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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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진이, 지니' 이후 약 2년만에 나온 신작... 그 누구보다 빨리 읽고싶어서 책이 나오기도 전에 예약구매로 주문을 했고, 받자마자 단숨에 다 읽었다.

 

이제는 정유정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어떤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공포에 가까운 특유의 서늘한 느낌과 긴장감...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정서 또한 잘 살아있는... '7년의 밤'이 워낙 임팩트가 강하고 쎄다보니, 작가의 스타일도 자의반 타의반 서서히 그런 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 이후 다양한 소재로 확장 변주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훨씬 무르익고 노련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7년의 밤'과 같은 원초적 강렬함을 기대해왔던건 사실이다. 드디어 이번 신작으로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아직까지도 '7년의 밤'을 최고로 꼽고,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 다시한번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갈망이 어느 정도는 해소된 것 같다.

 

정유정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라 생각한다. 작품들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판타지가 가미되어 있고, '28'이나 '진이, 지니'같은 경우는 특히나 그러한 판타지적 요소가 굉장히 많이 들어간 작품들이다. '7년의 밤'에서도 수몰된 마을 같은 공간 설정은 마치 아틀란티스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고, 캐릭터나 트라우마 설정 역시 실제로 저토록 기구한 사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한 느낌이다. 하지만 주인공 부부가 감정싸움할 때의 대화장면을 보면 놀랍도록 사실적이어서 실제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보여준다. 이렇듯 작가의 탄탄한 필력을 바탕으로 한 인물들간의 대화나 상황묘사들은 오히려 극사실주의에 가깝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음에도 별 위화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작품 역시 동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공간인 오리들이 사는 늪지대와 그와 관련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설정 등이 나오면서 다소 판타지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부분이 작품 전반에 흐르고있는 잔인하고 무서운 기운을 어느 정도 억제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잔혹동화같은 느낌을 줘서 참혹함의 강도를 약간 낮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싶은...



이 작품은 만약 소설이 아니라 영화로 먼저 나왔다면 틀림없이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함'이라는 문구과 함께 시작되었을 거다. 바로 2년전 한동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고유정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첫머리에는 그런 문구가 없다. 작가 스스로 창작의 비중이 훨씬 크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 책은 몇몇 인물들의 성별을 바꾸고 어린 시절 등의 전사를 추가하여 살을 붙였을 뿐, 고유정 사건을 그대로 재구성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인물관계와 범행수법이 놀랍도록 흡사하다. 게다가 초반 오른손에 붕대를 한 장면은 아예 대놓고 그녀를 암시하고있고, 특히 체포 당시에 화제가 되었던 얼굴 가리는 모습은 회상 장면의 러시아에서 첫만남 때 머리카락 사이로 잘 보이지않는 얼굴 시퀀스로 교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도 작가만의 조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작가후기를 보면 약간 애매한 뉘앙스로 역시나 고유정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을 일단은 시인하고 있다. 오히려 캐릭터와 스토리 등 거의 모든 부분이 작가만의 100% 창작물임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굳이 그 사건을 오버랩시키지 말아줬으면 하는 작가의 바램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도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고유정 사건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내 기억력이 나빠서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창조한 여러 설정들이 독자적인 서사를 형성하고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바이칼 호수 등 이국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잦은 플래시백과 교차편집 등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을 정도로 스피디한 진행을 하고있기 때문에 오롯이 작품 속으로 몰입하여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물들의 대화장면 역시 정유정 특유의 사실감은 여전하고, 적재적소의 적확한 단어 선택과 함께 중요한 부분은 직접적 대사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간접적으로 몰아서 처리하는 노련함이 이젠 정말 읽으면서도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오히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자꾸만 생각났다.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백야행을 가장 좋아하고 또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데, 이 책의 주인공 신유나의 이미지가 백야행의 유키호를 떠올리게 한다. 신유나는 자신의 생각을 손수 행동으로 옮기고 유키호는 그것을 대신 해줄 사람이 있다는 차이만 있을뿐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컨트롤한다는 측면과 눈처럼 차갑고 비정한 이미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등 비록 악인이지만 가슴 한켠에서는 이상한 연민이 살짝 느껴지게 만드는 독특한 캐릭터성이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조만간 백야행도 오랜만에 다시한번 읽고싶어진다.

 

대부분의 범죄관련 장르소설에서는 트라우마라는 장치가 들어간다. 범죄의 이유와 범인의 심리상태를 구체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또한 이 부분에서 작가의 역량이 가장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양날의 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설프게 대충 상상으로 가져다 썼다간 큰일난다. 작가는 병리학이나 법의학적인 검증 등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확실한 믿음을 주든지, 아니면 이런 부분이 다소 미흡하다면 압도적인 필력으로 일말의 의혹도 여지를 주지않을만큼 뻔뻔하게 밀어붙여야만 한다. 정유정 작가는 아무래도 후자쪽이 아닐까...

 

이 작품의 경우에도 오리의 울음소리와 관련한 환각과 꿈, 다락방에서의 감금 등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설정이 등장한다. 이런 것들이 현재의 인격형성과 과연 어느 정도의 관련성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특히 작가가 고심해서 선택했음이 분명한 '오리'라는 소재는 뭔가 신비롭고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기도 하다. 마치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겪었던 양들의 울음소리에 관한 트라우마 설정과 비슷하다. 후반부에 한니발 렉터가 이제는 양들이 울음을 그쳤느냐고 치유를 해주면서 마무리되었던... 인과관계나 맥락이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작가가 구축한 치밀한 서사와 압도적인 필력에 밀려서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던... 정유정의 오리 역시 왜 하필 오리인가 하는 의문점은 생기지만 굳이 어떠한 상징이 숨어있는지 해석하려들거나 따지지 않아도 별 위화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이러한 트라우마 설정과 연관해서 '완전한 행복'이라는 제목을 지을 정도로 과연 주인공이 행복은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는 뺄셈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가 제대로 설명이 되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작가가 '행복'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실화바탕의 소설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스포일러를 깔고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이미 그 사건에 대해 잘 알고있다고 해도 즐기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무시무시한 스릴과 공포감을 선사한다. 점점 더 원숙미가 더해지는 작가의 필력은 경이롭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물론 실화 바탕이 아닌 순수 창착물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마 작가의 다음 작품도 분명 예약구매를 또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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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1-06-16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훌륭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작품을 곱씹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허영이 가득하거나, 발췌로 내용을 채우거나, 통찰이 거의 결핍이다 싶은 요즘 책 리뷰들만 보다가, 핵심을 간결히 찌르는 밀도있는 리뷰에 감사합니다. 어지간해서 어디에 글 안남기는데 꼭 감상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실버북 2021-06-16 09:19   좋아요 0 | URL
아, 너무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리뷰가 된 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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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은 작년에 발표되었고 올해 국내에 바로 번역된 신작인데, 이번에도 제법 긴 제목이다. 국내에 출간된 이전 작품들을 고려해볼때, 출판사 측에서 이 작가만의 차별화된 홍보전략의 일종으로 계속해서 일관성이 느껴지도록 의도적으로 긴 제목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실제로 이 피터 스완슨이라는 작가가 미국 현지에서 어느 정도의 지명도와 판매량을 자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적어도 국내에서는 출판사를 잘 만난 덕분인지 장르소설 분야에서 나름 성공적으로 인지도를 쌓아가는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노진선씨가 번역을 맡고있는데 이것도 어떻게보면 이 작가의 행운이자 복이리라...

이 작품 역시 그가 항상 동일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이제는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등장인물들의 시점 전환 방식 서술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지루함을 보완하고 가독성을 높여주는 한편, 독자의 시야와 정보를 제한시켜서 서스펜스를 만드는 동시에, 작가가 가진 내공의 부족함도 슬쩍 감출 수 있는 아주 영리한 방법이다.

솔직히 필력이 뛰어난 작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문장에서 프로 작가다운 문학적인 감성이 별로 안느껴지고, 문장의 테크닉, 즉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문장력이 별로다. 필력이 좋은 프로 작가의 글에는 아마추어들이 결코 흉내내기 힘든 오랜 기간 글을 쓰면서 체화된 수준높은 문장의 기교가 있기 마련인데, 이 작가의 글은 비교적 단순하고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난다. 그리고 스토리를 펼쳐나가는데 있어 강약과 완급조절이 제대로 잡혀있지않아 중간중간 늘어지는 부분과 과감하게 생략해도 될 군더더기 표현들도 제법 눈에 띈다. 이런 것들은 프로 글쟁이로서의 노련미가 부족하다는 증거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전문성'인데, 예를들어 정신질환이 있는 캐릭터를 설정했으면 그 병에 관한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한 상황묘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미흡해서 디테일에 아쉬움을 보인다. 유년기의 트라우마도 마찬가지다. 상상력으로 대충 그럴싸한 트라우마 설정을 갖다붙인다해서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심리상태가 설득력있게 와닿는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범죄소설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경찰이나 변호사 등, 관련 사법기관들의 시스템이나 절차 등에 대해서도 그다지 지식이 풍부하다는 느낌이 없고, 다른 소설이나 드라마, 또는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들을 막연하게 대충 흉내내서 구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형사나 경찰들의 행동을 보면, 실제 미국의 경찰들이 정말로 저런 대응을 할까 싶을 정도로 대화도 어설프고 생색내는 정도의 용도로 몇번 등장했다가 별다른 역할도 없이 사라진다.


이 작가가 소설가를 꿈꾸면서 정말 많은 책들을 읽었고, 또 영화도 많이 봤겠구나 하는 점은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특정 책이나 영화를 언급하는 부분이 꽤 나오니까... 따라서 이 작가의 글쓰는 방식은 자신이 읽거나 보았던 수많은 고전 추리소설과 영화들을 밑천삼아 모티브를 얻어서 새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하는 스타일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탄생시킨 새로운 스토리가 매우 기발하고 예측불가한 진행으로 시종일관 흥미로움을 자아내면서 분명 읽는 재미를 준다는 것이고, 이것이 몇가지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작품을 다시 찾게되는 중요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뉴트로 스릴러라 해야할까... 마치 히치콕의 고전 스타일에 현대적인 최신 감각이 더해진 느낌이다. 그러한 매력이 극한으로 발휘된 작품이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후에 단점들을 보완하여 계속 발전하기를 기대했지만 후속작들은 오히려 임펙트가 떨어지며 단점들이 더 많이 노출되는 느낌이다. 이번 작품은 특히나 설정상의 구멍이 너무 많다.

미처 검수가 안된 맞춤법의 오류가 두세군데 보이기는 하지만, 노진선씨의 번역은 여전히 깔끔하고 좋다. 앞서 말했듯 문장들에 문학적 기교가 별로 없어서 다른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쉽고 편하게 번역했을것 같긴 하지만...

경험과 지식의 부족을 상상력만으로 메우는 것은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칠수 밖에 없다. 다음에 이 작가의 작품을 또 읽을 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로서 좀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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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밤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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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런 코벤은 그동안 관심을 끊었던 작가였다. 2000년대 중반 그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가장 눈에 띄었던 두 작품 '마지막 기회'와 '단 한번의 시선'을 읽고 너무나 큰 실망을 했기 때문이다.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의 작품을 다시 구매한 것은 번역가가 노진선이란 이유 하나 때문이다. 요 네스뵈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된 번역가인데 정말 실력이 좋다. 영미권 장르소설 번역가들 중 이세욱씨 같은 특별한 경우와 요즘 활동이 뜸한 유소영씨를 제외한다면 현재 가장 믿을 수 있는 번역가라 생각한다.

 

노진선씨의 번역은 군더더기없이 꽉차고 감기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리고 현지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정확하게 캐치하여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꼭 필요한 주석을 달아주는 센스도 훌륭하다.

그동안 할런 코벤의 작품들은 대부분 최필원이란 번역가를 통해 소개되어왔다. 오래전부터 믿고 거르는 번역가... 언제나 최소 30% 이상 작품의 질을 깍아먹는 조악한 날림번역을 보여주는 사람이다보니 분명 할런 코벤이라는 작가의 실력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늘 있었다.

역시나 이 작품을 읽어보니 내가 알던 할런 코벤이 아니었다. 이렇게나 필력이 좋은 작가였다니... 그동안 스릴러의 제왕 어쩌구 하던 광고문구가 허위과장이 아닐까 생각해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작가가 느린 호흡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사건 전개에 많은 디테일을 부여하는 스타일이다보니, 번역가의 능력에 따라 독자가 받아들이는 재미와 만족도의 편차가 엄청 클 수 밖에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렇게 뛰어난 작가를 이제야 알아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다.

이 작품은 설정 상의 구멍이 몇 군데 보여 아쉬운 점도 있지만, 인물들간의 대사처리나 세련되고 튀지않는 유머코드라든지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의 서스펜스를 연출하는 솜씨는 베테랑다운 노련함이 물씬 느껴지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고전적인 하드보일드와 정통 추리소설이 어우러진 듯 해서, 오랜만에 마치 웰메이드 드라마를 보는 듯한 즐거움으로 기분좋은 책읽기를 경험한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좋은 번역 덕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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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 모라
토머스 해리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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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 책이 나온건 알고 있었는데, 구입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뒤늦게 읽게된 이유는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 때문이었다. 양들의 침묵까지는 정말 좋았다. 그야말로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소설계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압도적인 작품들로 읽는 재미를 보장했으니까... 그런데 한니발부터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더니, 한니발 라이징에서 결국 실망감까지 느끼게 만들면서 한물간 작가로 서서히 잊혀지고 말았던거다.

토머스 해리스가 양들의 침묵으로 정점을 찍고, 그 이후 서서히 내리막을 걷게 된 결정적 원인은 아마도 양들의 침묵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너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이 나오고 3년뒤에 만들어진 영화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를 자랑하면서, 그 해 아카데미상까지 휩쓸어버린 사건이 터져버렸으니... 이런 범죄 스릴러물이 작품상까지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문 편인데 어쨌든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작가의 다음 작품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관심과 기대를 받게 되었던건데, 개인적 추측이지만 양들의 침묵이 그렇게까지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차기작으로 한니발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안소니 홉킨스의 열연에 힘입어 한니발이라는 캐릭터가 너무나 큰 인기를 끌게되었고, 그가 등장하는 후속작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작가는 거의 등떠밀리다시피 글을 썼던게 아닐까 싶다.

초판 최대판매부수, 최대 계약금, 최고 판권료 등, 미국출판역사상 모든 기록을 갈아치운 후속작 한니발은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책이 나오기도 전에 영화 판권이 팔렸으니 말 다했다. 한니발 라이징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처음부터 아예 영화를 위해 억지로 썼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니... 이런식으로 영화와 맞물려서 작품이 나오다보니 결국 소설 자체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역효과가 나버렸다.

토머스 해리스는 다양한 소재로 흥미로운 작품들을 창조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작가임에도, 자의든 타의든 한니발이란 캐릭터에 과할 정도로 오랜 기간동안 자신의 재능을 낭비한 것이 아닐까...


이번 신작은 드디어 한니발의 그늘을 벗어난 작품이다. 제목 카리 모라는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정말 좋아했던 작가라 또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때문에 사실 별 기대는 안했는데... 처음 몇 페이지 넘어가면서... 아... 이 작가 특유의 화법과 전개방식이 눈에 쓱 들어오니까, 정말 오랜만에 친했던 옛 친구를 만난 듯한 느낌이...

토머스 해리스는 확실히 한니발을 기점으로 글쓰는 스타일이 좀 변한건 분명하다. 그전까지는 느린 속도로 치밀하게 서사를 쌓아가면서 심리적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한니발 라이징에 이르러서는 거의 액션 위주의 단순한 플롯에 내용전개의 호흡도 빠른 편이었다. 내 취향은 역시 초기 작품 스타일이 좋은데... 아무래도 작가가 초심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것 같다. 이번 작품도 역시나 호흡이 빠르다.

등장 인물들도 많고, 사건들이 빠른 전개로 진행된다. 읽다보면 설명과 묘사를 좀 더해줬으면 하는 부분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넘어가는 부분이 많다. 몇몇 등장인물들은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데 그냥 과감하게 생략해버린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작가 특유의 무시무시한 분위기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마치 카페의 배경음악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다.

이 작가는 특히 캐릭터 구축력이 탁월하다. 각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상태, 그리고 능력치 등, 독자에게 알려주고싶은 부분을 적절히 조율해서 노련하게 슬쩍슬쩍 비춰주는 테크닉은 역시나 명불허전이다. 거장의 명성은 그냥 얻어진게 아님을 보여준다.

이 책에 대한 리뷰들을 둘러보면 전체적으로 독자들의 평이 별로 좋지않다. 한니발 렉터를 넘어서는 괴물이 탄생했다는 광고문구가 말도 안되는 과장이다 라는 의견도 많고... 그만큼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치가 높다는 뜻이리라...

확실히 토머스 해리스의 명성은 예전같진 않다. 이 책의 번역가만 봐도 알 수 있다. 한니발까지만 해도 이러진 않았는데... 양들의 침묵은 고 이윤기씨가 맡을 정도였는데... 번역이 많이 아쉽다. 심하게 말하면 성의가 없을 정도다. 배경묘사 부분이 엉성해서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현장의 모습은 제대로 머리속에 그려지지가 않을 정도이고, 감수를 제대로 안해서 맞춤법이 틀린 문장도 많다.

 


예를 들어 여기 45분은 분명히 45초였을거다. 여주인공이 총기를 아주 능숙하게 다룬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초반의 중요한 장면인데...

 


그리고 프라이드치킨 프랜차이즈 '뽀빠이스'라니... 아이들도 다 아는 '파파이스'가 아닌가? 만화캐릭터 뽀빠이도 스펠링이 같다는건 알지만, 우리나라에 지금도 파파이스 매장이 남아있는데... 이건 상식의 문제다. 이 책은 번역이 작품의 완성도를 적어도 20% 이상 깍아먹고있다.

이런저런 아쉬움과 불만사항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토머스 해리스의 고유한 매력이 살아있어서 반갑고 좋았다. 평균 7~8년만에 한번씩 거의 잊혀질만하면 신작을 발표하는 텀이 아주 긴 작가다보니 기다림에 지친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치밀하면서도 자비없이 살벌한 작가 특유의 필력은 계속 그리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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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놓아줄게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서정아 옮김 / 나무의철학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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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비자의 입장으로 가장 많이 염두에 두는 것이 있다면 바로 '유명하면 다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이 아닐까...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라면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을 읽고난 직후에는 그 이유를 찾는 것도 그리 쉽지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클레어 맥킨토시'라는 역시나 생소한 작가다. 아마존 베스트셀러 운운하는 영국출신 여류작가... 읽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또한번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우려와 달리 이 책은 나쁘지않다. 몰입도가 좋아서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정도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임팩트가 강하거나 스케일이 큰 시퀀스는 거의 없으며, 소수의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자잘한 일상사와 심리묘사에 치중하는 패턴... 약간의 반전과 함께... 딱 저예산으로 영화 한편 만들어내기 좋은...

 

마지막장을 덮었을때 음미하게되는 여운이나 만족도 역시 나쁘지않다. 사실 스릴러라는 장르에 넣기에는 살짝 애매한 정도의 드라마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라는 점도 이 영국발 아마존 베스트셀러들의 공통된 특징인데, 그쪽에선 아마도 이런 류가 최근 트렌드인 모양이다. 그렇게 자위하며 고개를 끄덕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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