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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 - 비행기와 커피와 사랑에 관한 기억
오영욱 지음 / 예담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행하지 않기 위해 떠나는 여행.
일상이 지치고 힘들 때, 여행을 떠나는 편이다. 사람들로 인한 스트레스, 내 자신이 피로하다 느낄 때, 쉬기 위해 지금의 장소를 벗어나려 애쓴다. 눈에 익숙했던 풍경과 다른 장소에 있다 보면,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던 곳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 좋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 보지 못했던 풍경들의 다른 이면들을 살필 수 있다고 할까. 지금 살고있는 곳을 좀 더 멋지게 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저자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책의 한 글귀에 공감한다.
오래전에 읽었던 장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결국 여행하지 않기 위해 여행을 한다 이야기한다.
<여행>에는 옮겨감으로 인해 치르게 되는 희생에 대한 저항이 따른다. 이를 테면 <이곳을 위하여>라는 관념은 끊임없이 <다른 곳을 위하여>라는 관념보다 우위에 선다. 또한 머무르려는 욕망은 이동하려는 기질을 이겨내며, 영원에 대한 향수는 순간적인 것의 유혹을 물리친다. 시베리아 횡단 여행자나 원양 항해자도 결국은 정착한다. 그는 더 이상 여행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여행>의 패러독스이다. 즉 <존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의도된 <변화>, <존재>를 상정했을 때에만 실재하는 그 <변화>가 이제는 <존재> 그 자체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여행하는 자는 자신의 습관에 집착한다. 그는 이전의 그 호텔 그 방에 다시 머무르려 하고, 그 음식점의 그 테이블에서 식사하려 한다.
이렇게 해서 방랑자는, 자기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착민이 된다. 말하자면 여행하지 않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이야기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다시 선명해졌다. 떠나지 않기 위해 떠나는 여행! 오기사의 책을 읽고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이었다.
# 눈이 즐거운, 사진과 일러스트로 꾸며낸 여행기.
보통 사진과 함께 글이 있기 마련인데, <오기사, 세상을 스케치하다>에는 일러스트와 사진의 평면적 구성이 돋보인다. 이차원의 공간을 표현하는 사진이, 작가의 센스넘치는 사진의 재배열을 통해 3차원으로 살아있는 느낌이다. 마치 동영상으로 장소를 보는듯한 입체적인 사진을 통해, 사진의 또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지역을 오래 지켜본 여행기에는 생활인의 눈에 담긴 깊이있는 시선이 담겨있다면, 짧은 공간 동안 많은 곳을 여행한 여행기에는 많은 장소의 매력적인 풍경들이 담겨있다. 잠깐 잠깐 떠나는 여행에서 담은 사진과 글들은 많은 걸 경험하려 했던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 했다. 마음만 있으면, 너도 언제든지 떠날 수 있어! 라고 알려주는 듯, 적지 않은 장소를 저자는 보고 느끼고, 스케치하고 글을 남겼다. 스페인에서 1년간 유학생활을 하며, 떠났던 여행의 기록들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지고, 무작정 공부를 시작했을 때 느껴지는 낯설음과 적응기의 고투가 글에 자연스럽게, 사진과 일러스트에 그대로 배어있다.
30대가 넘었으니, 적지 않은 나이에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그 용기와 열정이 있다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고 할까.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바빠서 떠나지 못하는 여행에 대한 변명들이 아무 소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떠나려는 마음만 있으면, 시간을 쪼개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걸, 일년간 모아둔 사진과 풍경들이 내게 말없이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전해주었다.
# 용기만 있다면 떠날 수 있다.
유명하고 화려한 곳도 없지 않았지만, 작가가 자신이 느낀 풍경들을 기록한 사진들이 좋았다. 내가 떠나고 싶은 장소를 하나씩 체크해 보기 시작했다. 30이 넘기전에, 돈을 모아서 꼭 떠나보아야 겠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혼자서 떠나는 여행은 외롭고 스산할 줄 알았는데, 작가의 여행기를 보니, 그렇게 나빠보이지 않았다. 혼자이기에 더욱 쉽게 떠날 수 있고, 더 많이 사색하고 자기만의 생각을 할 여유가 생긴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글보다 그림과 비주얼로 가득 찬 여행기는, 기존의 여행기와 매우 달랐다. 사진으로 말하는 풍경을 담은 사진집과 일러스트로 꾸며낸 작품집, 글로 여행지를 표현하는 여행기의 세 가지 요소가 작가의 재능과 경험의 믹서에 섞여 새로운 형식의 작품으로 태어났다. 시각적 재미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은 그림을 통해 이해하는 것도 책을 읽는 새로운 재미이다. 눈이 즐거워서 책 읽는 순간이 빠르게 지나갔던 시간이었다. 가보고 싶은 풍경은 30이 넘기전에 돈을 모아, 꼭 떠나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