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인연>, 민태원의 <청춘예찬>, 이양하의 <나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수필들인가.
학창시절에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접했던수필들이지만, 아직까지도 수필의 몇 구절은 생생하게 머릿속에 박혀 있다.
그 수필들이 그처럼 아름답게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수필만이 가지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글이면서 은유적 표현들이 그 빛을 발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정말 오랜만에 잡문이 아닌 수필다운 수필들을 담은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장정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책을 손에 잡는 순간 느껴지는 도톰하면서도 부드럽게 폭신거리는 질감이 느껴진다.
낯익지 않은 저자의 이름.
어려서는 시인을 꿈꿨으나 '머뭇거리고 서성거리다가 아까운 날들을 떠내려 보냈다'(저자 소개글 중에서)는 그녀.
'쓰는 일을 통한 자아 확장과 소통의 기쁨을 가장 큰 성취고 소득이라 생각한다. 삶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와 불가해한 은유들을 정관(靜觀)의 여유 속에 풀어내고 싶어 수필 쓰기를 선택했다. ' (저자 소개 글 중에서)
저자가 직접 쓴 자신을 소개하는 글부터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녀의 수필들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딸을 시집보내서 장모가 되었다는 글이 있는 것을 보아 인생의 연륜이 쌓였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한 주제, 한 주제 따라 읽어 나가게 되는데, 처음의 글들은 다소 평소 우리들이 쓰지 않는 단어들과 관용어구들, 수식어들, 그리고 정제된 언어들이 부담스럽게 읽는 속도를 방해한다.
수필이 갖는 은유적 세계에 익숙하지 못한 탓인지, 낯선 단어들이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수필이 가지는 진솔한 내용들이 내 머릿속에서는 붕붕 떠다니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멋을 한껏 부린 것같기도 하고, 글쓰기를 훈련받은 듯한 느낌이 그리 달갑지 않지는 않다.
피천득 님의 추천사 중에,
" 그의 글은 정적이면서도 지적입니다. 반짝이는 예지, 조금만 드러낼 줄 아는 자제력, 정제된 언어 그런 것들로 해서 그의 글은 아름답습니다. 그의 글에 대해서라면 나는 어떤 찬사도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 " (책 표지 뒤, 피천득 글 중에서)
아~~ 그동안 나는 너무도 쉬운 글들, 달콤한 글들, 읽는 순간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글들에 너무도 많이 적응이 되어 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들기도 한다.
'정적이고, 지적인 글, 정제된 언어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다니....
이런 생각들이 오고 가면서 읽어 나가게 되자, 이제는 저자의 글들이 또렷이 다가오기도 한다.
이 수필들은 주제마다 어려운 글들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평상적인 글들과도 만나게 되고, 짧은 글 속에서 빛나는 은유의 표현에 길들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저자의 마음도 드러나고, 어떤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는 날카로운 저자의 눈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름다운 글들 속에 빠져 들기도 하는 것이다.

" 삶은 농담 같은 진담, 목숨은 예외없는 필패 (必敗). 그보다 더 쓸쓸한 일은 무심한 척, 쾌활한 척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만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는 일의 시름과 덧없음마저 춤으로 환치할 줄 아는 저 가을 억새들처럼. " (p.39)
" 사랑은 언제 깊어지는가.
마주하는 동안에는 서로에게 취하여 그리움의 키를 늘이지 못한다. 구석진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부재가 주는 외로움 속에서, 만남과 만남 사이 적막한 틈새에서 내밀하게 가지를 뻗고 뿌리를 내린다. " (pp. 94~95)
" 처음 두모악에 들렀을 때 김영갑 선생은 이미 떠난 뒤였다. 갤러리를 맡고 있던 그와 사진 이야기를 하며 느릿느릿 친해졌다. 인생이 살아볼 만한 것은 예정된 운명이 아닌 우연과 돌발성 때문일지 모른다. 그 돌발성마저 누군가 정교하게 연출해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p. 128)

" 갯무꽃이 몽환적으로 흔들린다. 해안가를 따라 지천으로 피어난 연보랏빛 꽃들은 목하 한창 우화중이다. 조금 있으면 날개 여린 부전나비가 되어 하늘 저 편으로 날아가 버릴 같다. 오늘은 바람도 출타중인지 꽃너울 저편, 갈맷빛 바다가 평화스럽다. 바람 없는 날에는 바다가 일쑤 시울시울 졸고 앉았다. " (p242)
처음 책을 손에 잡았을 때는 그렇게 낯설게 다가오는 글들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한 주제, 한 주제... 넘어가면서 저자의 마음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수가 있을까?
삶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와 불가해한 은유들을 정관(靜觀)의 여유 속에 풀어내고 싶어 수필 쓰기를 선택했다. ' 는 그녀의 수필.
그동안 수필다운 수필을 접하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정제하고 정제해서 쓴 글들에서 저자의 글쓰기의 아름다움을 느껴본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