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10만 부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양장)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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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는 호러 SF 판타지 장르에 속하는 단편소설집이며, 2017년에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2022년 부커상 후보에 오르면서 베스트셀러로 역주행 후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책이다. 


영국의 부커상은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 수상 이후, 정보라, 천명관, 황석영 등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서 마치 칸 영화제와 한국영화의 관계처럼 어느덧 친숙해져버린 느낌이라 전세계를 호령하는 듯한 K컬처의 위력이 새삼 실감되기도 한다.



작가 정보라는 1976년생으로 생각보다 오랜 경력과 다채로운 이력들이 눈길을 끈다. 미국에서 러시아 및 동유럽을 포함하는 슬라브 문학을 전공하고 한국에선 교수로도 활동했으며, 20대 중반부터 주로 폴란드와 러시아의 문학 작품들을 소개하는 번역가로서 입지를 다져오다가 30대 중반부터는 소설가도 병행하기 시작해 활동영역을 넓혀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곧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로소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본작 '저주토끼'는 작가나이 약 40에 발표한 2017년작으로 표제작인 '저주토끼'를 비롯하여 총 10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작가의 말'을 보면 환상호러 장르이고 특별한 교훈이나 메시지는 없으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책이니 그냥 즐겁게 읽어주었으면 한다는 바램이 담겨 있지만, 오싹하거나 섬뜩한 느낌을 주는 호러 장르 특성상 원한에 얽힌 사연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라 아무래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복수' 또는 '인과응보' 같은 키워드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어떤 일관된 흐름이 느껴지기도 했다.



정보라 작가는 연륜에 걸맞게 매우 묵직하고 안정감있는 필력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오랜 기간 번역 작업을 통해 숙련된 언어 감각이 체득되었을 것이라 추측을 해보는데, 어쨌든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이야기들임에도 몰입도와 가독성이 엄청나게 높아서 각 작품들의 분량이 짧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페이지가 정말 쉴 새 없이 빠르게 넘어간다. 특별히 뛰어나거나 실망스럽다는 느낌 없이 모든 작품들에서 골고루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은 물론 나름의 재미를 찾을 수 있다는 측면도 역시나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중간에 약 80페이지 분량을 차지하는 '흉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3~40페이지 정도의 짧은 단편이고, 전래동화, 우화, 전설, SF, 현대극 등 다양한 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데, 가끔씩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작가의 자유롭고 비범한 상상력이 잘 어우러져서 작가의 말 그대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라는 책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너무 오래전이라 세부적인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엉뚱하면서도 황당한 스토리에 뭔가 모를 잔혹함이 슬쩍 묻어있는 특이한 분위기 만큼은 아직까지 인상깊게 남아있어서, 이 책의 몇몇 작품들이 보여주는 잔혹동화 같은 느낌과 약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특히 황금 피를 흘리는 여우 이야기를 담은 '덫'의 경우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 강한 기시감에 혹시 허풍선이 남작에 나왔던 에피소드들 중에 하나였던가 싶어 희미한 기억들을 소환해내느라 한참을 애써보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오히려 이 작품은 역시 어릴적 읽었던 기억이 있는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에서 어떤 영감을 얻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는데, 어쨌거나 이렇게 특정 작품들은 특유의 분위기와 소재 덕분에 전설이나 동화를 읽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유일한 SF 장르였던 '안녕, 내 사랑' 같은 경우는 자연스럽게 레이먼드 챈들러의 동명 소설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본문 중에 인용된 노래 가사도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에 삽입된 곡이라는 구절 때문에 어떤 영화에서 나왔던 노래인지 궁금해서 로버트 미첨 주연의 동명 영화는 물론 혹시나 해서 '카사블랑카' 같은 영화까지 다시 살펴보는 등, 부산을 떨어봤지만 역시나 별 소득은 없었다.



이 책의 영문판 버전 노래 가사를 구글링으로 찾아보던 중 작가 본인이 그냥 창작한 노래 같다는 어느 외국 독자의 리뷰를 확인한 후에야 결국 체념하고 포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좀 쓸만한 정보를 얻고 싶었던 내 입장에서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재회' 편은 아무래도 영화 '식스센스'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아무튼 정보라 작가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상상력의 원천에 그동안 공부하고 번역해왔던 슬라브 문학이 어느 정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여타 국내 소설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가 차별적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본문 속에서 러시아어, 루마니아어, 폴란드어 같은 슬라브 언어들이 활용되는 장면만 보더라도 확실히 작가만의 고유한 아이덴티티와 특별함이 느껴진다. 



내가 구매한 책은 최근에 10만 부 기념 한정판으로 양장본에 새로운 표지로 발매한 버전인데, 기존 책에 비해 가격이 더 비쌈에도 표지 디자인이 너무 이뻐서 굳이 이걸로 구매해봤다. 



장르소설이 10만 부면 대단하긴 하다. 판매량이 꼭 그만한 재미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책은 명성 만큼의 가치를 충분히 한다고 생각한다. 무더운 여름에 서늘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 속으로 한번 빠져보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p-IG0dhX57Q&t=4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944427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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