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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아들,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 -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
한명기.신병주.강문식 지음 / 책과함께 / 2013년 4월
평점 :
권력이 가지는 마력은 아버지도, 아들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일까?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두 개가 될 수 없듯이 왕좌에 앉을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한 사람 뿐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는 왕권을 향한 야망이 그릇된 사건을 만들어 낸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다섯 명의 문제적 아버지, 그들은 왕이자 지존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를 살았던 다섯 명의 문제적 아들은 지존의 자리에 올랐거나 왕세자였다가 불운의 삶을 마감한 이들이다.
태조와 태종, 태종과 양녕대군, 선조와 광해군,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와 사도세자.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드라마틱하기에 그동안 책으로도 많이 출간되었지만, 영화,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왕과 아들>에서는 이 다섯 명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심도있게 조명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여야 하기에 각종 실록을 비롯한 다양한 사료의 기록을 책 속에 함께 실어 놓았으며, 왕과 왕세자의 일생을 연표로 구성하여 왕위 계승에 있어서 아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적장자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왕위 계승에는 단순히 이런 후계 구도 외에 당시의 정치 상황이나 주변국가와의 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에게는 왕세자가 자신의 왕권을 노리는 인물로까지 비쳐지게 되니 여기에서 아픈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 태조와 태종

이방원은 조선 건국에 그 누구 못지 않게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니, 당연히 태조의 뒤를 이을 후계자는 이방원이어야 했다. 그런데 막내 이복동생인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개국공신의 명단에서도 이방원의 이름이 빠지게 되니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방원의 실책은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정몽주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이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사적 친분관계가 있었기에 정몽주를 설득하여 함께 조선을 건국하려고 했던 아버지는 이 사건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이방원이 정치적 실권에서 배제되는 것은 곧 아버지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리라.

여기에 순응할 이방원이 아니기에 그는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부자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된다. 조사의 난을 평정한 후에 최후의 승자가 된 태종은 아버지 태조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효 보다는 그것이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꼭 필요하기때문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골육상쟁의 아픔을 겪고 올라 갔던 왕의 자리였기에 그는 적장자인 양녕을 세자로 책봉하지만, 부자간의 갈등은 태조와 태종의 관계에서 태종과 양녕의 관계로 대물림된다.
* 태종과 양녕대군

태종에게 적장자를 후계자로 삼는 것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자인 양녕은 학업에 소홀하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욕구를 적절히 통제하는 절제력도 부족했다. 잡희(雜戱)를 지나치게 즐기며 여자 문제가 끊이지 않았지만 태종은 양녕대군을 보호하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양녕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니 왕권은 3남인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 충녕대군에게는 정치적 야심이 없었을까, 그의 행적을 보면 문종 사후에 단종이 즉위하면서 종친의 큰 어른으로서의 정치활동이 시작된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를 지지하고 조카인 안평대군을 탄핵 등의 행적은 그가 정치적 야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아버지인 태종에게는 내쳐지는 아들이었지만 그는 그 이후 30여 년만에 세조의 집권을 도우면서 스스로 정치적 욕망을 다소나마 채운 것은 아닐까....
* 선조와 광해군

'성군과 폭군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인물이 광해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광해군은 왕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자이자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 중에 분조(分朝) 활동을 통해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분조를 이루었던 초기에 광해군은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고 선조는 아들의 안위를 우려할 정도로 서로 상대방의 애틋하게 걱정하는 관계였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변화의 조짐을 보이게 된다. 광해군이 명으로부터 왕세자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후궁인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눈을 감으면서 까지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유서를 남기지만....

광해군은 아버지에게 배운 분조와 무군사를 이끈 경험으로 외교 정책에 있어서 빛을 펼치기도 하지만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로 전전긍긍하기도 했으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왕과 왕세자의 관계였기에 미묘한 견제 심리가 있었던 것이다.
* 인조와 소현세자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소현의 운명을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조반정이 실패했다면 아버지와 함께 역적이 되어 세상을 떠났겠지만 인조 반정의 성공은 훗날 소현을 머나먼 타국인 심양으로 잡혀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과 청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창구 역할을 심양에서 하게 된다. 청은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면서 견제를 하였다. 소현세자는 청에 있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이 시기가 명청의 교체기였는데, 그는 적국의 소굴에서 적국의 장점을 보고 '청을 배우자'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인조에게 있어서 청은 오랑캐의 나라일뿐이니 여기에서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인조의 입조론과 퇴위론을 계기로 아버지는 아들을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소현과 강빈은 18년간의 포로생활 후에 고국에 돌아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현은 학질로 죽게 되고, 강빈은 사약을 받게 되고, 소현의 아들은 유배를 가게 되니, 소현세자의 둘러싼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조에서 소현세자에 이르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권력 앞에서는 단순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님을 느끼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광해군의 왕위 계승이 없었을 수도 있고, 병자호란이 없었다면 소현세자는 왕위에 무난히 올라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외세의 간섭에 의해서, 그 외세와 연관된 권력을 둘러싼 암투에 의해서 왕의 자리를 보존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 영조와 사도세자
영조는 조선 왕조에서 최장의 재위기간 (52년) 동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성과를 거둔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왕이다. 그러나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을 만들어 낸 비열한 아버지이자, 비정한 아버지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받아야하는 상황에서 정신적 피폐감과 부왕에 대한 공포심으로 시달려야 했다. 그로 인한 奇行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영조의 장기 집권이 낳은 정치적 희생양이 사도세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5명의 왕과 5명의 왕세자를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닌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음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비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너무도 잘 알려진 다섯 왕과 왕세자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흥미위주로만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세 명의 사학자들이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주변 국가와의 관계들을 짚어 가면서 깊이 있게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