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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의 6일 ㅣ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콘돌의 6일 (Six Days of the Condor)'은 1974년에 발표된 스파이 스릴러물이며 바로 다음해인 1975년에 개봉된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 '코드네임 콘돌'의 원작소설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출간과 동시에 당시 헐리우드 특급스타들이 대거 투입된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막대한 판권료와 함께 작가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정도로 거대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49년생으로 현재 70대 중반인 작가 제임스 그레이디가 대학시절에 구상을 해서 불과 20대 초중반에 발표한 데뷔작이란 점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첫 작품이 너무 큰 성공을 거둔 탓인지 이후에 이어진 꾸준한 집필활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데뷔작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원 히트 원더'로 머물고 만 듯한 점은 조금 아쉽기도 하다.
이 책은 미국 현지에서의 높은 평가와 화제성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약 40년이 지난 2016년에 뒤늦게 번역 소개되었으나, 이마저도 절판된 상태라 지금은 중고책으로밖에 구할 수 없는 실정이다.

작가 후기를 제외한 작품 본편은 약 200페이지 분량으로 거의 중편소설에 가깝지만, 제목처럼 주인공 콘돌이 급박한 상황에서 펼치는 약 1주일간의 활약상이 압축되어 담겨있기 때문에 실제로 읽어보면 내용이 빈약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즐길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작품 전반에 걸쳐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CIA라는 거대한 정보기관의 비밀스런 활동이나 미국 고위 권력층 인사들의 관용적인 화법으로 구성된 흥미로운 대사들이 주는 쾌감이 대단한데, 작가가 젊은 나이에 오로지 자료조사만으로 구현해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때로는 싼마이스러운 표현들이 섞여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게감 있고 능숙한 필력을 바탕으로 한 품위있고 고급스런 문장들을 읽는 재미가 좋았고 기본적으로 작가의 유머감각이 뛰어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사소한 장면만 보더라도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해 고개를 끄덕였다는 일차원적 서술 대신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식으로 쿠션을 한번 넣는 모습에서 작가의 위트를 엿볼 수가 있다.

무려 50년 전에 쓰여진 70년대 소설인 만큼 문장의 구성이나 플롯의 전개방식이 요즘 정서와 비교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다소 올드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곳곳에 포진해있는 과감하고 흥미로운 액션 시퀀스들과 남녀 주인공들의 뜬금없는 정사씬 등, 다채로운 눈요깃거리에 스토리의 진행 속도도 빨라서 세월의 격차는 금새 잊혀지게 만든다.
나는 초반부에 곧바로 등장하는 학살씬을 보면서 언뜻 오래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이언 플레밍의 007시리즈 중에서 '닥터 노'라는 작품의 초반부 암살씬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별 생각없이 작성했던 문서가 거대한 권력층의 비리를 노출시키는 위협이 되면서 그 누군가가 어느 순간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살인청부업자들에게 쫓기게 된다는 매력적인 설정은 존 그리샴의 대표작 '펠리컨 브리프'에서도 멋지게 그려진 바 있지만, 이 작품이 훨씬 전에 나온 만큼 그러한 설정의 원조를 영접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중반부 여자의 집이 노출되어 집 안에서 격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여자를 감시하던 키 큰 남자는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후반부 콘돌이 정당방위가 아닌 상태에서 저지른 살인이 약물에 약간 취했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따위의 뒷맛이 개운치 않은 몇몇 의문점들은 거슬리기도 했지만, 작품 전체의 재미와 만족도가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사소한 옥에 티 정도로 넘어가고 싶다.

영화는 'Three Days of the Condor'로 제목을 6일에서 3일로 살짝 바꾸면서 주인공의 활약상을 좀더 스피디하게 압축한 구성을 꾀하고 있다.
책 말미에 영화와 관련한 회고를 담은 작가 후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정식으로 출판하기 전 원고 검토 과정에서 이미 헐리우드의 초거물급 제작자인 디노 드 로렌티스의 눈에 띄어 전격적인 판권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거물 제작자의 안목은 물론 당시 미국 출판계와 영화계 간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단 최전성기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페이 더너웨이를 캐스팅했다는 것 자체가 제작자의 파워와 함께 이 영화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지표다.


거장 시드니 폴락 감독은 액션 스릴러 장르와는 매칭이 잘 안되는 면이 있지만 로버트 레드포드와 각별한 사이임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 가능하고,

'프렌치 커넥션'을 찍었던 오웬 로이즈먼 촬영감독을 기용해 액션 쪽을 보완한 측면도 보인다. 음악을 맡은 데이브 그루신 역시 그의 성향과 어울리는 장르는 아니지만, 이 영화에 아낌없는 투자가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그 외에도 내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고 '정복자 펠레'에서 보여준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스웨덴 출신의 명배우 막스 폰 시도우 또한 영화에 품격과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이렇게 헐리우드 초A급 배우들과 제작진들을 투입한 이 영화의 제작비는 2천만달러라고 나오는데, 70년대 기준으로는 막대한 예산이라 할 수 있는 규모이고 그만큼 흥행에 자신감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월드와이드 2천7백만달러라는 수익은 사실상 흥행실패로 봐야 하는 성적표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주인공 콘돌이 초반부터 CIA에 쫓기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턱없이 부족해서 긴박한 상황임에도 영문을 몰라 감정이입하기 힘들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으로 다가온다. 한마디로 원작소설을 읽지않은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서 재미가 없고, 소설을 읽은 사람은 오히려 흥미로운 디테일들이 다 빠져서 재미가 없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영화는 당대 최고의 꽃미남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의 스타 파워를 최대한 살려서 여주인공과의 위기 속 로맨스에 방점을 찍으려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CIA라는 거대 권력기관의 정보력과 기술력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더 컸던 원작소설과는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쨌든 기대와 달리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헐리우드의 큰 별이었던 로버트 레드포드가 지난달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코드네임 콘돌'은 그래도 그의 가장 빛나던 시절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 중 하나라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고 또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영원한 '선댄스 키드' 로버트 레드포드를 추모하며...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GAtF92vQfw&t=17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4032833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