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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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진이, 지니' 이후 약 2년만에 나온 신작... 그 누구보다 빨리 읽고싶어서 책이 나오기도 전에 예약구매로 주문을 했고, 받자마자 단숨에 다 읽었다.

 

이제는 정유정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어떤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공포에 가까운 특유의 서늘한 느낌과 긴장감...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정서 또한 잘 살아있는... '7년의 밤'이 워낙 임팩트가 강하고 쎄다보니, 작가의 스타일도 자의반 타의반 서서히 그런 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 이후 다양한 소재로 확장 변주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훨씬 무르익고 노련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7년의 밤'과 같은 원초적 강렬함을 기대해왔던건 사실이다. 드디어 이번 신작으로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아직까지도 '7년의 밤'을 최고로 꼽고,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 다시한번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갈망이 어느 정도는 해소된 것 같다.

 

정유정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라 생각한다. 작품들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판타지가 가미되어 있고, '28'이나 '진이, 지니'같은 경우는 특히나 그러한 판타지적 요소가 굉장히 많이 들어간 작품들이다. '7년의 밤'에서도 수몰된 마을 같은 공간 설정은 마치 아틀란티스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고, 캐릭터나 트라우마 설정 역시 실제로 저토록 기구한 사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한 느낌이다. 하지만 주인공 부부가 감정싸움할 때의 대화장면을 보면 놀랍도록 사실적이어서 실제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보여준다. 이렇듯 작가의 탄탄한 필력을 바탕으로 한 인물들간의 대화나 상황묘사들은 오히려 극사실주의에 가깝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음에도 별 위화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작품 역시 동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공간인 오리들이 사는 늪지대와 그와 관련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설정 등이 나오면서 다소 판타지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부분이 작품 전반에 흐르고있는 잔인하고 무서운 기운을 어느 정도 억제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잔혹동화같은 느낌을 줘서 참혹함의 강도를 약간 낮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싶은...



이 작품은 만약 소설이 아니라 영화로 먼저 나왔다면 틀림없이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함'이라는 문구과 함께 시작되었을 거다. 바로 2년전 한동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고유정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첫머리에는 그런 문구가 없다. 작가 스스로 창작의 비중이 훨씬 크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 책은 몇몇 인물들의 성별을 바꾸고 어린 시절 등의 전사를 추가하여 살을 붙였을 뿐, 고유정 사건을 그대로 재구성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인물관계와 범행수법이 놀랍도록 흡사하다. 게다가 초반 오른손에 붕대를 한 장면은 아예 대놓고 그녀를 암시하고있고, 특히 체포 당시에 화제가 되었던 얼굴 가리는 모습은 회상 장면의 러시아에서 첫만남 때 머리카락 사이로 잘 보이지않는 얼굴 시퀀스로 교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도 작가만의 조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작가후기를 보면 약간 애매한 뉘앙스로 역시나 고유정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을 일단은 시인하고 있다. 오히려 캐릭터와 스토리 등 거의 모든 부분이 작가만의 100% 창작물임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굳이 그 사건을 오버랩시키지 말아줬으면 하는 작가의 바램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도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고유정 사건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내 기억력이 나빠서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창조한 여러 설정들이 독자적인 서사를 형성하고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바이칼 호수 등 이국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잦은 플래시백과 교차편집 등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을 정도로 스피디한 진행을 하고있기 때문에 오롯이 작품 속으로 몰입하여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물들의 대화장면 역시 정유정 특유의 사실감은 여전하고, 적재적소의 적확한 단어 선택과 함께 중요한 부분은 직접적 대사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간접적으로 몰아서 처리하는 노련함이 이젠 정말 읽으면서도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오히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자꾸만 생각났다.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백야행을 가장 좋아하고 또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데, 이 책의 주인공 신유나의 이미지가 백야행의 유키호를 떠올리게 한다. 신유나는 자신의 생각을 손수 행동으로 옮기고 유키호는 그것을 대신 해줄 사람이 있다는 차이만 있을뿐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컨트롤한다는 측면과 눈처럼 차갑고 비정한 이미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등 비록 악인이지만 가슴 한켠에서는 이상한 연민이 살짝 느껴지게 만드는 독특한 캐릭터성이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조만간 백야행도 오랜만에 다시한번 읽고싶어진다.

 

대부분의 범죄관련 장르소설에서는 트라우마라는 장치가 들어간다. 범죄의 이유와 범인의 심리상태를 구체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또한 이 부분에서 작가의 역량이 가장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양날의 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설프게 대충 상상으로 가져다 썼다간 큰일난다. 작가는 병리학이나 법의학적인 검증 등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확실한 믿음을 주든지, 아니면 이런 부분이 다소 미흡하다면 압도적인 필력으로 일말의 의혹도 여지를 주지않을만큼 뻔뻔하게 밀어붙여야만 한다. 정유정 작가는 아무래도 후자쪽이 아닐까...

 

이 작품의 경우에도 오리의 울음소리와 관련한 환각과 꿈, 다락방에서의 감금 등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설정이 등장한다. 이런 것들이 현재의 인격형성과 과연 어느 정도의 관련성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특히 작가가 고심해서 선택했음이 분명한 '오리'라는 소재는 뭔가 신비롭고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기도 하다. 마치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겪었던 양들의 울음소리에 관한 트라우마 설정과 비슷하다. 후반부에 한니발 렉터가 이제는 양들이 울음을 그쳤느냐고 치유를 해주면서 마무리되었던... 인과관계나 맥락이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작가가 구축한 치밀한 서사와 압도적인 필력에 밀려서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던... 정유정의 오리 역시 왜 하필 오리인가 하는 의문점은 생기지만 굳이 어떠한 상징이 숨어있는지 해석하려들거나 따지지 않아도 별 위화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이러한 트라우마 설정과 연관해서 '완전한 행복'이라는 제목을 지을 정도로 과연 주인공이 행복은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는 뺄셈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가 제대로 설명이 되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작가가 '행복'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실화바탕의 소설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스포일러를 깔고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이미 그 사건에 대해 잘 알고있다고 해도 즐기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무시무시한 스릴과 공포감을 선사한다. 점점 더 원숙미가 더해지는 작가의 필력은 경이롭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물론 실화 바탕이 아닌 순수 창착물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마 작가의 다음 작품도 분명 예약구매를 또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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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1-06-16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훌륭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작품을 곱씹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허영이 가득하거나, 발췌로 내용을 채우거나, 통찰이 거의 결핍이다 싶은 요즘 책 리뷰들만 보다가, 핵심을 간결히 찌르는 밀도있는 리뷰에 감사합니다. 어지간해서 어디에 글 안남기는데 꼭 감상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실버북 2021-06-16 09:19   좋아요 0 | URL
아, 너무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리뷰가 된 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