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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요 언덕
차인표 지음, 김재홍 그림 / 살림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그대 품안에>라는 말이 어울리는 연예인, 차인표.
그의 가슴은 항상 따뜻하여,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빛과 소금같은 역할을 하는 바른생활 사나이가 차인표가 아닐까 생각된다.
<잘 가요 언덕>이 출간되었을 당시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동안 연예인들의 책 출간을 많이 보아 왔는데, 그런 책들 중에는 패션, 사진, 일상생활을 담은 에세이집들이 대부분이었고, 소설을 선보이는 연예인들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에는 화보와 함께 대필작가의 글임이 선명하게 보이는 작품들도 많았다.
연예인이 쓴 소설들도 읽어 보았지만, 과연 연예인이라는 유명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떤 출판사에서 출판을 해 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장정일이 <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 썼듯이, 작가는 정말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책은 외출할 때에 가지고 나가서 공중전화 부스에 놓고 온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고 싶은 책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쓴 소설이라는 것만으로도 '과연 잘 썼을까?' 하는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쳐 갈뻔했던 책이었는데, 우연히 최근작인 <오늘예보>에 대한 누군가의 서평을 읽게 되면서 관심이 가게 된 책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일상적인 가벼운 주제를 다루었으니라고 생각했던 편견까지도 불식시키는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문체도 서정적이면서 깔끔한 소설이다.
다만, 책 속의 문장들의 서술형이 익숙하지 않은, " ~~ㅂ니다.'의 경어법 존경어미를 쓰기때문에 처음에는 동화나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책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931년에서 1938년까지의 7년간의 이야기로, 장소적 배경은 백두산의 호랑이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호랑이 마을에 있는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언덕의 이름이 '잘 가요 언덕'인 것이다.
오래전 영화를 보면 징용을 당하거나,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이나 남편의 모습을 오래 오래 언덕에 올라서 지켜보는 그런 언덕.
도시로 나가는 자식을 배웅하는 언덕.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문화평론가 '이어령'은 '잘 가요, 언덕'을 "아픈 과거를 어루만지는 상징적 공간'이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순이 할머니가 일제 강점기에 위안부로 필리핀에 끌려갔다가 70년만에 백두산 호랑이 마을의 잘 가요 언덕에서 먼 옛추억을 떠올리는 언덕이기에 큰 의미를 가지는 공간인 것이다.

1931년 가을, 백두산 호랑이 마을을 찾는 황포수와 아들 용이.
그리고, 이들을 맞이하는 마을 사람 중에 촌장의 손녀인 순이와 부모없는 아이인 훌쩍이.
용이는 백호가 엄마와 동생을 물어갔기에 아버지인 황포수를 따라서 백호를 잡기 위해서 다니는 소년인 것이다.
황포수와 용이는 첫눈이 하얗게 내린 날, 호랑이를 잡으러 깊은 산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들이 잡은 육발이 호랑이는 마을에 내려와서 많은 피해를 입히고 다니는 무서운 호랑이이지만, 그 호랑이 역시 사람들에게 잡히고 남은 한 마리의 새끼 호랑이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 엄마 잃은 자식과 자식 잃은 엄마, 누가 더 슬플까요? 누가 더 슬픈지 알 수는 없지만, 엄마 잃은 용이와 순이는 새끼 잃은 엄마 호랑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같습니다. (...)
우리 엄마는 .... 엄마별에 못 가셨을 거야. 백호한테 물려가셨거든, 아빠가 그랬어. 엄마를 물어 간 그 못된 백호를 잡아서 흰 가죽에 내 눈물을 떨어뜨려야 한대. 꼭 복수를 해야만 그때서야 엄마 영혼이 평안해질 거래 " (p59~60)
이 시기가 일제강점기이기에 여기에 일본 군인 가즈오 마쯔에다의 이야기가 호랑이 마을의 사람들 이야기와 씨줄과 날줄처럼 짜여지다가 한 이야기로 합쳐지게 되는 것이다.
가즈오는 일본인으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다가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전쟁터에 나가기로 자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즈오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만 소개되다가 이야기가 무르익으면서, 가즈오는 전쟁에 참가한지 7년만에 한국의 백두산 근처로 파병되는 것이다.
이미 가즈오는 자신이 참전하는 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회의를 느끼던 중에 한국에 건너오게 된다.
순이가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는 것을 계기로 이 소설을 절정에 이루게 되는 것이다.
" 저는 비열한 일본군 장교로서 어머니의 품에 안기느니, 용서를 구하는 한 인간으로서 죽어서라도 어머니의 품에 안기겠습니다. " (p133)
여기에서 우리는 육발이와 용이의 이야기를 통해서 호랑이도 그렇게 난폭하게 된 것에는 사람들이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흔힌 일본군 장교라고 하면 잔악무도한 캐릭터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가즈오를 통해서 인정이 넘치는 인간미를 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떤 이유나 계기가 있기에 난폭해 질 수도 있고, 은혜를 입게 되면 고마워 할 줄도 알고, 정도 넘쳐 흐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이기에 좀 어두운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으나, 위안부로 가게 되기까지의 이야기와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70년후에 잘 가요 언덕에 올라 옛 기억을 더듬어 보는 이야기이기에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를 다루지만, 순이와 용이, 훌쩍이, 가즈오의 이야기가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비쳐지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ㅂ니다'의 경어 종결형 어미를 사용하기에 어린이들에서부터 노인에 이루기까지 어떤 계층이 읽어도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독자층에게 읽힐 수 있는 소설이다.
읽는 계층에 따라서 그 느낌은 같을 수도 있지만, 느낌의 폭은 엄청나게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첫 소설을 발표하는 연예인의 작품이라고는 볼 수없을 정도로 치밀한 구성과 주제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백두산 지역의 정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그곳의 정경이 떠오를 정도로 서정적이다.
작품 속의 캐릭터들도 1931년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아픈 과거를 잘 가요 언덕이라는 공간을 빌어서 자신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표현한 수작(秀作)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차인표의 최근작인 <오늘예보>까지 함께 읽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