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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 -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예담 / 2013년 12월
평점 :
스페인 북부의 피레네 산맥 사이에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흩어져 있는 '에르미타'
에르미타는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이라는 의미의 건축물을 말하는데, 이 건축물은 대부분 중세시대에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온전한 에르미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축물 보다는 허물어진 건축물의 일부만을 볼 수 있는 곳도 많다.
에르미타의 흔적을 찾아서 겨울이면 스페인의 북부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으로 그 모습을 남기는 사진작가가 있다. '세바스티안 슈티제'는 벨기에인이지만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유럽 등에서 사진 작업과 전시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진과 교수로 활동을 한다.
그는 매년 겨울, 에르미타 프로젝트를 위해 스페인 북부를 가는데, 이번 7번째 에르미타를 찾아가는 길에는 전시기획자이자 에디터인 지은경과 함께 한다.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이 <순례자들의 안신처, 에르미타를 찾아서>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 각 지역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 책들에서 '에르미타'에 관한 내용을 읽은 적은 있지만 이와같이 체계적인 프로젝트로 '에르미타'를 찾아 그 모습을 담은 책은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중세시대 스페인인들의 일부가 왜 도시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곳에 에르미타를 지었을까?
에르미타는 '세상으로부터 믿음과 삶에 대한 다른 비전을 가졌던 수도자들과 은둔자들의 거처이자 수도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터키에 가면 이와 비슷한 곳을 만날 수 있다. 카파도키아에는 기암괴석으로 된 지형을 깎아서 그곳에 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데린구유에는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이 땅 속에 지하도시를 만들었는데, 미로 속에 사람들이 기거하던 주거공간, 예배당, 식당, 부엌을 비롯한 제반시설, 포도주를 만들던 곳, 곡식을 빻던 흔적까지, 심지어 묘지까지 지하 속에 건설하였었다.
에르미타도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자신의 종교 생활을 위해서, 멀고 먼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 만들 건축물이다.

'세바스티안 슈티제'는 그동안 에르미타 사진을 575채을 찍었다. 에르미타의 모습과 어울리는 하늘은 파란 하늘이 아니다.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잔뜩 찌푸린 그런 하늘이 에르미타의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있기에 혹독하게 추운 스페인 겨울의 황량한 산악지대를 7년째 돌아다닌다.
그는 에르미타 촬영을 위해서 '핀홀 카메라(나무상자로 만들어진 카메라 중에서는 가장 원시적인 카메라, 바늘구멍 사진기)를 가지고 다닌다.
핀홀카메라로 촬영을 하면,
오랜 시간동안의 노출로 사진을 밝고 약간은 흐리게 만들어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주위를 왜곡시키는 효과로 고립된 세계의 건축물이 가진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다.

하얀 눈이 내려서 나무가지들에 크리스털 눈꽃이 반짝거리는 모습과 인디고 블루의 하늘, 이것이 에르미타와 조합을 이룰 때에 진정한 에르미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상과 떨어져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음과는 이런 조합이 가장 잘 어울린다.

에르미타 중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도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옛 이야기는 그곳에 함께 남아 있다. 그리고 에르미타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에서는 철학과 진리와 삶의 지혜까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난 소, 양, 늑대 등의 동물 이야기.

특히 세바스티안과 10년 넘게 좋은 친구로 지냈던 가스파 이야기는 작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스페인의 아름다운 자연 속을 뛰어 다니면 자유를 만끽했던 개. 가스파는 어느날 트럭에 치어서 죽게 되니....
스페인 여행기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순례자의 길인 산티아고 가는 길.
그 길 보다 더 황량한 길이 에르미타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림의 끝이 어디로 닿게 될지 우리는 절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수많은 꿈을 꿀 수는 있다. 어떤 이는 부자가 되기를 꿈꾸고 어떤 이는 성공을 꿈꾼다. 어떤 이들은 긴 여행을 떠나기를 꿈꾸며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만남을 꿈꾼다. 에르미타 여행에서도 기다림은 가장 긴 시간을 차지했다.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으며 또 많은 절망들을 알게 해 주었다. " (p. 60)

이 책은 오래전에 살았던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수도하던 곳이기도 했고, 은둔자들의 공간이기도 했던 에르미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책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과거 속의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 당시의 상황과, 그들의 생활과 가장 닮은 모습을 찍으려는 한 사진작가의 긴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