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한 해 선배였다. 우리 중학교는 명찰 색으로 학년을 구분했다. 교내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쳤지만 우리는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다. 너도 나도 그저 흔해 빠진 소년 소녀였다. 특출난 재능도 없었고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었다. 성적도 평범하고 성격도 모나지 않았다. 우리는 한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말을 걸어볼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세계문학 전집을 읽을 때 너의 손에는 항상 너덜너덜한 무협 소설이 들려 있었다. 나는 네가 유치한 어린애처럼 보였다.
나는 하교 후에 읍내 공립도서관에서 한두 시간 책을 읽다 집에 돌아갔는데 그곳에서도 너를 보았다. 너는 만화 잡지를 펼쳐놓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조그만 소리로 낄낄댔다. 바보처럼 풀어진 하얀 얼굴이 조금은 신경 쓰여 간혹 너를 흘끔거렸다.

그날을 계기로 우리는 도서관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고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함께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너는 읍내에 살았고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촌 동네에 살았다. 너는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 시작했다. 학교와 가까운 정류장에는 알고 지내는 얼굴들이 한둘씩은 있었다. 우리는 얄궂은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한 정거장 앞을 이용했다. 그곳은 읍내의 초입이라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정류장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매일매일 서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왜 그리도 많은지 저 멀리 내가 탈 버스가 오면 아쉬움에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의 배차 간격은 한 시간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려다가도 너의 아쉬운 표정을 보면 다시 의자에 앉아버렸다. 그러면 너는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간간이 문자메시지로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다. 개학하고 다시 만난 너는 무언가 변해 있었다. 부쩍 자란 키 때문도, 살이 빠져 날카로워진 얼굴 윤곽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너의 힘겨웠던 여름방학을 듣고서야 네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셨어."
위로하는 방법은 학교에서 가르쳐 준 적 없었다. 너의 고백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뻔한 위로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너의 구겨진 교복 셔츠가 안쓰러웠다. 너는 계속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릴 적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단칸방에 세를 얻어 살았지만 자상한 아버지 덕분에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껴본 적 없었다고. 아버지마저 떠나버린 지금은 근처에 사는 작은아버지 가족이 종종 들여다봐 주신다고 했다.

두 달 전까지 소년이었던 너는 어른의 얼굴을 하고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흔들리는 눈동자는 아직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우리는 도서관 정원의 나무 벤치에 앉아 한동안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던 가을 하늘은 깊고 새파랬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올렸다. 손가락 틈새로 하늘이 쏟아졌다. 나는 허공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었다가 눈앞에다 손바닥을 펼쳤다.

그해 여름, 나에게도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나는 어둠이 두려웠다. 야맹증이 심해져서 여름방학 때 도시에 있는 병원을 다녀왔다. 그러나 어둠이 더욱 두려워졌을 뿐이었다. 캄캄한 곳에서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팠던 여름을 다 털어놓은 너와 달리 나는 말하지 않았다. 너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생긴 것이다.
날이 서늘해질수록 해는 빨리 저물었다. 내가 볼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짧아졌다.

너는 날이 갈수록 야위었고 얼굴이 상했다. 행색도 볼품없어졌다. 작은아버지께서 돌봐주신다 하지만 제대로 식사를 챙겨 먹을 리 없었다. 겨우 열여섯 소년이었다. 홀로 살아가기엔 이른 나이였다

회색 하늘에서 눈발이 하나둘 날리기 시작했다. 나에 관한 생각은 지금 하고 싶지 않았다. 너를 떠올렸다. 차가운 단칸방에서 홀로 추위를 견디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방금 헤어졌는데 벌써 네가 보고 싶어졌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너는 읍내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도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학교가 달라지자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부쩍 짧아졌다. 하교하고 도서관에서 너를 기다렸다. 네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읍내와 떨어진 외곽에 있었고 너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내가 기다리던 도서관은 너의 학교에서 보면 집과 반대 방향이었다.

주말에 너는 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다. 여전히 단칸방이었고 단층에 여러 가구가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주택이었다. 마당도 거의 없고 붉게 녹슨 철 대문이 기울어진 채 힘없이 흔들거렸다. 다행히도 이번 집은 내부에 작은 욕실 겸 화장실이 있었다.
너는 나를 새로운 둥지에 초대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첫 번째 집. 불투명한 유리창이 달린 얇은 철문이 현관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이 현관 겸 부엌이었고 왼편이 욕실이었다. 단출한 짐 때문인지 방은 좁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창문이 손바닥만 해 낮에도 전등을 켜고 생활해야 했다. 주인이 도배며 장판을 새로 해줬다는데 집에서는 오래된 다락방 냄새가 났다.

언제부턴가 너는 나를 데려다주며 너의 꿈을 이야기했다. 자동차 정비 자격증을 최대한 빨리 따겠다. 졸업하자마자 취업하고 돈을 모아 우리 집 옆에 집을 지어 살겠다. 마당에는 커다란 개를 키우고 아이는 네 명 정도 낳으면 좋겠다. 나는 가만히 너의 꿈을 들어주었다. 호응도 첨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지난여름, 나는 캄캄한 미래를 선고받았다. 야맹증이 심해져 방문한 안과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완전히 시력이 상실될 거라는 판정을 받았다. 진부한 드라마 같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잘 보이는데. 오진일 거라 믿고 싶었다. 그런데 시력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는 걸 느꼈다. 네가 그리는 미래를 들을 때마다 견딜 수 없게 슬퍼졌다. 그 미래에 정말로 내가 함께 있을까. 너는 완전히 시력이 소실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눈먼 장애인이 너를 욕심내도 되는 걸까. 그래서 나는 네가 더 망가지길 바랐다. 네가 나만큼 망가지면 당당히 네 옆에 있을 수 있을 텐데.

너에게 나의 미래를 상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네 얼굴을 마주하면 내일 하자, 모레엔 말하는 거야, 하고 미뤄버리기 일쑤였다. 영악한 나는 알았다. 이 관계가 내 고백으로 깨질 것이라는 것을. 내 캄캄한 미래를 너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음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눈을 떴을 때 기적처럼 시력이 회복돼 있다면. 내게 다가올 영원한 어둠이 없던 일이 돼 있다면. 잃어버릴 모든 것을 붙들 수 있다면. 나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쏟아지는 전등 불빛에 눈이 시렸다. 샘물이 터지듯 눈물이 흘러넘쳤다. 쌓였던 억울함이 목구멍을 뚫고 나왔다.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억눌렀던 고통이 폭풍우가 되어 나의 세상을 흔들었다. 큰 꿈을 가져본 적도 넘치는 욕심을 부려본 적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평범한 열여섯 중학생 소녀였다.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네 아내 노릇에 빠졌다. 네가 자고 일어난 이불을 마당 빨랫줄에 내다 널고 간단히 찌개를 끓여놓고 너를 기다렸다. 네가 좋아질수록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도 지루해졌다. 습관처럼 수십 번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며 응답 없는 너를 야속해했다. 어느 순간 그런 내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네게 이유 없이 화를 내고 토라졌다. 그러면 너는 잘못한 게 없으면서도 내게 빌고 매달렸다. 기분을 맞춰주려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기뻤다. 유치한 내 마음이 짜증 났다. 변덕스러운 마음을 나조차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곪아 터지기 직전의 고름 덩이였다. 그리고 그 고름 덩이는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네가 잡아주길 바랐다. 영영 볼 수 없다고 해도 네가 내 옆을 지키며 내 눈을 대신하겠다는 맹세를 기다렸다. 그러나 너는 어둠처럼 침묵했다.
너를 남겨두고 왔던 길을 천천히 되짚어 걸었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너를 의식해서였는지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몸이 풀숲으로 쓰러지려 했다. 그때 네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너를 힘껏 뿌리쳤다. 이 상황에서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내 처지에 화가 났다. 치욕스러웠다.

가로등 아래만 골라 동네를 빙빙 돌았다. 수도 없이 너를 저주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발을 옮겼다. 움직이지 않으면 온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열병에 걸린 듯 피부가 화끈거렸다. 턱 끝에 차가운 땀이 고였다가 땅에 떨어졌다. 무릎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몸의 고통으로 마음의 고통을 잊고 싶었다. 심장이 터지게 달리고 싶은데, 눈앞의 어둠은 두려웠다. 미움과 원망의 대상은 어느새 나로 바뀌었다.
"왜 나만 이 꼴로 살아야 해. 왜 나만."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 억울해. 다 죽어버려."
내 안의 새카만 어둠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 모두가 지옥에 빠지길 바랐다. 세상을 향한 저주의 언어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발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몸은 더 이상 내 의지에 따라주지 않았다. 더 걷고 싶은데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하늘을 바라봤다. 까만 하늘에 아스라이 반쪽 달이 떠 있었다.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내가 말해놓고 마음이 서늘했다. 스스로가 형편없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땀으로 진득했던 목덜미에 서늘한 가을바람이 와 닿았다. 들끓던 분노가 점차 가라앉았다. 폐허가 된 마음속에 허무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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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힘든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무언가에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래서 불안하다. 기후 위기와 전쟁을 두려워하며, 이미 전염병 대유행을 겪은 바 있고 이런 전염병 대유행이 또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제까지 당연했던 많은 것이 불확실해졌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기에 우리는 쉽게 무기력해지고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불안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보호하는 감정이다. 불안은 우리가 위협받고 있으며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하지만 너무 큰 불안은 우리에게 방해가 된다.

불안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저 스트레스가 평소보다 조금 더 심한 경우도 포함해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많은 경우에 우리 모두가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은 과장되거나 병적이라기보다 적절한 감정일 때가 많다.

나아가 불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불안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을 배워야 한다.

불안에 대처하는 법은 예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여러 사람이 함께 느끼는 공동의 불안에 관한 최근의 논의와 성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안에 대처하는 법은 우리에게 더욱 중요해졌다.
불안을 직시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할 때 비로소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창의력과 자기 효능감을 되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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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인칭 가난 - 그러나 일인분은 아닌, 2023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온(on) 시리즈 5
안온 지음 / 마티 / 202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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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지 책 제목에서부터 뭔가 먹먹해지는…
그녀가 가난에 대해 한 글자, 한 글자 사실 그대로 꾹꾹
눌러 담은 걸 읽어 내려가는 내내 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마음이 아팠다.
다만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현실적인 구조제도를 마련해 줄 수 있기를…
또 안타까운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부를 쌓는 도서는 매년, 매달 수 없이 쏟아지는데 반해 이런 내용을 다루는 도서는 상대적으로 출판률이 떨어지는 건 수익률이 좋지 않아서일까, 관심이 많지 않아서일까, 씁쓸하다.
그래서 난 비판하고 딴지를 걸기 보다는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조금은 성숙한 독자이기를 선택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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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관 룸메이트들과 살면서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잘자’였다. 학교로 출근했으나 아르바이트 직장을 거쳐 퇴근해 돌아오면 언제나 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대충 씻고 늦게까지 과제를 했다.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을지 계산하는 날들을 반복하며 노동시간만큼만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면이 극도로 부족했다.

사실 진짜 부족한 것은 시간이라는 자원이었다. 다음 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질 좋은 식사를 할 시간, 질 좋은 수면을 할 시간, 질 좋은 대인관계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되찾을 시간이 없었고, 미래를 계획할 시간도 없었다.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도 돈과 시간은 필수다. 내가 각종 행사를 거절하는 상용구는 하나였다. 시간이 없어서요. 이 말은 곧 돈이 없어서요, 와 동의어였다.

청년의 빈곤에 대해 질적 방법론을 시도한 연구는 매우 적은데, 연구 대상자들은 하나같이 시간 자원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은 누구보다 강력하게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현실에 묶여 있다. 살기 위해 했던 학원 일로 이력을 채워온 나는 언젠가 학원을 창업하겠다고 생각한다. 이 계획이 의외로 자연스러워서 깜짝깜짝 놀란다. 학원 일이 언제부터 나의 장래 희망이 되었나.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사람으로 살지 고민을 이어갈 시간이 없다. 내가 미래를 고민하다가 써버린 시간에 돈을 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13시간씩 일했던 주말엔 버거도 씹지 않고 삼켜야 했다. 나가기조차 귀찮으면 학원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학원강사의 주식은 사실 컵라면이다. 스물부터 스물한 살까지 1년을 이렇게 지냈더니 「생로병사의 비밀」에 섭외될 몸뚱이가 됐다. "빈곤한 식사는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질병이라는 청구서로 날아"왔다. "배만 채우는 식사는 건강을 담보로 잡힌 후불 결제"35였던 것이다.

10킬로그램이 쪘고 생리가 끊겼다. 다낭성난소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젊음은 수면 부족, 불규칙적이고 질 낮은 식사, 과로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설상가상 성대결절까지 왔다. 그런데 성대결절인 줄도 몰랐다. 매일 6~7시간 연강을 해서 그냥 목이 쉰 줄로만 알았다. 어릴 때부터 달고 살던 편도염이 재발할 우려가 있어 편도 수술을 했는데, 대신 강의를 해줄 강사가 없어서 수술 후 2일차에 9시간 연강을 한 것이 목에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살과 병을 얻고도 나는 가난했으므로 쉬지 않았다. 학업을 그만두지 않았고 학원도 그만두지 않았다. 생리불순이 심각해서 어쩌다 한 번 하는 생리는 거의 하혈 수준이다. 10대 때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생리통도 극심해져 응급실에 가 링거를 맞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체력과 정신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지금은 믿을 만한 자원이 아니게 됐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싶어 과외를 하나둘 정리했다. 마지막 과외를 갔는데 학생이 자기가 다니는 영어학원의 원장님이 심정지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 주 일요일, 학원 수업과 수업 사이에 잠깐 외출을 했는데 갑자기 구토가 올라왔다.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토악질을 하다가 13시까지만 진료한다는 병원에 사정해 링거를 맞았다. 13시 반에는 수업을 다시 시작해야 해서 13시 20분까지, 3분의 2만 맞고 나왔다. 링거를 끝까지 맞는 것이 사는 쪽인지, 학원에서 잘리지 않는 것이 사는 쪽인지 저울질해볼 틈도 없었다.

대학(원)생과 학원강사, 과외 선생을 병행하던 6년의 최근 2년에는 이 책을 쓰는 일이 추가되었다.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 메모장에라도 몇 줄씩 썼다. 생명수가 될 줄 알았는데, 글쓰기까지 겸하면서 시름시름 앓는 일이 늘었다.

무기력했다. 나는 새는 중이었다.36 돈을 벌어도 벌어도 불안해서 나를 몰아붙이며 일했던 날을 버티게 한 것이 정신력이라고 믿었기에 이 무기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글을 쓰려고 퇴사한 후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무기력, 퇴사, 하기 싫어 등을 검색하니 번아웃이 나왔다.

뇌파 검사상 나는 번아웃이 맞았다. 우울증도 있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했다.

나의 뇌가 감정적 회로보다 이성적 회로를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사가 상담의 피치를 올렸다.환자분은 비범한 사람이에요. 괴로움을 처리하는 방식이 남들과는 달라요. 덜 슬픈 거죠. 적당히 기쁜 겁니다. 스스로를 달랠 줄 알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왜 저는 덜 슬픕니까. 덜 슬프고 적당히 기쁜 것이 좋은 겁니까. 제가 대단히 슬프고 끝장나게 기쁜 것을 잘 모르는 게 좋은 것이냔 말입니다. 의사의 어깨를 흔들며 묻고 싶었다.

노동 환경이나 강도를 차치하고 연봉 숫자로만 보면, 나는 꽤 잘 버는 축에 속하는 6년차 학원강사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먹방 유튜버에게 대리를 맡길 수 있는 여유분의 만족감이란 것이 별로 없다. 누텔라를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이 없는 것처럼, 가난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번 맛보면 가난의 맛은 잊히지 않는다. 그 정도 수입이면 넉넉한 편이라고 주위에서 날 추어올려도 내 기분은 전혀 넉넉하지가 않다. "가난은 헤어나기 힘든 것이다. 그 인력에서 벗어나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그것은 헤어날 길 없이 우리를 집어삼킨다."40

만약 통장에 찍히는 0이 총탄이 되어 가난의 공포를 쏴 죽여줄 수 있다면 몇 개의 0이 필요할지 따지며 탄창이 넉넉하기만을 빈다. 연 1억을 벌어도 총알은 여덟 발뿐이니 가난의 공포는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같잖은 위안거리가 있다면, 그 빌런을 상대하는 내가 하릴없이 버텨낸 히어로라는 점이랄까. 오늘도 이 액션 스릴러 시리즈는 절찬 상영 중이다. 폐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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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10대가 됐을 무렵, 열음네 사정이 확 나빠져 금곡주공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 탈출이었다. 가족으로부터, 이 동네로부터,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먼저 탈출한 사람은 나였다. 두 살 많은 내가 먼저 대학에 진학하며 대구로 도망쳤다. 남은 열음은 종종 내게 전화했다.언니, 나 여기 싫다. 나도 나갈래. 언니, 거긴 좋나.

열음과 내가 끈끈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빠들이었다.24 눈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알코올중독에 빠진 경훈과, 벌이는 사업마다 족족 말아먹은 영창은 간헐적 폭력배였다. 경훈의 조준 실력은 형편없어서 나는 날아오는 소주병을 더러 피할 수 있었으나, 열음은 무지막지하고 무식하게 주먹질을 해대는 제 아빠 영창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가 흘린 피가 우리를 피를 나눈 자매보다 더 자매 같은 사이로 만들어주었다.

언젠가 열음이 말했다.언니, 우리를 아는 건 우리뿐이야. 마치 전쟁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가난을 수군거리며 서로를 껴안는다.

여전히 담이와 태주와 나는 공통의 고통과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질투와 박탈감을 함께 나눈다. 담이와 나는 유년 시절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어른’에 대해서, 태주와 담이는 취업 준비 기간이 주는 비참함에 대해서, 나와 태주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명확한 한계를 표현할 수 없는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 토로(때론 토론)했다. ‘20대 청년’이라든가 ‘MZ세대’ 같은 용어의 기본값에 우리가 포함될까. ‘청년’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20대’에서 가난이 고려되지 않고, ‘MZ’를 ‘고생’을 모르는 세대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열음이 한 말이 백번 옳다. 우리를 아는 건 우리뿐이다.

20대는 왜 이렇게 해야 할 일이 많을까. 돈이 부족해도 마음은 충만해야 하고, 최저임금을 받아도 사서 고생을 해야 하며, 학점에 취업 걱정을 하면서 연애도 해야 하고, 마른 지갑을 쥐어짜서 애인과의 기념일도 챙겨야 하고… 차라리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29 알게 된 편이 낫다.

스물한 살의 가을에 캐리어를 끌고 본가에 들러 책들을 챙겼다. 어차피 내 짐이라고는 책뿐이었다. 살림 집기가 아빠의 외상값으로 하나둘 처분되는 동안, 돈으로 바꾸기엔 헐했던 책들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끝내자, 이제.

전에 없이 아빠를 오래도록 응시하며 속으로 말했다.

아빠가 내 피아노를 버렸듯 나도 아빠를 버려야겠어.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겨울 계절학기에 ‘희곡의 이해’를 듣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아빠가 잘못된 것 같아. 교실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택시에 올라타 아빠가 남긴 음성메시지들을 연이어 들었던 순간만은 선명하다. 다 잘못했으니 제발 전화를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아빠의 목소리. 나는 대성통곡했다.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었으니 아빠의 부재에 대한 슬픔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눈물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꺽꺽 숨넘어가게 우는 내게 택시 기사님이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울음을 참는 끅과 끅 사이에아, 빠가, 돌아, 가셨, 나봐요, 라고 글자를 끼워 넣어 답했다. 기차역에 날 내려주며 기사님은 택시비를 받지 않으셨다. 그날은 12월 21일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이자 아빠의 생일이 3일 남은 보통의 날이었다.

장례식은 치르지 않았다. 문상객들에게 아빠의 죽음을 설명하기가 괴로워서였다. 아내와 딸이 나간 집에서 혼자 지내다가 술 한 병을 비우고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구분하기에는 너무도 약한 시력이라 손에 잡히는 대로 털어넣고는 미안하다, 사랑했다, 라는 메모인지 유언인지를 남기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어요, 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와는 한집에서 살 수 없다던 할아버지에게 부고를 전하며 송곳 같은 말을 뱉었다.죽어도 같이 못 산다던 당신 아들이 죽었습니다.

염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어서 엄마만 들어갔다. 내가 태어나면서 시작된 우리 집의 불운이 한 명씩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끝나는 데스게임처럼 느껴졌다. 할머니, 아빠. 다음은 나일까. 화장하는 것은 볼 수밖에 없었다. 화장을 마친 자리에 하얗게 마른 정강이뼈가 보였다. 반바지를 입고 앙상한 정강이를 드러낸 채 앉아 있던 술 취한 아빠가 떠올랐다.
장례라는 것은 식을 치르지 않으면 정말 짧고 간단했다. 할머니의 무덤 옆이 아빠의 묫자리였다. 아빠를 묻고 나니, 날 괴롭히던 아빠가 이제 편안했으면 좋겠는 아빠, 그간 질리도록 괴롭혔으니 하늘에서는 부디 나와 엄마를 굽어 살펴주면 좋겠는 아빠가 되었다.

계절학기 수강과 학원 일을 하면서 이 건을 처리했다. 한겨울에 시내를 쏘다니며 손발이 시렸을 텐데 감각이 고장 났는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한 달 반을 매달린 끝에 법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정승인이 완료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문득 귀가 엄청 시렸다. 아, 쌍꺼풀만이 아니었네. 귀도 아빠를 닮았지. 코도 아니고 정수리도 아니고 하필 귀가 시려서 짜증이 났다. 왜, 나는, 아빠가 이런 식으로 죽어서. 왜, 하필 이 겨울에 아빠가 죽어서. 어째서 나는 혼자 이렇게. 뼈가 삭을 것처럼 아팠다. 가혹했다.

이제 그만 죽어야겠다고 결심할 즈음마다 외할아버지가 날 보러 왔다. 구포시장이나 화명동 어딘가에서 밥을 한 끼 같이 먹고 헤어지곤 했다. 노쇠한 몸을 일으켜 날 찾아온 외할아버지를 만나면, 삶의 게이지가 조금 올라갔다.
그러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2 겨울방학에 학교에 나가 자율학습을 하던 중이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받으면 교실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외할아버지 돌아가셨으니까 빨리 가방 챙겨서 나와.

고모와 연락이 닿은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아빠가 죽고 난 뒤에도 할아버지께 철마다 안부 전화를 드렸지만, 언젠가부터 내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 하시는 기미가 보여 그 뒤로 연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부고를 듣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가족으로 묶은 실은 너무 닳고 닳아서 끊어지기 직전이었고, 아마 우리가 모르는 새에 투둑 미약한 소리를 내며 이미 끊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억지로 잇고 싶진 않았다.

고모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아빠를 앞세우고 1년쯤 지나서부터 치매 증세를 보였다.

술에 절어 쓰러진 아빠의 사진을 보낸 이후 메신저에서 차단당한 전력이 있지만, 엄마가 그 집과 계속 엮이는 꼴을 볼 수 없어 고모에게 바로 문자를 보냈다.엄마와 연락하지 마시고 앞으로의 일은 저와 의논해주십시오. 성인이 된 조카를 상상할 수 없었던 고모는 건성으로 알았다고 답장한 후 모든 논의에서 날 제했다.

고모를 계속 미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도와달라는 내 말에 손을 내밀어줬다면, 내 번호를 차단하지 않았다면, 아빠의 입원 수속에 함께 서명을 해주었다면, 내가 돈을 벌 수 없었을 때 알코올중독 치료비를 다만 얼마라도 지원해줬다면… 아빠가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고모도 아빠 죽음에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지만 며칠 뒤 할아버지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에 가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할아버지,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제가 어른이 될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어떤 어른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처받은 아이였던 시절을 체로 한 번은 거른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께 원망은 하지 않겠습니다. 갓난쟁이였던 제게 주셨던 사랑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겪은 가난과 폭력을 방관하거나 공모했던 어른과 가족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왜 용서했나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봅니다. 가족이 문드러지는 동안 저를 구해주었던 것들이 가족 밖에 있었으므로,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 괜찮습니다. 또 오진 않을 겁니다. 노여워 마세요. 저를 지켜보시다가 혹 제가 이상한 결혼을 할 것 같으면 하늘에서 벼락을 쳐주세요. 할아버지도 그 정도는 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

3대째 자살한 사람이 되면 기사에 날까. 이대로 천장이 내려앉으면 좋겠다. 잠들었다가 아빠처럼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최고의 죽음이네. 완전 날로 죽는 거지. 방바닥의 번개탄 자국은 지워졌나. 연기가 풀풀 나지 않았을까. 아무도 연기를 못 본 건가. 계절학기 망함. 재난 문자. 아빠가 잘못된 것 같아. 이른 폭염 경보. 아빠가 잘못된 것 같아. 1학기도 망함. 미안하다 사랑했다. 아빠의 유서가 드라마 제목이랑 비슷해서 우습다. "이상한 유언을 쓰다가 / 부끄러워 살고 싶어"31졌을 법도 한데. 휴학. 잘못된 아빠에게 들어간 돈. 아빠 병원비가 될 줄 알았던 돈. 수의도 싸게 하고 관도 싸게 했는데. 너무 싸구려였나. 엄마랑 갔던 세부 여행은 후회 말자. 아빠가 남겼던 음성메시지를 안 들어서 후회를 했던가. 무연고자면 좋겠다. 아무데서나 죽게. 학원. 월급. 삶을 영위하다. 땡. 삶을 마감하다. 딩동댕. 일어나기 싫다. 일어날 수 없어. 침대 매트리스랑 프레임 사이에 압착돼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싫다. 죽고 싶다. 억울하다.

씩씩거리며 한정승인 절차까지 혼자 처리했지만, 나는 망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자살 생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비자발적 빈곤과 알코올중독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하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친구가 교내 심리상담센터에서 10회 무료 상담을 해주니 가보라고 했다.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으면 무지하게 억울할 것 같아서 상담을 받으러 갔다. 친절하게 날 맞아준 센터 직원은 진로, 연애, 학업, 취업, 심리 상담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심리 상담을 받고 싶어요.어떤 종류의 심리 상담을 원해요?가족 관계요. 대답과 동시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사전 질문 단계에서 통곡하자 직원이 서둘러 날 상담실로 안내했다. 나는 보온 머그컵에 둥굴레차를 우려 마시던 여자 상담 선생님과 마주 앉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무엇을 털어내야 하는지 익히 알았던 것처럼 네 살 때 기억부터 흘려보냈다.

막상 입을 열자 남 얘기하듯 술술 말이 나왔다. 상담 선생님은 내 상태를 이렇게 정의했다.자신의 상황에 대해 감정적 표출을 하기 전에, 그것을 일단 해결해야 했기에 감정과 유리된 선택의 순간을 끝없이 마주하느라 남의 일처럼 자신의 일을 판단하게 된 거예요. 부드러운 말투로 상담을 이어가던 선생님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생선 바르듯 낱낱이 내 기분과 내 생을 분석해주길 바랐으므로 쉼표마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다음 분석은 대단히 짧고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생했어요.

누가 머리 위에서 양동이로 눈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생이 아닌 생이 있기는 했나. 휴지 한 통을 비우며 눈물 콧물을 닦는 나를 선생님은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러고는 하얀 도자기 머그에 둥굴레차를 우려 내주었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선생님은 매주 차 한 잔을 마시러 오라며,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무료 10회 상담이 끝날 때까지 상담실에 갔다. 나는 무언가를 고백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질문했다.미성년 자녀에게 성인 부모가 응당 해야 하는 의무란 무엇인가요? 제가 선택한 것이 없으니 제겐 잘못이 없다는 선생님의 말을 믿어도 되나요? 가족에 대한 제 로망은 이미 일그러졌겠죠? 아빠를 그만 원망하고 용서해야 할까요? 저의 불안은 가족에 대한 것일까요. 가난에 대한 것일까요? 왜 가족의 가난이 저의 가난이 될까요?

상담을 하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고모, 엄마, 아빠에게서 한 발씩 멀어졌다. 11회째부터는 상담료를 낼 수 없어서 상담을 받지 못한 내게 아직 해소하지 못한 질문이 있다. 2,000원이면 샀을 번개탄으로 죽은 아빠와 죽지 않고 입원해 월 80만 원짜리 치료를 받았을 아빠 중 내게 더 깊은 가난을 안겨줬을 아빠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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