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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2011년 연말, 책관련 시상식장에서 정유정 작가를 만난 것이 어쩌면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에 빠져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던 소설로 <7년의 밤/ 정유정 ㅣ 은행나무 ㅣ 2011>이 있다.
당시에는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서 작가의 작품 활동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읽게 된 <7년의 밤>은 여성 작가가 썼다고 생각하기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한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

<7년의 밤>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이었다.
작가의 소설 쓰기 특징 중의 하나가 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치밀한 자료 조사와 취재가 바탕이 되기에 소설을 쓰는 중간에는 그 어떤 원고 청탁도 받지를 않는다고 한다.
<7년의 밤>이 좋았기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 보기로 했는데, <내 심장을 쏴라>가 정유정의 소설 중에서 두 번째로 읽게 된 작품이다.
이 소설 역시, 몇 년간에 걸쳐서 완성된 소설을 폐기해 버리고 다시 쓰는 과정을 거듭하여 독자들곁으로 올 수 있었던 작품이다.
특히 소설의 배경이 정신병원 중에서도 폐쇄 병원의 이야기이기에 작가는 수 차례의 의뢰끝에 폐쇄 병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 졌고, 일주일간, 출퇴근 형식으로 병원에 있는 환자들과 병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료 조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것만으로 이 소설이 탄생한 것은 아니고, 작가는 간호사와 건강보험 심사평가원 심사직에 근무한 경력도 있다. 그외에 병원 관련 선후배, 정신과 의사 등과의 폭넓은 접촉을 통해서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의식 속에서 그것을 깨닫고 있다면,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겨울까....
그런 이야기를 정신병 환자들이 치료받는 폐쇄 병원에서 끄집어 내는 것이다.
" 정신병원은 치료기관이 아니라, 교육기관이라는 걸, 순응을 익히는 학습장이라는 걸, 반항은 더 지독한 금지와 같은 말이라는 걸, 도와달라고 소리쳐봐야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다는 걸, 그러나 아무리 잘 알아도 참을 수 없는 일은 참을 수 없다. 그건 자명종이다. 야수를 깨우는 자명종. " (p.p 46~47)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는 두 주인공은 이수명과 류승민이다.
정신병원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한다.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이수명과 류승민은 같은 병실에 갇히게 된 스물 다섯 살 청년.
수명의 엄마는 정신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좀 나아지면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되던 어느날, 퇴원하여 방에 갇혀 지내던 엄마가 욕조 속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자살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후에 수명은 목소리 환청에 시달리게 된다.
봄날의 바람처럼 미약한 소리가 기차 소리처럼 커지기도 하고, 심오하고 이해할 수 없는 철학적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그런 자신의 귀에 달라 붙어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어느날부턴가 수명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 역할을 한다. 목소리 환청과 편집증적 사고로 인하여 정신병원에 갇혀 살다가 그것을 극복하고 퇴원을 하게 된다.
" 두려워했지만, 증오했지만, 나를 통째 거덜내버린 놈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존재였다. " (p. 57)
그러나 퇴원도 잠시뿐이었고, 수명은 거리에서 잃어버린 길을 묻다가 성폭행 미수범으로 오해를 받고, 그것이 정신병력에서 온 것이라는 판단으로 다시 강원도 산골의 폐쇄 병원에 갇히게 된다.
승민은 재벌가의 혼외자로, 재벌의 두 번째 부인밑에서 자라게 된다. 승민을 싫어하는 부인에 의해서 열네 살에 품행장애 판정을 받고, 미국의 한적한 시골로 보내지게 된다.
" 불놀이를 하다 버림받은 재벌가의 왕자, 못 미치게 해서 미쳐 버린 미치광이.(...) 놔두면 사이코 패스가 될 불덩이." (p.p. 142~143)
스물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유서때문에 폐쇄병동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들이 갇힌 강원도 두메 산골, 한적한 폐쇄 병원은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간혹 나오는 그런 정신병원이다.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는 곳, 가족들이 그들을 정신병자라는 미명하에 그곳으로 보내고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갇힌 곳, 환자 치료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폭행, 감금, 약물치료.
그곳에 갇힌, 김용, 집운산 아저씨, 거리의 악사, 경보선수, 만식씨, 한이와 지은이...
그들의 사연도 오십 보, 백 보이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는 환자들이지만, 그들에게는 보통사람보다 더 끈끈한 정이 있기도 하다.
수명과 승민은 처음 만남에서부터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시도 때도 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발각이 되고, 탈출하다 잡혀 오고, 그리고 독방에 감금되어 손발이 묶여서 초죽음을이 되기도 한다.
탈출의 시도는 승민에 의해서 실행되고, 수명은 어찌 하다 보니, 그런 시도에 얽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수명은 자신이 두려워 했던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명과 승민은 정반대의 기질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수명은 미쳐서 갇힌자로, 자신의 안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자이고,
승민은 갇혀서 미쳐가고 있는 자로, 밖으로 나가기 위한 시도를 하는 자이다.
" 날고 있는 동안 나는 온전한 나야. 어쩌다 태어난 누구누구의 혼외자도 아니고, 불의 충동에 시달리는 미치광이도 아닌, 그냥 나.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 (...)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게 무서워서 ,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 (p. 286)

아마도, 작가는 폐쇄병원의 실태를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겠지만, 작가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처럼 "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젊은이들에게 던지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수명처럼 현실에 대처하지 못하고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그 돌파구는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는가 한다.
무지막지한 폐쇄병원에서도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 실패하게 되면 독방에 갇히고, 두들겨 맞으면서 갖은 수모를 당하지만, 그래도 다시 시도해 보는 그런 승민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수명이 세상 밖으로 나가 당당하게 자신의 심장을 쏘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을 향해서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젊은이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은 거친 세상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 큰 감동이 있다.
그리고 희망이 있다.
<내 심장을 쏴라>는 2009년 제 5회 세계 문학상 수상작답게 치밀한 구성과 독특한 캐릭터, 그리고 소설 속 곳곳에 담겨 있는 블랙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흡인력도 대단한 작품으로 읽는내내 흥미로움을 잃지 않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