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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황석영 등단 50주년을 맞아서 발표한 소설이 <여울물 소리>이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황석영의 작품들은 어른을 위한 동화인 <모랫말 아이들>, <오래된 정원>, < 강남몽>, < 바리데기>, < 낯익은 세상>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작품들은 황석영 문학 후반기인 방북 이후에 쓴 작품이다. 그러니 나는 황석영 등단 50년을 지켜보지는 못한 독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번 작품에 '이야기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남고 어떤 것이 사라지나'하는 생각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쓰기로 하였다. 이야기꾼이라고 하면 황석영 자신도 이야기꾼이 아닌가? 작가는 그의 문학 생활 50년을 되돌아 보면서 자신의 작품들 중에 어떤 작품이 남고 어떤 작품이 사라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여울물 소리>는 그렇게 해서 탄생된 소설인데, 소설의 배경은 19세기이다. 작가는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근대의 맹아기(맹아기)라고 하는데 비하여, 19세기를 반동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우리역사 속에서 19세기는 격동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세도정치, 삼정문란, 동학혁명, 청일전쟁 등 국내외적으로 큰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난 시기이다. 그래서 이 책 속에는 그런 역사적인 사건들이 주축을 이룬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사건이 임오군란이라든가, 동학혁명이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역사 속 사건의 중심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름까지도 그대로 거론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분명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이 중심이 된 동학을 이야기함을 알겠는데, 그 사상을 천지도라 하여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지만, 책 말미의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 나는 너무 리얼한 역사의 재생을 어느 정도는 파하기 위해서 이르테면 동학을 천지도로 바꿔 쓴 것처럼, 실제 인물은 조금씩 바꾸거나 몇몇 인물들을 유형별로 합쳐 놓거나 이름도 몇 자씩 바꾸거나 자와 호 또는 변성명을 이용하기도 했고 (...)" ( 작가의 말 중에서)
그렇다. 구태여 우리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조선말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소설 속에 담기 보다는 이렇게 변형한 작가의 의도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쓰면서 <여울물 소리>에 담아 놓은 민요, 판소리 대본, 언문 소설 등은 원문 그래도 인용하거나 동학 교주인 최제우와 최시형의 행적과 글은 왜곡하지 않고 사실대로 인용하였다. 그들이 바로 작가가 책 속에 담고 싶어 했던 이야기꾼이기도 한 것이다.
이 소설은 화자인 시골 양반출신의 아버지와 관기였던 월선 사이에서 태어난 연옥이가 엄마가 운영하는 다리목 객주집에 묵게 된 이신통과의 하루밤을 잊지 못해 그의 일생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당시에는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전기수라고 했는데, 이신통은 그 누구보다는 생동감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야기꾼이다. 그의 인생은 서얼 출신이기에 과거를 볼 수도 없고, 그러니 관직에도 나갈 수 없는 처지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세상을 떠돌아 다니면서 이야기를 읽어주는 전기수로 살아간다. 그러나 워낙 재능이 많아서 강담사, 재담꾼, 광대 물주, 연희 대본가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천지도에 입도하여 혁명에 가담하기도 하고, 훗날 그의 스승들이 죽은 후에는 그들의 사상과 행적을 기록하는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 19세기인지라 조선말의 부패한 정부의 상황이나 서얼차별로 인하여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나 부자들이 벼슬을 하기 위해서 과거에 동원하는 부정 행위들이 적나라하게 소개된다. 그리고 임오군란이나 동학혁명로 자연스럽게 소설 속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이신통과 같은 인물은 조선 후기의 지식층의 주변부에 있던 서얼 등의 이유로 신분상승이 불가능했던 독서계층이었는데, 당시에 이들에 의해서 많은 언패소설이쓰여졌고, 이를 읽어주는 이야기꾼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동학의 주축 세력이기도 했다.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이야기꾼들이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한 의문을 이 소설은 잘 표현하고 있다. 마치 현대의 이야기꾼인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빗대어서 소설 속에 담아 놓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어떤 변화가 동학정신과 연결이 된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눈 감고 있을 때에는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다가 눈을 뜨면 멀찍이 물러가서 아주 작아졌다. 가만히 숨죽이고 그 소리를 들었다. 여울물 소리는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고 흐느끼다 또는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러갔다. " (p. 488)
<여울물 소리>는 황석영 등단 50주년을 맞는 소설인데, 출판사의 불미스러운 일로 이 책이 절판이 되어서 아쉬운 감이 든다. 작가에게는 그 어떤 소설보다도 의미있는 책이었을텐데, 그 아픔이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