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급류'는 22년 말에 출간되어 약 2년이 지난 올해 초부터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10위권 내에 꾸준히 오르며 주목을 받고있는 작품이다. 최근 한국소설 분야는 여성작가들이 시장을 거의 주도하는 느낌이라 모처럼 눈에 띄는 젊은 남성작가의 활약이 반갑기도 하다.


요즘 문학계의 새로운 트렌드인지 이 작품도 역주행이라는 표현을 내세워 홍보하고 있는데 나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인 점도 고려하여 오롯이 작품 자체만으로 판단하기 위해 일부러 작가와 내용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를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어보기로 했다.


일단 초반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먼저 받았던 인상은 아쉽게도 작가의 필력이 내심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는 그리 높지 않구나...였다. 상황과 배경, 인물 등을 묘사하는 모든 문장들은 거의 두줄을 넘지 않을 정도로 길이가 짧으며 비교적 직선적이고 단순한 표현법으로 구성되어 단조로운 느낌을 받았는데, 물론 이것은 스피디한 가독성이라는 무시 못할 장점도 있겠지만 반면에 웹소설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약 300페이지에 근접하지만 작은 판형에 활자의 크기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200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정도의 중편에 가까운 컴팩트한 분량에다가 간결하고 쉬운 문장에 시원시원하고 빠른 전개로 요즘 시대의 입맛에는 잘 맞는 것 같은데 작가가 어떻게든 장편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 애를 쓴 것인지 군더더기 문장들도 제법 보인다. 



'해솔이 도담의 팔을 잡고 떼어 내며 밀어냈다. 거부의 몸짓이었다...' 라는 구절에서 이 '거부의 몸짓이었다' 같은 문장은 사실 없어도 아무 지장 없고 오히려 빼는게 더 깔끔하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도 또다시 '네가 나한테 이런다는 거지...' 라는 대사를 해놓고 '연인들이 다툴 때 흔히 하는 말이었다' 라고 친철한 해설 같은 문장을 덧붙여 놓았는데 작가가 너무 불친절해도 문제지만 너무 친절한 것도 문제가 있다. 무슨 다큐멘터리 나레이션도 아니고 없어도 다 알아듣는 장면에서 굳이 군더더기 같은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와의 화투씬에서 '아이구, 시원하다. 도담이 손이 약손이다' 같은 대사들을 비롯하여 뭔가 모르게 영화적 클리셰의 느낌이 나는 시퀀스들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꼭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이쯤에서는 이런 장면이 한번쯤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전형적이지만 무난한 대사로 이루어진 상황을 적당히 만들어 넣은 듯한 느낌인 거다.



초반부에 나온 중성부력에 관한 아빠의 대사나 첫 키스의 추억을 상징하는 귀신 새가 중후반부에 다시 나오는 방식도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떡밥회수 스타일의 클리셰 중 하나다. 



혹시 작가가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전체적인 시퀀스의 구성과 연결, 그리고 대사들이 영화적 또는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문맥의 흐름상 '엄마'라는 명칭이 훨씬 자연스러움에도 굳이 '미영'과 '정미'라는 이름을 쓰는 모습에서 나는 이 작가가 각본을 쓰던 버릇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해봤다.  



작품의 내용도 역시나 그동안 영화나 소설에서 숱하게 다루어 왔던 치유를 통한 내면의 성장...이라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식상한 코드를 내세우고 있다. 이런 경우 독자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눈에 띄는 확실한 차별점이 필요한데 이 작품은 그 차별점을 치유 과정으로 넘어가기 위한 트리거 역할의 어떤 '사건'으로 선택했고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에나 나올 법한 초강력 설정을 집어넣었다.


어떻게 보면 무리수에 가까운 초반의 이런 충격적 설정은 시선끌기용으로는 상당히 괜찮은 작전이고 또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한편으론 아무리 봐도 너무 작위적이고 편의적으로 가져다 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라든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오히려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함과 동시에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오로지 해솔과 도담이라는 두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만 집중할 뿐 주변인물들의 존재는 그저 주인공 서사 구축을 위한 들러리 정도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두 주인공의 심리에만 감정이입한 독자라면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라며 극찬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상황이든 일단 중립기어 넣고 지켜보는 습관이 있는 나에게는 감정이입이 그리 쉽지 않았다.



나같은 경우 작중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50대 유부남의 입장에서 글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부모들이 어떤 계기와 과정으로 서로에게 끌렸는가 하는 점 등, 불륜이라는 파멸적이고 그릇된 선택에 대한 어른들의 뒷이야기가 무척 궁금했으나 이 책에서는 그저 불륜부모의 자식이라는 설정만 필요했는지 부모의 서사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도담의 아빠 창석은 도담에게 그저 수영을 가르쳐준 적 있었던 성실한 소방관이었을 뿐 엄마와는 실제로 어떤 부부관계였는지 또 불륜녀인 미영과는 어떤 감정의 교감이 있었는지 따위의 보충적인 심리상태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가족을 배신한 아빠라는 평면적 캐릭터로만 남는다. 심지어 배신당한 당사자인 엄마 정미의 심리상태마저도 완전히 제거되어 존재감이 없다. 


이것은 향후 스토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담의 정신적 상처 역시 평면적으로 그려지는 원인이 되어 안그래도 비현실적인 사건이라 그 상처의 실체나 강도가 별로 설득력있게 와닿지도 않는데 자기들끼리만 아파하고 달래주는 모양새니 이럴거면 굳이 그런 설정의 사건이 왜 필요한가 싶은 거다.  


만약 작중 인물들이 불륜에 의해 이혼을 하고 원하는 대로 새로운 가족을 결성했다고 가정한다면 부부이자 사돈이고, 새엄마이자 시어머니이고, 새아버지이자 장인어른이 되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콩가루집안 탄생이라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설정이라 기본적으로 이들의 복잡미묘한 심리와 이해관계 등 다뤄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작가는 애초부터 젊은 남녀의 기구한 인연에 얽힌 러브스토리를 만들 목적으로 말도 안되는 기괴한 설정을 가져와서 스토리 진행에 방해되는 요소는 미리 사고사로 없애버린다는 너무나 작가 편의적인 간단한 방법으로 안일하게 처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가는 확실히 젊은이들의 감정과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어른들의 농익고 숙성된 사랑 쪽은 취향이 아닌 것 같다. 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하는데 있어 작가가 사용한 최고 수위가 겨우 '안았다' 정도인 걸 보면 언제나 청소년 관람가 수준을 넘지 않는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닌가 싶다. 



본작 '급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반부를 거쳐 후반으로 갈수록 어설픈 허세를 부리기 보다는 자신의 페이스로 일관된 톤을 유지하는 작가의 진정성이 호감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문맥과 문장의 구성이나 단어의 선택 등에서 문학적 기교나 깊이감 등, 별다른 내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을 뿐 그렇다고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초반의 실망감은 어느새 잊고 그럭저럭 내용을 즐길 수 있었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정대건은 1986년생으로 현재 40대로 접어드는 나이이며, 찾아보니 놀랍게도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영화감독이었다. 



작가의 커리어를 확인하니 비로소 내가 품었던 의혹들이 일거에 해소되며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이 정도면 돗자리 깔아야 되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정식으로 개봉한 장편 극영화는 2017년작인 '메이트'가 현재로서는 유일하고 그 이후로는 소설들을 계속 발표하며 작가로 전향한 듯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전에 리뷰했던 '곰탕'의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김영탁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아마도 이 책이 계속 잘 팔린다면 머지않아 본인이 직접 감독한 영화제작 소식을 듣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84tOD4mFhEk&t=326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8288918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