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글을 읽으면 푸근한 사람 냄새가 난다.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특히 시인은 자연 속에서
삶의 교훈을 얻는다. 봄에 핀 수선화를 바라보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정호승의 시나 동화를 읽으면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뒤돌아 보게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동화중의
외눈박이 비목어 이야기는 긴 여운을 남겨 주었다.
이번에 읽게 된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는 신문 칼럼인 '정호승의 새벽편지'에 소개되었던 글들과 새로 쓴 글을 함께 엮은
산문집이다. 역시 이 산문집에서도 정호승은 자연 속에서 많은 소재를 찾아서 글감으로 쓰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선인장 이야기>는 욕심으로 가득찬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땡볕에서 지친 선인장은 목이 말라서 투덜댄다.
그런데 한 줄기 비가 내리자 선인장은 욕심껏 물을 마신다. 물을 잔뜩 마신 선인장은 바람이 몰아치자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바람에
뿌리채 뽑히게 된다. 그래서 선인장은 새들의 먹이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태풍이 지나간 벌판에 수백 년이 된 왕소나무가 뿌리를 드러내고 쓰러진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풀잎은 쓰러진 듯하나 이내 바람에
살랑살랑 제 모습을 찾아간다.
인생의 벽에 부딪혔을 때에도 그 벽을 절망의 벽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벽에서 희망의 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임을 시인은 우리에게
은연중에 일깨워준다.

" 인생은 마라톤 경주가 아니다. 인생은 주어진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면서 음미하는 여행이다. 우리 또한 마라토너가 아니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가는 산책자이거나 여행자다. 똑같이 주어진 인생의 길을
마라토너로서 달려갈 게 아니라 산책자로서 걸어가야 한다. 산책자나 여행자는 뛰어가거나 달려가지 않는다. 그냥 걷는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걸음걸이로 천천히 걷는다. 나는 이제 인생이라는 길을 달리고 싶지 않다. 그냥 걷고 싶다. 그것도 좀 느릿느릿 여유 있게 걷고 싶다. 걸어가다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면 웃으면서 일어나 바짓가랑이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보기도 하고, 길가에 피어난 민들레나 제비꽃을 밟지 않도록 애써
피하면서 발걸음을 멈추고 문득 바람에 스쳐 사라지는 아카시아 향기를 마음껏 맡고 싶다. 인생을 위하여 내가 항상 마라토너처럼 달려야만 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다. " (p. 87)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는 것도 나이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 인생을 가장 왕성하게 보내야 하는 청장년층에게는 그들의 목표를 향해서 마라토너가 되어야 하는 시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황혼길에
접어든 세대라면 이처럼 길가의 민들레와 제비꽃을 볼 수 있는 시기일 것이다.

젊은 날에는 그리 자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주말을 맞아서 지리산을 다녀왔는데,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장관을 이루는 모습에,
산등성이에 드리운 구름의 모습에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 보았다.
자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도 연륜이 가져다 주는 선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그 누구나 그런 순간들을 접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 조금은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저자인 '스펜서 존슨'은 "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소중한 선물"이라고 했다. 이를 인용하여
정호승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 책 속에는 정호승 시인이 만남 박완서, 성철스님, 최인호, 정채봉 등에 대한 인연도 소개해 준다. 나도 좋아하는 동화작가인 '정채봉'의
문학적 정서는 맑음과 밝음과 깨끗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는 정채봉의 글들이 생각나서 내 마음도 맑아짐을 느끼게 해 준다.
정호승은 그의 저서에 박항률의 그림을 함께 담는 경우가 많다. 박항률의 그림은 독특해서 그의 그림을 접해 보았던 독자들에게는 금방 눈에
들어오는 그림들인데, 그림의 의미가 궁금했었다. 정호승은 책 속에 박항률의 그림에 대한 해설을 곁들여 놓았다.
박항렬은 꽃과 새가 있는 그림을 주로 그린다. 그림 속의 인물과 새가 한 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다.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서 새를
많이 그린다. 그리고 그림 속에는 단 하나의 인물만을 그린다. 그림 속의 인물은 나를 그리는 것이며 내 존재에 대한 다양성을 드러내고 비쳐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산문집 속의 글 중에는 유독 다산 선생님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정호승은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깊은 이 시대를 생각할 때 마다 다산
초당 올라가는 산길을 떠올리곤 한다. 그 길 위에서 오랜 유배의 고통 속에서 가난한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위정자의 본질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았던 다산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 바람이 없으면 내 인생이라는 연을 날릴 수 없다. 내 인생이라는 연을 날리기
위해서는 강한 고통의 바람이 필요하다. " (p. 365)
그동안 정호승의 시와 동화 그리고 산문들을 읽었는데 그때 마다 우리 주변의 보잘 것 없는 것들에서 부터 삶의 의미를 찾는 시인의 글들에
공감을 해 왔다. 이 책도 역시 삶이 힘겹게 생각되는 사람들이나 침묵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글로 다가오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