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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푸르른 풀밭위에 마네의 작품 '풀밭 위의 식사'가 하얀선으로만 그려져 있다. 이 책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 책을 읽기전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일 것이다. 정장을 한 두 명의 남자와 벌거벗은 한 명의 여자. 마네의 그림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한 모습의 여자였는데....

'전경린'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오래전에 읽었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그리고 단편이 실렸던 '물의 정거장', 모두 좋은 느낌의 책이었다. '풀밭 위의 식사'를 펼쳐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을수록 작가의 표현력이 풍부한 문장들이 펼쳐진다. 그녀의 문장들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감성적이다. 배경묘사와 심리묘사도 이렇게 적확한 어휘들과 구절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때론, 너무도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식어들이 많이 달라 붙는다. 바로 그것이 전경린의 작품을 읽는 맛이라고나 할까?
"'보풀이 인 낡은 스웨터의 실을 당겨 푸는 것만 같은 소리'는 과연 어떤 숨소리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처럼 모든 사물과 사건과 심리묘사가 다채롭다.
사랑, 그건 정말 무엇일까? 이 작품에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이 내재되어 있다.
누경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억눌려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며 감추어진듯, 숨은 듯 살아가고 있다. 그녀에게 '열여섯 살의 들판'은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아카시아꽃이 하얗게 핀 아름다운 계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실제로 일어난 재앙 자체보다 더욱 더 끔찍한 재앙'(p38)은 그 사건에 대처한 부모님의 태도였고, 그것을 밖으로 발산하여 치유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둔 앙금들때문일 것이다. 평화스러운 푸른 들판, 버려진 헝겊 인형, 깨진 유리를 든 사나이- 이것은 누경을 따라 다니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인 것이다. 열여섯 소녀가 성폭행을 당한 후에 그토록 자상하고 딸을 끔찍히 아끼던 아버지는 입다물라고 호통을 쳤고, 엄마는 이불을 쓰고 울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후, 누경은 열여섯 살이전에 때론 함께 생활했던 육촌오빠와의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 그들에게 그 사랑은 진실되고 열정적인 사랑이지만, 두 사람이 유리판을 걸어가듯이 위태롭고, 언젠가는 깨질 것이 분명한 육촌오빠, 20살이 넘는 나이차이, 그리고 아내가 있는 남자.
합리적이고 지성적이고 신뢰감과 자상함까지 겸비한 서강주와의 사랑. 세인들이 말하는 '불륜' 사랑의 시작도 누경이었고, 사랑의 끝맺음도 누경이 고한다. 어쩌면 이 사랑을 끝맺게 된 계기도 '치마'였으니, 모든 주도권은 누경의 몫이었으리라.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강주의 사랑은 수동적이고 무책임한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출세시켜준 아내를 일컬어 '내 짐'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으니.
결국엔,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안락함을 위해서 베를린으로 떠나는 그런 사랑.
누경과 강주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을 표방한 갈망이었고, 욕망이 아니었을까. 이런 누경과의 우연한 첫만남에서부터 관심을 가지고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는 고독한 기현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외롭고 고독했기에 자신과 유사하게 느껴졌을 누경을 향한 마음. 결국엔 선배 인서의 등장으로 끝을 예고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면서 이야기는 끝나지만.
기현의 손금은
후배는 누경과 기현을 '고래와 기린처럼 달라'(p16)라고 했다. 누가 고래인지, 누가 기린인지는 모르겠으나.
기현이 누경에게 읊어주었던 '릴케'의 시이다. 기현의 사랑은 잡히지 않는 사랑, 외줄타기 사랑, 그래도 가깝고도 먼 근처에서 바라만 보아도 흡족한 사랑, 사랑하기를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래도 묵묵히 순응하는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유형이 아니라, 누경이 열여섯 살의 들판에서 날카로운 유리조각의 위협에 당했던 사건이 치유되지 않았기때문에,자신은 세월이 지나면서 색이 바래져 가고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서 현재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깨질것이 뻔한 사랑을 하면서 미래의 불안에 사로잡혀 살았기에 현재의 순간들에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유리병. 유리는 폭력의 장소에서 가장 먼저 깨어지는 것이지만, 유리는 또한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이기도 하다. 먼 기억속의 깨어진 유리조각이 악몽이지만, 의외로 누경은 유리공예를 배우게 된다. 그것도 초록 유리병을 만들고,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인 '장미창'에 매혹된다.
사랑이 머물고 있는 곳에 다른 사랑이 들어갈 수 없지만, 사랑이 깨진 곳엔 새로운 사랑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기법으로 독자들이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하기를 원하는 문장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쓸데없이 수선스럽게 사건들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독다들이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함축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작품이라면 누경의 '열여섯 살의 들판에서의 이야기'나 '강주 아내가 두 사람의 만남'을 알게 된 사실들을 장황하게 늘어 놓을텐데, 아주 잠깐 암시적으로 스쳐가는 정도로 마무리한다.
간단하고 커다란 퍼즐을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맞추어 보라고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세 노르말' - 극복하거나 피하기 어렵다는 점에 역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안고 일상적으로 돌아가라.
과연, 누경이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인서와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것같은 암시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장미창이 사랑의 궁극적 표상'(p235)이듯이 누경이 과거의 힘겨운 짐을 내려놓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털어버리고, 현재의 기쁨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