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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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튜는 멀리로 던진 공을 찾으러 떠나고 없어. 더 이상 우리가 마튜를 도와 공을 찾아 줄 수 없는 그런 곳으로 가버렸지.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 남아있는 토마는 점점 더 멍하니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구나, 그런 지금 그대로 아빠는 너희들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려 한단다. 내 아들들을 위해 아빠가 쓰는 책이야. 우리 모두가 너희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쓰는 책이요, 너희 들이 그저 장애인 증명서에 붙여진 사진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쓰는 책이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하지 못한 말들을 적는 그런 책..... (p8)
이 책은 프랑스의 유명한 블랙 유머 작가이자 연출가인 '장 루이 푸르니에'가 자신의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이다. 위의 글로 독자들은 짐작을 했겠지만, 장애를 가진 두아들을 둔 아버지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과도 같은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아들, 마튜와 토마.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앞을 볼 수도 없고, 부서지기 쉬운 뼈,두발은 뒤틀리고, 등도 굽었으며, 귀도 들리지 않는다. 그나마 조금 똑똑한 토마는 자동차를 타면 묻는다. 어눌한 발음으로 '아빠 어디가'  '집에 간단다.' 1분후에 또 '아빠, 어디가.' 그리고, 또. 또. 또.     100번쯤이라고 해야할까.....
    
두 장애인의 아버지로 그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천사와 마음이 필요했고, 천사의 인내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의 아빠인 '장 루이 푸르니에'는 천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책으로 하지 못한 말을 남긴 것이다. 그것도, 그들이 태어난지 약 40여 년이 지난후에. 그의 첫번째 아들인 마튜는 이미 15살의 나이로 멀리 떠나간 후에.
'두 장애인 아들의 이야기'라는 민감하고 심각한 주제를 가지고, 유머가 넘치는 '장 루이 푸르니에'가  어떻게 표현했을까?
우리집 가족 앨범은 넙치만큼이나 얇다. 토마와 마튜의사진은 별로 없으며, 또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원래 정상적인 아이들의 사진은 정성들여 찍는 법이다. 온갖 포즈를 다 찍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찍어댄다. 첫돌 사진,  (...)그리고 찍어 놓은 아이의 모습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본다. 조금씩 아이가 성장하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장애아는 다르다.... 난, 아이가 조금씩 퇴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얼마 되지도 않는 마튜의 사진을 볼 때면, 우리 마튜가 참 못났었구나 인정하게 된다. 정상아가 아니라는 사실이 한 눈에 보인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 그걸 보지 못했다. (p61~62)
이 책은 너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이 책이 출간된 당시에 관련기사를 보면 '적절한 톤으로 그려낸 유머와 감동의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수많은 독자들이 '마튜'의 죽음에 대한 표현마저도 절망과 웃음을 적절하게 배합했다는 표현과 함께 수많은 격려 편지가 쏟아졌다고 한다.
확실히 '장 루이 푸르니에'의 장애인 자식들에 대한 표현과 글들은 시중에 나온 많은 이런 류의 작품들과는 큰 차별화를 느낄 수 있다.
자식의 장애를 힘겹게 받아들이면서 순응하는 표현이거나, 그 힘겨움을 극복한 표현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비해서, 이 책은 자식의 장애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독자들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아니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차마 표현을 하지 못했던 그런 류의 표현을 서슴치 않고 글로 써 내려가고 있다.
장애아나, 그들의 부모에 대한 편견, 그들을 보는 시선이 '장 루이 푸르니에'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쓰여졌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너무 지나치거나 심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글들이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장애 자녀를 둔 솔직한 심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다만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글로는, 입으로는 뺃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좀 심한 것이 아닌가. 이건 좀 과하다 싶은 표현과 단어들 앞에서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정을 불러일으키고, 눈시울을 적시고,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을 쳐야 할 얘기를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내는, 심지어 죄없는 아이들을 놀려대는 듯한 아버지의 마음에 충격을 받을 수도 있를 것이다. (p207- 옮긴이의 글 중에서)
작가 역시도 이 문제에 있어서 '적절한 톤'이 어디까지 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작품에 대한 평에는 대부분 '푸르니에'의 유머가 장애 자식들에 대한 글에 적절하게 배합되었다고 하지만, 글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재치와 유머의 표현은 어찌 보면 더 큰 슬픔을 승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장애아를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잘 표현되어 있어서 그것까지도 눈물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식에게서 느끼는 마음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 마음을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장애아의 아빠는 항상 우울한 표정이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의 마스크를 써야 한다.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쳐서도 아니된다. 장애아의 아빠는 웃을 자격이 없다. 웃는다는 것은 최고로 눈치없는 행동일테니까 말이다. 장애아를 둘이나 가진 아빠에게는 이 모든 조건이 곱빼기가 된다. 장애아를 둘이나 가지 아빠는 곱빼기로 슬픈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운이 없는 사람은 운이 없는 모습을 해야 하며, 또 불행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살아가는 지혜이다. (p46~47)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아니, 아버지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것일까?' 하는 의아심이 들다가도 차츰 차츰 그의 글들에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바로 장애 아들을 둔 아버지의 솔직한 심정이며, 차마 그 누구도 과감하게 표현하지 못한 말들을 이렇게 뺃어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것이 진정으로 장애 아들들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표현이라는 생각에 눈물겨워지는 것이다.
 

너희들이 어렸을 때, 난 성탄이 되면 왠지 너희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했었단다. 이를테면 만화 『탱탱』 같은 것 말이야. 나중에 그 책에 대해서 너희들과 얘기를 나눌 수도 있었겠지. 아빠는 『탱탱』을 속속들이 다 꿰고 있단다. 앨범이 나오는 족족 다 읽었거든. 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너희들에게 책을 선물하진 않았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너희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거든.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글을 읽을 수 없겠지. 그러니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너희들이 받을 성탄선물은 오직 장난감 나무토막이나 장난감 자동차일 뿐…… (p7)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의 행복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읽을 수 있었다. 99개를 가진 사람들이 100개를 채우기 위해서 안달을 하면서, 그 1개가 없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왜 그런 우(遇)를 범하는 것일까?
내가 이 세상을 볼 수 있음을.... 내가 이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내가  걸을 수 있음을.... 그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되지 않을까......
자녀들이 부모들의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힘들어 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큰 사치가 아닐까.....
'장 루이 푸르니에'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불평과 불만은 아침의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푸르른 5월에.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음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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