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대구에서 일어났던 왕따 중학생 자살 사건이 머리를 스쳐간다. 가족이 없는 시간에 친구집에서 자행되었던 끔찍한 폭행, 물고문에 전선으로 손발을 묶는 행동, 글로브를 비롯한 운동기구를 이용한 폭행, 게임 아이템을 높이라고 잠도 못자고 게임을 하도록 하는 등, 도저히 학생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을 했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말을 안 들으면 협박성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 견디다 못한 14살 중학생은 몇 장의 유서에 가해자의 실명과 함께 자신이 지금까지 당한 피해 상황을 써 놓고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자살했다. 그이후에도 이런 왕따 학생 자살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그 근본 해결 방안은 없다.

<십자가>는 일본판 왕따 중학생 자살사건인데, 우리나라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중학교 2학년인 후지슌도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다가 자신의 집 감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한다.

그의 유서에는,

" 나는 모든 사람들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p. 11)라고 쓰여 있고, 이어서 4명의 실명이 담겨 있다.

" 사나다 유, 나의 절친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유 짱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할게."

" 미시마 다케히로, 네모토 신야. 영원히 용서 못 해. 끝까지 저주할 거야. 지옥으로 가라!"
"나카가와 사유리, 귀찮게 해서 미안해. 생일 축하해. 행복하기를 바랄게." (p.12)

이렇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녀석, 짝사랑한 여학생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미시마와 네모토는 학기초부터 후지슌을 괴롭힌 소문난 불량 학생인데, 그들은 반 친구 중에서 후지슌을

괴롭힐 학생을 물색해서 대신 괴롭히도록 했는데, 그가 사카이이다. 사카이는 미시마와 네모토보다도 더 그를 괴롭혔건만, 그의 이름은 유서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유서 속의 두 학생은 절친이라고 후지숀이 말했던 사나다 유인데, 그는 자신이 왜 후지숀의 절친이 되었는가를 알지 못한다.

후지슌을 괴롭혔던 녀석들은 3명이었지만 그외에도 2학년 3반의 학생들 중에는 재미삼아, 아니면 미시마와 네모토가 '너도 한 번 해봐'라는 지시에 따라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사나다 유는 아이들이 그를 괴롭히는 것을 다른 아이들처럼 그냥 지켜 보았을 뿐인데, 절친이라니...

그리고 짝사랑 여학생 사유리는 후지숀이 죽던 날이 그녀의 생일이었는데, 후지숀이 생일 선물을 전달하고 싶다는 것을 냉정하게 거절을 했다. 그런데도 후지숀은 택배로 선물을 보냈고, 그 선물을 포장하던 편의점에서 자살할 때에 사용했던 테이프를 구입했던 것이다.

그러니, 유서 속에 자신들의 이름이 써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무거운 짐을 떠안은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후지숀의 죽음 이후에 20년간에 걸쳐서 사나다 유와 사유리가 얼마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는가를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사나다 유에게는 유서 속의 절친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겁게 그를 짓눌렸는지를,

사유리에게는 자신의 생일날이 즐거운 날이 아닌 후지숀의 죽음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날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후지숀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아버지는 사나다 유에게 "절친이었는데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네"

" 말 그대로 눈을 뻔히 뜨고 죽게 내버려뒀군" " (...) 내 말이 틀렸어? 너는 친구를 죽게 내버려 둔거야"

후지슌의 동생까지도 "절친인데... 왜 배신했어?"

흔히 이런 이야기들이 자살한 왕따 소년에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이 소설은 그의 죽음 후에 남아 있어야 했던 가족,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리기에 좀 다른 의미로 해석해 나가야 한다.

후지숀의 죽음이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을 비난하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나이프의 말과 십자가의 말.

나이프의 말은 가슴에 박히게 된다. 그래서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 때는 찔리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듯이 아픔은 사라진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후지슌의 자살은 가족들에게도, 절친인 사나다 유에게도, 짝사랑인 사유리에게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나날의 시작이 된다.
후지숀의 부모는 아들의 죽음이후에 시간이 멈추어 버린다. 아들과의 추억을 생각하고, 기일을 챙기고, 자식의 최후가 된 감나무를 바라보면서 눈물과 탄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14살 피어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의 죽음이 왜 안타깝지 않겠는가, 왜 애통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부모의 언행은 후지숀에 의해서 숨도 못 쉬고 살아가는 사유리와 사나다유에게는 너무도 가혹하게 다가오는 고통인 것이다. 10대와 20대를 온통 후지숀의 죽음때문에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짊어진 듯이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 사람의 기억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한 사람에 얽힌 추억이 강물에 떠내려가듯 조금씩 멀어지고 잊힌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 추억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여겼던 추억이 갑자기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생하게 다가오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이 파도에 씻기듯 한꺼번에 먼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바다는 잔잔할 때도 있고 거칠어질 때도 있다. 밀물일 때도 있고 썰물일 때도 있다. 그것을 반복하면서 추억은 조금씩 바다로 떠내려가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때 우리는 겨우 하나의추억을 잊어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 (p.p. 284~285)

사나다 유와 사유리가 중학교 도서실에서 찾아 낸 후지슌의 흔적. < 세계의 여행-유럽>편에 꽂혀 있던 후지숀이 남긴 쪽지는 오랜 시간이 흘러간 후에 그의 부모와 그들이 십자가를 내려 놓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후지슌이 가장 마지막에 가보고 싶었던 스톡홀름의 '숲의 묘지'의 하얀 십자가, 사방이 온통 잔디가 깔린 언덕이 보이고, 그 언덕 위에는 하얀 십자가가 솟아 있는 그곳.

그동안 20년간에 걸쳐서도 풀리지 않았던 후지숀이 유서에 쓴 절친이라는 의미를 사나다 유는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왕따 자살 사건으로 시작하는 <십자가>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의 곁에는 누군가가 있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에게 행해지는 행동들이 정의롭지 못한 일임을 그를 둘러싼 아이들은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가 없다. 그들은 그런 행동을 하는 불량 학생들에게 맞설 자신이 없다. 그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도 보복이 두렵다. 그래서 남들도 가만히 보고 있는데, 구태여 내가 왜 그 일에 끼어 들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 주변에 그런 학생이 있다면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모두 함께 힘을 합한다면 아무리 무차별적인 폭력이라도 그것으로부터 친구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왕따 학생의 부모들에게도 잘못은 있다. 자식의 행동을 항상 눈여겨 보고, 그런 일을 사전에 예방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작가인 '시게마츠 기요시'가 텔레비전에서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자살한 학생의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본 후에 2주 만에 쓴 소설이라고 한다. 그만큼 진한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왕따 학생들에 대한 생각, 왕따로 인해서 자살을 하게 된 학생들의 남겨진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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