의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등의 상념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 (p. 28)

만화는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디테일하게 표현을 할 수 있다. 이 만화는 온통
흑백으로만 그려져 있다. 흔히 여백의 미라는 말을 하지만 만화 속에서는 여백 조차도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만큼 암울하고 처절한 당시의 무거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장치일 것이다.
까만 바탕의 연속.... 정적 보다 더 무서운 학살의 현장.
차마 더 이상 책장을 넘기기가 무서울 정도로 공포감이 몰려온다....

때로 한 점으로 표현되는 눈동자나 선으로 묘사된 아릿한
형체 등, 흑과 백으로 구현된 세계는 언뜻 단순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장을 천천히 넘기다 보면 어느 한순간,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통, 슬픔 등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면서 강렬한 긴장감 속으로 밀려들어 가게 된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표정(88쪽), 총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섞인 학살의 순간을 은유한 장면(95쪽)이라든가, 다른 컷들과 달리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되면서 묘한 이물감으로 다가오는 이승만 상반신
컷(177쪽) 등이 어우러지면서 몰입도는 더욱 높아진다. (출판사 책 소개글 중에서)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과거의 한 시점의 역사 조차 올바르게 배우지 못했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다.
첫 장면에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생과 무지렁이 형의 대화, 훈훈한 가족애가 넘쳐
흐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얼마 후에 그런 끔찍한 학살의 현장이 펼쳐지리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물푸레나무 만이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 보았을 뿐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우리는 지금이라도 가감없는 역사를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