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자
정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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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의 저자인 '정찬'은 등단한지 30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권력과 인간의 관계, 신과 구원의 문제 등 관념의 세계에 대한 내용의 글들로 선이 굵은 그런 소설을 써왔다고 한다.

 

 

그가 쓴 <광야>는 그동안 많은 소설가들의 문학적 소재가 되었던 '5월의 광주'를.

<빌라도 예수>는 오랫동안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된 '신약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는 예수의 존재를.

소설가는 그동안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는 책이라기 보다는 현대인들에게 무언가 큰 물음을 던지는 그런 작품들을 주로 썼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정찬'의 소설을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그동안 그가 썼던 <광야>, <빌라도 예수>, <베니스에서 죽다>가 어떤 책인지도 모른채.

처음 접하는 작가의 소설은 평범치는 않다. 흔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런 이야기들이 줄줄 이어져 나온다.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종교의 이야기를 넘나들면서.

예수의 이야기에서, 십자군이야기,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서 한국의 무속까지.

0 세기에서 2000년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무속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로.

종횡무진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이 소설이 환생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전생과 환생을 넘나들면서 '전생의 시간'과 '현생의 시간'이 교차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라고 해야할까? 아마도 전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환생이란 판타지 일 수 밖에 없으니까.

이 소설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가려는 나에게 벽장 속의 물건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브라힘의 이야기가 담긴 녹음기, 녹음의 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한 노트, '티베트 사자의 서'의 영역본.

이 세가지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장치인 셈이다.

나는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가 4살이 되던 해에 한국으로 들어간 후에 자신이 죽었다고 아들에게 말해주기를 원하였기에 어머니의 존재를 모른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신내림을 받아서 무속인이 되어 살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속에는 무속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 무속에서 행하는 굿에 대한 내용이 어떤 책에서도 읽을 수 없는 좋은 자료들로 담겨 있기도 하다.

그가 아랍인 청년인 이브라임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아비규환의 이라크 전쟁의 종군기자로 일하면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브라임은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들려주는 전생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의 전생이 아닌, 여러 번의 전생을 기억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물론, 전생에서 이브라임과 나는 함께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 그의 머릿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애들이 뚜렷한 경계없이 흐릿한 형태로 뒤셖여 있" 다 (p. 67)

이브라힘의 전생이야기는 십자군전쟁시대와 예수시대로 나뉘어지게 된다. 이브라힘과 나는 이 전쟁에서 함께 했었다. 이브라힘은 이집트 와지르 기록관, 나는 십자군 사제.

나는 이브라힘을 죽였던 사람이다. 그 바탕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있으니.

십자군 전쟁의 이야기는 그들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못지 않게 그 전쟁의 학살 장면이 끔찍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신이 원하기때문에 전쟁을 한다는 십자군들. 십자군 전쟁이 종교 전쟁이면서도 그 목적이 희석되었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 종교가 일을킬 수 있었던 전쟁의 폐해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그들이 얽힐 수 밖에 없었던 전생의 한 부분에 예수가 있었는데, 이브라힘은 예수시대의 전생도 기억을 한다. 그는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예수의 아이를 낳았던 여인.

예수의 일대기가 소설 속에 그려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신의 모습이 아닌 그런 예수의 모습으로.

물론, 이브라힘은 그가 하늘에서 온 존재임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을 확인하기를 원한다.

보고는 믿지만, 안 보고는 믿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일까?

아니,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나오는 한 문장처럼 " 믿음은 너무 과대평가되었고, 실천은 너무 과소평가되었" 다는데, 기독교인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신성한 신을 이렇게 묘사했다고 문제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종교인들에게는 신적 존재를 소설에 등장시키는 것까지도 거북스럽게 생각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있어서 무속인으로서의 어머니. 그래서 이 소설 속에는 무속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신내림을 받았기에 아들과 헤어져야 했던 어미. 그리고 무속의 길을 걸어야 했던 여인의 이야기.

 

 

이 책을 읽으면서 최면에 의해서 자신의 전생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끔은 재미로 들은 적은 있지만, 소설 속에서 들려주는 환생을 소재로 한 이야기.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소설의 스케일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까?

이 소설은 "삶의 유랑'에 관한 입체적인 이야기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것이 환생이란 소재를 가지고 예수시대를, 십자군 시대를. 오늘날 무속인의 세계를 그려 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다양한 종교들이 나오기도 하고, 깊이 있는 내용들이 나오기도 하기에 소설적 재미만을 생각하고 읽는다면 제대로 이 소설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생을 사는 존재일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졌던 사람일 수도 있을 지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환생이란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잡히는 것이 없기에 그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생각에 불과한 뿐이다.

나 역시 환생을 믿지는 않지만, 우린 삶을 스쳐가는 유랑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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