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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은 2021년에 출간되어 그 해 국내 모든 온라인 서점에서 '올해의 책' 또는 '올해의 소설'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평론가나 일반독자 대부분에게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고 지금도 꾸준히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은영은 1984년생으로 이제 불혹의 나이로 접어드는데 서른 즈음인 2013년에 등단한 이후 약 10년간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하면서 상당히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전도유망한 기대주라 할 수 있겠다. 데뷔작인 '쇼코의 미소' 때부터 이미 그녀의 골수팬이 된 독자들을 비롯하여 두터운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작 '밝은 밤'은 그동안 중단편소설들만 써오던 그녀가 처음으로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전작들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녀가 어떤 스타일로 글을 쓰는지 전혀 모르는 백지상태라 소개팅 같은 첫만남에서 미지의 낯선 상대를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는 듯한 묘한 설렘도 느꼈던 것 같다.
일단 내가 책을 읽으면서 처음 받았던 인상은 글이 참 담백하고 순수하다는 점이었다. 문장에는 기교가 거의 없는 편이고 모호한 표현을 쓰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작가다운 깊은 사유가 묻어나오는 감각적인 문장들이 곧곧에 포진해있어 필력이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다만 작가가 나름 힘을 준 문장들이 그리 노련하다거나 세련된 느낌까지는 아니어서 평단의 찬사를 받는 인기작가라는 점을 고려한 기대감에는 살짝 못미친다는 느낌도 함께 받았던 것 같다.
초반 몇페이지를 읽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이런 글은 확실히 읽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며 한참동안 문장을 곱씹어보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한다. 마음이란 것이 꺼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따뜻한 물로 씻고 햇볕에 잘 말려서 좋은 향기가 나는 상태로 가슴에 다시 넣고싶다는 이런 표현은 물론 소설 속 주인공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용도로 쓰여진 문장이긴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보다는 평소 한번씩 해왔던 작가 자신의 개인적 상념들이 자연스럽게 투영된 것이라고 보는 쪽이다. 왜냐하면 이런 한없이 착하고 따뜻한 생각은 이혼과 함께 삶에 찌들려 다소 냉소적인 경향을 보이는 지연의 캐릭터와 약간 상충되면서 그리 잘 붙지가 않는 표현이라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이 최은영이라는 작가 본인의 성격과 성향이 실제로 굉장히 착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되었다.
책을 계속 읽다보니 이러한 나의 추측은 점점 확신으로 바뀔 수 밖에 없었는데,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너무 착하고 따뜻하다. 그래서 오히려 독이 되는 부분이 있다. 솔직히 나는 중간중간 늘어지는 느낌에 살짝 지루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스토리가 큰 변곡점 없이 너무나 평탄하게만 흘러간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비록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굴곡진 삶이 액자 형식으로 끼어들어 집중도를 올려주는 역할을 어느 정도 해주긴 하지만 그것 역시 이미 지난 얘기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담담하게 풀어내니까 아주 드라마틱하게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초반부 지연이 할머니와 조우하는 시점부터 대다수의 순수문학이 그러하듯 나는 혹시나 이 작품도 결국 서로의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는 내용이 아닐까 했는데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너무나 여자 여자한 느낌이 강하다. 30대 여자 주인공과 그녀의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4대를 아우르는 여성들의 인생을 다루면서 한국 특유의 가부장 문화를 꼬집는 부분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분량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새비 아저씨를 제외하면 모조리 함량미달의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하나같이 우리나라 여성들이 질색하는 남자들 뿐이다.
밖에서 다른 사람과 정치얘기나 축구얘기에 열올릴 줄이나 알지 정작 아내와 자식은 나몰라라 하는 한량 그 자체인 남자라는 존재의 비루한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남자가 잘못했음에도 여자도 잘한 건 없다며 오히려 남자를 옹호하는 그 당시의 보편적 정서도 빠짐없이 끼워넣는다. 이 책은 작가를 모르는 상태로 글만 읽어도 여자가 쓴 글임을 대번에 알 수 있을 만큼 여성성이 강한 것이다. 물론 '82년생 김지영' 같은 노골적인 페미니즘 소설들과 비교하기에는 그 수위가 한참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공감대에 어필하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뭏든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나름 보여주고 싶은 것은 많았던 것 같은데 그것들이 너무 나열식으로만 펼쳐져 있어서 장편소설이라는 긴 호흡의 형식에 걸맞는 기승전결의 견고한 짜임새를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중단편만 써왔던 작가라 그럴 지도 모르겠다. 장편의 큰 틀 안에서 각각의 에피소드와 분량을 적절히 안배해서 컨트롤하는 기술이 아직은 좀 부족한 듯 하다. 이혼이라는 상처를 안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주인공과 전쟁통의 역경을 억척스럽게 헤쳐나왔던 할머니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우정, 거기에 천문관측이라는 주인공의 직업과 연관해서 거대한 우주에서 본다면 찰나에 불과한 별 의미없는 인간의 삶을 환기시키는 구절도 주기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엮여서 하나의 큰 줄기를 타고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이야가가 별다른 인과관계 없이 흩어져 있다보니 다 읽고나서도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바로 와닿지가 않는다.
특히 이 작품은 캐릭터 구축력이 많이 아쉬운데 주인공이자 화자인 지연은 가장 중요한 캐릭터임에도 정보가 너무 빈약해서 감정이입이 힘들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다고만 간단히 언급하고 있어 그녀가 지금 어느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있는 것인지 또한 현재의 심리상태가 어떤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최소한 전남편과의 이혼과정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이나 전사는 넣었어야 했다. 나는 솔직히 지연이 어떤 사람인지 책을 다 읽고나서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 죽은 언니인 정연에 대해서도 엄마와의 가장 큰 갈등원인임에도 설명이 전혀 없다. 정연의 죽음에 어떤 스토리가 있었는지 모르니 엄마와의 갈등에 공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후반부 결혼식 전날 모녀의 언쟁은 거의 클라이막스(물론 이 장면이 후반부에 배치되어 클라이막스라고 한 것이지 이 작품은 기승전결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내용적으로는 전혀 클라이막스라 할 만한 장면은 아니다)에 해당되는 중요한 장면인데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둘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건 치명적일 정도다.
연을 끊고 살다시피한 엄마와 할머니 사이의 갈등 또한 설명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다. 일부러 여백을 많이 둬서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버리는 단편이나 중편은 캐릭터의 전사를 생략해도 상관없지만 감정이입을 통해 긴 호흡으로 끌고가는 장편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영화든 소설이든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에 드라마틱한 전개보다는 한없이 평범하고 별거없는 자잘한 일상사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보게 만드는 이런 류의 이야기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당연히 이 책도 그런 쪽으로 어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잔잔하고 따뜻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나 여성분들이라면 더욱더 감동적인 여운을 음미하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리뷰를 하다보니 이상하게 단점만 말한 것 같은데 원래부터 나는 남들이 모두 좋다고 하니까 그냥 따라서 좋다고 하는 그런 성격이 못된다. 결론은 너무나 따뜻하고 착하고 좋은 작품이지만 약간은 심심하고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젊은이들이 읽는다면 부모와 친구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새삼 안부전화라도 걸고 싶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같은 경우는 당연하겠지만 읽는 내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돌아가시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분명 더 자주 찾아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을 것 같은데... 뒤늦게 마음이 쓰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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