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코카서스 지대에 진군했던 몽골군의 후예 칼무이크인은 아주 멀고 먼 친척 몽골을 뜨겁게 동경하고, 18세기에 러시아에 거주하던 독일인의 자손은 경제가 악화일로를 걷는 구소련을 버리고 속속 독일로 이주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현실은 오히려 '가까운 이웃은 먼 친척만 못한'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인이 흔히 말하는 "이웃은 이사가지만, 이웃 나라는 이사가지 않는다, 이웃나라는 선택할 수 없다."라는 표현은 썩 그럴듯해 보인다. -34쪽
물론 화려한 꽃다발에서 죽음의 기색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홀로 되었을 때, 꽃다발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눈에는 보이지 않은 죽음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 허공으로서의 죽음, 혹은 영원성으로서의 죽음을 말이다. 그리고 삶의 가능성이 다 발현된 아름다움으로서의 죽음을. 장례식에서 꽃을 바치는 풍습은 죽음이 삶의 정점이며 완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의 비유는 아닐까. 참고로 덧붙이자면, 인류와 꽃의 관계에 대한 가장 오래된 흔적이 확인된 것은 아라크 북부의 샤니달 동굴이다. 6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 지층에서 매장된 네안데르탈인이 발결되었는데, 거기에 수레국화와 톱풀과 접시꽃 등의 꽃이 바쳐져 있었던 것이다. 구석기 시대 사람이 구애의 징표로 꽃을 보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159쪽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주를 친구와 여행한 때는 11월 하순이다. 완만한 기복을 이루는 초원 여기저기에서 양들이 갈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풀을 뜯어먹는 모습에 반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빨갛고 주황색을 띤 꽃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추위에 설마...' 하며 차를 세웠다. 꽃을 따서 향기로운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건 그렇고 가엾은 꽃이다. 수선화 비슷했지만, 좀 더 닮은 꽃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사프란이야, 가을 화초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양들이 낮 잠을 잘 때 편안히 꿈을 꿀 수 있게 꽃의 여신 플로라가 준 카펫이라고들 하지 -223쪽
기억력이 희미해져가는 인간은 얼마나 순수하고 맑아지는 것인가. 어머니를 관찰하면서 곰곰 그런 생각이 든다. 멋을 부리거나 뻗대는 것, 욕망과 원망에서 해방된 어머니는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한없이 상냥하다. "많이 힘드시죠?" 라고 주위 사람들이 동정을 표하지만, 어머니랑 살면서 내가 얻게 된 마음의 평온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렵다.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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