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장편소설에 비해서 단편 소설이 지니는 매력은 글의 호흡이  짧으면서도 결말부분의 반전이 그 묘미라는 생각이 든다.  오정희의 짧은 글들을 모은 작품인 '가을여자'는 그런 묘미를 맛보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한 편, 한 편 읽어내려가면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인 오정희는 1947년생이니, 꽤 연륜이 있는 작가이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하고 근래에는 2003년에 '새'가 독일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독일 주요 문학상인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하였으니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가을여자'는 저자가 데뷔 41년을 맞는 동안에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이나 휙 스쳐간 단상, 이미지 때로는 한 편의 긴 소설을 위한 스케치가 짧은 소설들로 영상화되기도'(작가의 말 중에서)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쓰여지고 발표되었던 글들을 추리고, 또한, 발표되지 않은 글들까지 포함하여 25편의 작품을 4부분으로 나누어서 싣고 있다. 글의 형식은 콩트 형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가을여자'들은 제목에서도 은유하듯이 인생의 봄,여름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의 20대를 지나서 30대 혹은 40대의 여성들이 주인공들이다. 봄, 여름을 거치는 과정에서 인생의 찬란했던 시절을 되짚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옛추억의 남자를 생각하기도 하고, 시모와의 갈등으로 애궂은 자식에게 화풀이를 퍼붓기도 하는 그런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온, 그러나, 아직은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작가가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많은 인물들을 묘사해서 그런지,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작가의 문학적 바탕이 탄탄하면서도 여성들의 마음과 가정의 세세한 이야기까지를 통달했기에 섬세한 인물 묘사와 심리 묘사가 수준급에 달한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어쩌면, 이렇게도 잘 묘사했을까?'하는 공감과 함께, 작품에 따라서는 마무리부분의 반전이 그야말로 속된 말로 '죽여준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기염을 토할 정도로 반전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25편의 글들은 모두 우리가 흔히 곁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공감이 더 커지는 것이다. 
남편의 갑작스런 질병으로 홀로 된 30대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레이스 뜨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언제부턴가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놀아주는 열 살 정도의 연하남에게 살짝 마음이 간다. 그래서 생계수단이 아닌 연하남을 위한 뜨게질을 하고, 소식이 끊긴 그 남자가 궁금해서 그가 산다는 숲속길을 지나 찾아간 곳은 정신 요양원, 그가 가지고 다니던 은빛 펜치, 그는 그것이 자유의 상징이라고 했는데, 그 펜치가 의미하는 자유는? 그는 과연 누구?
그녀에게 살짝 피어오르던 사랑의 마음은 무엇이 되었을까? (그 가을의 사랑)
34살의 시립 도서관 사서는 무료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기 위해 자선 음악회에 가고, 자신의 모습처럼 썰렁한 음악회를 보고 맥주 한잔을 하려간 곳에서 친절한 남성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호감을 보인다. 그녀의 반지에 관심을 보이며 접근한 그 남자의 실체는?(첫 눈 오던 날)
더 황당한 이야기는 펜팔 친구와의 만남일 것이다.옛날에는 펜팔이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녀와의 첫만남을 위해서 갖가지 준비를 다했다. 아름다운 시구, 경구 등을 읊을 준비까지 모두 완료, 멋지게 소나무 아래 앉자마자 그의 손에 소똥이 뭉클...  그 길로 남자는 내달려 버렸다. 오랜 세월이 흐른후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펜팔 친구였던 그녀는 그때의 일을 묻는다. 그러나. 그 순간을 말 할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수치심을.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인연이 될까?
그보다 더 심한 그 옛날 똥을 만졌을 때의 그 부끄러움과 배반감이 다시 일어났다. 왜 일까? 그런 것이 모두 가을 여자의 이야기이니 왜 재미가 없겠는가?
죽은 아버지의 물건은 어머니는 모조리 엿장수에게 팔아 버렸다. 돌아가시고 얼마 안되어서... 그런데 칫솔만을 버리지 않고 1년 넘게 운동화를 빨 때 사용하시곤 했다. 그런, 어머니와 성묘를 갔다 오는 길에 어머니는 낚시터 근처에서 잉어 3마리를 사신다. 그리곤 방생을 하신다. 낚시꾼의 미끼에 걸리지 말고 멀리 멀리 가라시면서... 어머니는 '우리 가튼 아낙네야 생사의 깊은 이치를 어찌 알겠느냐만 돌아간 네 아버지 생각이 견딜 수 없이 간절해질 때마다 이렇게 죽을 목숨을 살리는 일로 마음을 달래 왔지, 단지 자기 마음의 위안이겠지만 사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게 이런 것 밖에 더 있겠니.....'(p92) (방생)
이것이 우리네 인생이고, 우리 어머니들의 먼저 간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인 것이다. 
엇나갈 수 밖에 없는 부자의 대화 한 편 소개한다. (시든 꽃의 고백) 석구씨는 언제나 바쁜 스케즐로 얼굴 보기도 힘든 자녀들에게 큰 마음먹고 멋진 외식을 한다. 대학생 딸, 고등학생 아들, 중학교 작은 아들... 사사건건 엇나간다. 집에 돌아와서 뒤풀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마침 텔레비젼을 보려 들어온 작은 아들에게 "네 근본이 무엇이냐? 네가 누구냐?" " 단백질과 아미노산 합서에 DNA...." 아들은 말하다 말고 멋쩍은 듯 씩 웃으며 화면의 곧 고꾸라질 듯한 춤을 따라 흥얼거린다. 아이쿠, 석구씨는 도리없이 이마를 치며 신음했다. 밀양 박: 첨정공파의 15대손으로 태어나.... 그가 아이들에게 들려 주려던 가문의 뿌리며 역사가 실로 용비어천가의 구절만큼이나 황당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P128)


이렇게 몇 작품들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가을여자'는 구질 구질한 주부들의 일상의 이야기, 중년 부부의 동창회 이야기, 옛 사랑의 추억, 착각한 사랑 이야기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이 동원 되고 있다. 어쩌면 서른이 넘어 마흔에 접어 들고 있는 '가을 여자'들은 대학 시절에는 패션 모델 못지 않게 잘 차려 입고, 좋은 곳에서 훌륭한 음식을 먹기도 하면서 한 때를 풍미했던 그런 여자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삶에 찌들어서 궁색하고, 시어머니와 갈등, 자식들과의 다툼으로 자신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때는 성악가를 다녔던 아내가 송년회에 갈 변변한 옷 한 벌 없어서 언니집에 가서 빌려 입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남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그래서, 왠지 쓸쓸하고 외로운 가을을 닮은 여자들이지만, 삶에 있어서의 그 어떤 불행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인생은 바래지 않는 순정한 꿈'이라는 것을 (작가의 말 중에서) 그리고 환멸, 슬픔, 쓸쓸함, 또한 우리의 생을 살게 하고 보다 높이 들어 올리는 힘(작가의 말 중에서)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이 담겨 있는듯해서 더욱 친밀하게 느껴지고, 짧은 글들이 주는 반전의 묘미가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