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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멘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1년 10월
평점 :
<모멘트>를 읽으려고 하는 독자들은 거의 <빅 픽처>를 읽은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에게는 생소하기만 했던 '더글라스 케네디'라는 작가의 작품인 <빅 픽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작품이었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변호사가 된 '벤 브래드 포드'는 남보기에는 완벽한 것을 갖춘 사람이지만 자신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아내가 옆집 남자 게리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알고, 게리와 다툼끝에 살해를 하게 되고,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게리의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애드류 타벨이란 인물로 살게 되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이야기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결말을 생각할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섬세한 묘사와 치밀한 구성은 <빅 픽처>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 <노란길>처럼 숲 속의 두 갈래 길에서 내가 가지 않은 길.
내가 사람이 적게 간 길을 선택했기에 내 인생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 길에 대한 아쉬움.
<빅 픽처>는 마치 그 노란길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로 다시 갔었지만 그 길도 역시 벤에게는 한때는 행복하기도 했지만, 그리 쉽지는 않은 길이었음을 일깨워주는 그런 이야기였는데, 읽은 후의 여운이 아주 오래 갔던 그런 소설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출간된 '더글라스 케네디'의 열 번째 소설이자,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그의 세 번째 소설인 <모멘트>는 주저없이 선택할 수 있었던 책이다.
역시 <모멘트>는 첫장부터 빠르고도 쉽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감이 붙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치 분단 한국의 현실과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1984년의 서베를린에서는 일어날 수도 있었던 그런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통독이전인 1984년, 서베를린을 무대로 전개된다.
미국인 여행작가인 토마스는 서베를린에 있는 방송국 <라디오 리버티>에서 페트라를 만나는 순간에 운명적인 사랑을 예감한다.
페트라는 토마스의 원고를 번역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동베를린에서 추방당한 여자로 가슴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토마스 역시, 부모들의 원만하지 않은 결혼 생활에서 오는 불안감에서 언제나 도망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여자와의 결혼이나 그밖의 선택의 순간에는 어디론가 도망치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베를린에 오게 된 이유도 그런 도피였던 것이다.
토마스와 페트라는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들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 토마스는 페트라에게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고 그녀의 사랑을 배신하게 된다.
토마스에게는 그녀가 먼저 배신을 하였기에, 선택하게 된 배신이었지만, 평생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운명적 사랑을 했던 때로부터 25년이 지난 어느날 토마스에게 날라온 페트라의 소포를 보면서 그가 오래전에 써두었던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이어서 페트라의 소포 속의 두 권의 노트를 읽는 것으로, 그리고 그후의 이야기로 전개가 된다.
" 소설이 소설이 아닐 때는? 작가의 체험담일테지,
설령 그 소설이 작가의 체험담이더라도 작가의 시각으로 바라본 경험아닌가. 그래, 내 이야기,
내 시각으로 그린 이야기, 그리고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 내가 '지금의 나'로 있게 된 이유" (p35)
말하자면 소설 속의 소설인 액자소설과 소설 속의 편지글이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모멘트>가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1984년이란 시대적 배경 속의 동베를린에 대해서 세심한 묘사를 했다는 것이다.
잿빛의 도시였던 동베를린,
그리고 장벽을 사이에 둔 서베를린.
두 곳사이에 존재했던 비밀경찰이란 존재.
이중간첩이 될 수 밖에 없는 여인의 이야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독자들은 '더글라스 케네디'가 1984년대에 동베를린을 갔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의 세심한 관찰력과 묘사가 작품 속에서 당시의 동베를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작품은 2011년 신작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면 조금은 의아한 생각도 들게 되는 것이다.
그당시 작가는 동베를린을 방문했었고, 어딘가에 그 기록을 남겼다가 이제야 풀어 놓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순간"인 것이다.
순간의 선택을 해야 할 때에 항상 도망치고 달아나려고 했던 토마스를 통해서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모든 순간 순간이 모여 지금의 삶을 이루었다 !"는 것을....
"살다보면 행운을 만나는 순간도 있다는 것. 운명의 손길, 별의 기운, 신의 입김 등이 나를 위해 힘을 발휘할 때가 분명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50)

페트라와의 마지막 날에 그는 왜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까?
그는 그 때문에 평생을 페트라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페트라 역시 왜 운명적인 사랑앞에서 결혼까지 결심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지 못했을까?
그 순간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그리면서 살아갔는데....
그들에게서 그날의 일을, 그날의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삶의 모습이 아니던가.
비록, 되돌렸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후회없는 삶이 되었을까?
" 오랜 세월, 내가 남몰래 페트라를 그리워할 때,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때, 내 자신이 망가뜨리고 잃어버린 사랑에 안타까워할 때, 그녀의 해명을 끝내 묵살한 게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플 때....
오랜 세월, 페트라는 여전히 나를 사랑했고,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 (p558)
"우리는 언제나 운명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긴다. 하지만 운명을 조종하는 건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바람과 달리, 우리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조종한다. 아무리 끔찍한 비극과 맞닥뜨려도 우리는 그 비극에 걸려 넘어질 지 아니면 넘어서서 앞으로 나아갈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비극에 맞설지 피할지조 선택할 수 있다. " (p 574)
"어쨌든 인생은 선택이다. 우리는 늘 자신이 선택한 시나리오로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고, 앞으로 전진해야하고,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아니,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길지 않은 인생을 가치있게 만들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뜻대로 완성해가야 한다.
완성.
인생에서 '완성'될 수 있는게 과연 있을까? 아니면 그저 잃어버린 것과 우연히 마주치는 게 인생의 전부일까?" (p590)
"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순간이 있다.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순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순간, 우리 앞에 놓인 순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얻을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는 순간.
우리는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주 짧은 찰나라도 순간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p592)
<빅 픽처>는 결말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신에 또다른 변신을 거듭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흥미로우면서도 읽은 후에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에 비하여 <모멘트>는 어찌 보면 결말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이야기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나, 소설 중간 중간에 소설의 내용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문장들이 산재되어 있다.
그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가지게 만들어 준다.
삶에 있어서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던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혹시 나도 토마스처럼 선택의 순간에 도망치고는 그 순간을 회피한 것에 대해 오랫동안 힘겨워 하지는 않았던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 소설은 운명적 사랑을 통해서 인생의 순간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에 깊은 감동으로 가슴에 와닿는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