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너와 나의 상처를 대하는 법
with 칼 야스퍼스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상처가 시작되는 까닭은 다양하고, 때로 어떤 상처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 혹은 ‘깊은 괴로움이나 깊은 아픔’으로 불릴 만한 상처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토록 깊은 상처를 껴안고, 그와 씨름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이해하는 일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위로하거나 그를 지지하기보다 오히려 그를 미워하거나 비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다시 나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요.

전문가들은 우울감과 우울증을 구분합니다. 살아가며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꼭 질병의 ‘증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제 저녁을 많이 먹고 체해서 그 뒤로도 며칠 소화불량을 앓으며 고생한 것과 특정한 위장‘병’이 있는 것이 같지 않은 것처럼요. 마음의 상처도 어떤 것은 넘어져 무릎을 쏠리는 정도의 상처이지만 어떤 것은 ‘고통’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붙일 만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워’라는 표현을 잘 쓰지는 않지요. 대신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서 미칠 것 같아’라는 식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그러나 어떤 표현을 쓰든 그 상처에는 우리가 좀처럼 어쩌지 못하는 깊은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고통의 본성 ‘아무도 모른다’

전통적으로는 통증과 고통을 구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요. 통증은 신체의 상처이고 고통은 심리적 상처, 곧 괴로움을 겪는 내적 상태, 마음의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증은 영어 pain과 대응하고, 영어 suffering의 번역어는 고통(괴로움)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몸과 마음의 상처가 이렇게 딱 떨어지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고통’이라는 말 자체에 통증과 괴로움이라는 말이 함께 들어 있는 것처럼요.

고통은 몸의 상처, 마음의 상처로 딱 잘라 나눌 수 없고, 몸과 마음은 함께 영향을 받고 함께 작용합니다. 아픔은 몸과 마음 전체에 걸쳐 있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고통을 고통으로 만드는 핵심은 오직 ‘나만 그렇게 느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표현으로도 이 고통을 타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거나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거죠, 내가 얼마나 그리고 어떤 식으로 이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그러니 공감도, 이해도 좀처럼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고립된 기분을 느낍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니까요. 그러니 아플 뿐만 아니라 깊이 외로워집니다.

더욱 심각한 일은 이 고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거예요. 알 수 있으면 좀 낫지 않겠어요? 어떻게든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희망이 생기니까요.
그런데 그런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통입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도 이해할 수 없고, 그러므로 당사자가 어떤 식으로든 컨트롤 할 수 없으니까 고통입니다. 그래서 나만이 아는 괴로움이면서 동시에 나에게도 너무 낯설고, 정말 모르겠고, 그래서 지금 내가 겪는 일에 대해 어떤 긍정적인 반응, 예를 들면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래도 희망을 품는 일 같은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고통을 겪는다는 일의 정체입니다.

고통이 데리고 오는 친구

불행은 혼자만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도 친구들을 데리고 옵니다. 죄책감과 비난, 고립감, 무력감이라는 이름의 친구들이지요. 처음에 사람들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안쓰러워하고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비난의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거든요. 내가 위로해줘도 바뀌는 건 없는 것 같고요.
게다가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은 이전과는 같은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가벼운 인사조차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웃음이 잘 나오지 않고,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거나 인간관계에 꼭 필요한 행동을 하는 것조차 어렵게 느끼게 됩니다.

친밀한 사이라면 이런 일이 더욱 괴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관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배려나 기쁨의 순간을 느끼기는 어려운데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고통을 겪는 당사자는 더욱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 때문에 상대방까지 힘들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자기 자신이 고통과 고통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특징을 야기하는 원인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지금이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그 도무지 알 수 없는 고통, 아무리 애를 써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나 죄책감은 내가 ‘한계 상황’에 놓여 있다는 신호입니다. 한계 상황이란 지금까지 살아오던 것처럼 흘러가는 것이 불가능할 때, 이 상황을 내치거나 제거하는 일이 불가능할 때, 그러므로 이 상황마저 다시 나의 삶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과거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과거와 지금 이 막다른 곳에 몰린 듯한 느낌마저 모두 나라는 사람, 나의 인생 안에 속한다는 것을 결국은 받아들이고 소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우리 삶에서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것이며, 고통을 겪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결실은 ‘살아남는’ 일입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고, 살아남을 때 비록 우리가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한계선은 변화하게 됩니다.

내가 미처 돌보지 못하는 내 전체적인 상황과 내 삶에서 고통이 아닌 다른 순간들을 바라보면서 이 시간을 통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방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 힘으로 힘들 때는 반드시 타인, 그것도 그런 역할을 하도록 정해진 전문가에게 찾아가는 일입니다.

고통이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지 않도록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일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비난하고 나마저 같이 무너져, 관계의 든든한 축을 허물지 않을 만큼의 거리요. 고통이 우리의 관계를 전부 삼키지 않도록 나의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약간의 간격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마음에 감당하지 못할 일을 무리하게 도맡으려 한다면 상대가 미워지고 싫어지기 쉽거든요. 깨지지 않는 바위를 계속 두드리는 계란이 되면 무기력함과 좌절감을 느끼게 되니까요.

상대를 위해서라도 상대에게 마음을 쓰는 나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마세요. 내가 지쳐버리면 나중에 그 사람을 위해 정말 힘을 내야 할 때 손 하나 까딱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고통과의 동거는 어쩌면 장기 레이스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너무 애써서 무엇인가를 하려 하지 말고 감당할 수 있는 한에서 평범하게 곁에 있어주세요. 먹고 마시고 걷고 햇볕을 쐬고…. 상대가 잊고 있을 작고 사소한, 그러나 가장 필요한 일상의 순간을 함께하면서요.

6. 완벽주의와 번아웃
with 도가 철학

실제로 우리 사회는 몸이 부서지게 노력하는 것을 당연한 삶의 스펙처럼 요구하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몰아붙여 노력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지 않을 때는 자신이 제대로,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노력의 끝은 번아웃?

세계보건기구 WHO는 2019년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을 만성적 직장스트레스 증후군으로 규정했습니다. 의학적 질병까지는 아니지만 건강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증상이라는 것인데요. 번아웃 증후군은 소위 ‘하얗게 불태운 후’의 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겪게 되는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피로 상태로서 의욕이 떨어지고 공감 능력이 저하되며, 부정적 사고는 강화됩니다. 그러니 성격도 평소 자신의 모습과 달라지고, 증상이 심화되면 점차 모든 것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고 하네요. 처음의 스트레스 요인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싫어지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지는 것이죠. 친밀했던 인간관계에 소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밀레니얼 세대는 앞선 세대에 비해 더 어릴 적부터, 높은 확률로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단체로 ‘투 머치too much 노력 증후군’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표현도 그런 생각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노력에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요.

노력에도 안전벨트가 필요해

노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노력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은 노력을 북돋는 약이기도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무척 오만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나만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거든요. 그러나 하나의 일이 성취되기까지는 많은 조건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나의 노력은 일이 성공하기 위한 무수한 조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노력을 통해 목표한 것을 반드시 얻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고 노력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런 만큼 노력에 한계선을 긋기 어려워집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노력을 강조하는 태도는 종종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조건을 가리기 위한 위장 장치가 됩니다.

노력의 재료인 나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휴식 없이 일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사실 기계도 무조건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계가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컴퓨터가 많은 곳은 컴퓨터의 정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온도와 습도를 조절합니다. 컴퓨터를 끌 때에도 강제로 종료하면 좋지 않습니다. 적절한 과정을 밟아 전원을 꺼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쉼 없이 끝없는 노력을 할 수는 없고, 노력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조건을 참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력의 적정치는 그 사람의 상황, 상태,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나 자신의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 고비를 넘어가는 과정이어서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지쳐서 잠깐 쉬는 게 좋겠다고 나 자신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는 일은 어렵거든요.

무위, 무리하지 않는 노력

‘무위’는 사실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위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그 반대말인 ‘유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유위有爲란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며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 일을 아예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도가의 무위 사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거나 노력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존재가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려는 노력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누구라도 노력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곧, 유위는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를 지우며 다른 것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위는 내 삶이 아닌 것에 ‘억지로,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노력이 단지 수고로운 게 아니라 괴로워지는 순간은 대개 내가 나와 멀어지는 일과 맞닿아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뜯어고치려 하기

세상에는 내가 선택할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조건이 있습니다.

동그라미가 네모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네모가 잘난 척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요. 장자는 그저 저마다 자신의 모습대로 살 뿐이며, 그 자신의 모습대로 충실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은 일견 대단한 노력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부정하는 일과도 닿아 있습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삶을 만족스럽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무언가보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을 바꾸려고 무리하게 노력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계속 바뀌지 않는 것에는 무력감을 느끼기 쉽거든요.

좋아하는 일이 싫어질 정도로 노력하기

시간이 흐르며 상황이 바뀌고 나의 신체가 변하고 감정이 변하듯이, 내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던 것, 내가 만족했던 상태 또한 변할 수 있습니다. 기쁨도 언제까지 영원할 수는 없어요. 사랑이 변하듯, 꿈도 변하고 들일 수 있는 노력의 모습이나 정도도 변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예전에 했던 만큼으로 유지하고 싶거나 혹은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을 거예요. 그 마음은 나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싫어질 정도로 노력하지는 않아도 됩니다.

좋아하는 일이 싫어지고 무서워진다는 것은 지금 그만큼의 여력이 되지 않는 나의 삶을 억눌러 끼워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나로 살기 위한 노력인가? 물어보기

그럴 때는 그 신호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한동안 안 하고 좀 쉬는 거죠.

그러나 이미 번아웃 상태가 되어버렸고 바로 그만둘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자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하니까 아마 그만두라고 할 것 같아요. 장자에게 내 삶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꼭 ‘해야 하는’ 것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쉽게 그만두기 어려운 현대인의 입장에서 타협하자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예전에 하던 것과는 다르게요. 7시간 하던 것을 2시간 할 수 있고, 열 번 하던 것을 한 번 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나 잡다한 고민과는 거리를 두고 바로 눈앞의 아주 사소한 일들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밥을 먹고, 햇빛을 보고, 산책을 하고, 계절과 함께 바뀌는 색을 알아차리는 것들이요. 여행을 가도 좋아요. 싫은데 억지로 ‘꼭’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놓아버리는 것도 너무 싫으면 그때는 그냥 ‘느슨하게’ 있으면 됩니다.

즐길 수 없을 때, 너무 힘들 때는 그저 버티는 것으로도 좋습니다. 내가 지금 즐기지 못하고 그저 버틴다고 해서 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길을 간다고 해서 내가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변화하는 나를 느끼고 이해하고 사이좋게 같이 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하나, 다른 방식의 노력은 노력이 아닌가? 둘, 이것이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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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꿈과 현실, 타협이 될까요?
with 프리드리히 니체

고객님, 허락한 꿈이 따로 있을까요?

시작하기 전에도, 하고 있는 중에도, 그만 접으려 할 때도 고민되는 것이 꿈입니다.

고민할 새 없이 덥석 붙들게 되고, 엄청나게 고민하고, 도무지 쉬운 길이 아닌 것 같고 힘들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드는 것. 이제는 도무지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껴도 그만두기에는 마음이 참 그렇고, 지난 지 한참이 되었어도 두고두고 생각나기도 하는 것이요. 아니, 이렇게까지 어려울(좋을) 일이야, 막상 뛰어들고 나면 상상했던 것과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것까지도요.

사회는 빨리 꿈을 정해서 그것만 보고 달려가기를 요구합니다. 꾸어준 돈 재촉하듯 빨리 정하라고 닦달해서 ‘꿈’이라 부르는 건가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헛꿈 꾸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핀잔을 들을 때도 있거든요. 막상 꿈이 없다고 대답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미묘한 반응이 돌아옵니다. 아, 어쩌란 말인가, 세상이 허락하는 꿈이 따로 있나 싶어요.

그렇게 밀어붙이지 않아도 꿈꾸는 것은 원래 쉽지 않고 많은 에너지를 요합니다. 남들과 비슷하면 비슷한 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 그래요. 경쟁률이나 시장성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꿈이란 것이 지금 없는 것, 아직 없는 것을 그려내어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엄청난 상상력을 요합니다.

현실적으로 살기도 어려워

어디 꿈을 갖고, 꿈을 꾸는 일만 어렵겠어요. 꿈을 좇는 일도 어렵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꿈을 좇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는 대로 똑같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을 쏟아야 하는지 역시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처지에 따라서는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애초부터 내가 내 주제에 맞지 않는 허황된 꿈,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것은 아닌지 내 판단력 자체가 의심스러울 때도 있고요.

반대로 이렇게 쉽지 않은 현실이야말로 나를 더 꿈꾸게 밀어붙이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을 붙들었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조차 내가 충분히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현실에는 가깝고 구체적인 비교 대상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의 부족함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대로만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다시 꿈을 꾸고 싶어지고요. 나는 그냥 숨만 붙어 있는 채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하면서 이 현실을 살아가고 싶으니까요.

세상을 알아갈수록 나를 잃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점차 내 뜻만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과 조건에 나를 맞추는 법도 배워갑니다. 좋게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로 떵떵거리며 살다가 조금씩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조금씩 더 겸손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더 많이 알아 더 겸손해진 내 모습이 때로는 내가 꿈꾸고 좋아하던 나와는 너무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꿈과 현실도 타협이 되나요

사람들은 흔히 꿈을 접고 현실을 택하는 일을 ‘현실과 타협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이 본래 얽혀 있다고 생각하면 사실 꿈과 현실과의 타협은 무척 좋은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죠. 타협은 상대의 뜻만을 쫓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원하는 것을 조정하고 맞춰간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니까 문제는 타협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그 타협이야말로 어려운 일이고요.

어느 쪽에 더 끌리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실제로 타협하지 못하는 것은 꿈과 현실이 아니라 ‘나와 나 자신의 마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의 내 모습에 그대로 만족하기는 어렵고, 꿈을 좇기에는 두려운, 이 두 가지 상황의 공통점은 ‘내가 나 자신을 긍정하기 어렵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어느 쪽이든 나를 좋아할 수 없는 거예요.

진짜 문제는 꿈과 현실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니체는 19세기의 철학자로, ‘신은 죽었다’ 같은 발언과 함께 전통적인 서양철학에 전면적 반기를 든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니체가 신이 죽었다는 말로 주장하고자 한 것은 신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가치가 무너진 시대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시대적인 급변으로 인해 지난날의 가치가 구식이 되면서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원래부터 합당하지 않은 것이 합당한 척, 모두에게 해당할 수 없는 것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척했기 때문이지요.

이 순간 우선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이미 자리 잡은 ‘어떠한 기준’이고 그 기준에 따라 누군가를 ‘평가하는 공식’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 기준에 따라 낮게 평가된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면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해도 마음 편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는 사람, 평생을 타협하며 맞춰가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 걸요. 조금만 체해도 하루 종일 속이 불편한데,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체한 상태라면 얼마나 고되겠어요.

나 자신으로 사는 첫 번째 방식, ‘어쩌라고’ 마인드 갖기

기존의 유럽 정신사를 전면 비판한 니체처럼 기존의 기준, 조건을 내가 꼭 그럴 법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기준이나 평가에 대한 단 한 번의 반발이 어려워서만은 아니고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것이 현명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치를 다 치워버리면 사실 평범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당혹감과 혼란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방식, ‘원하지 않았다’에서 시작하기

어떤 기준이든 평가든 꿀떡 삼켜서 소화하는 나로 움직이는 방향이요. 아까는 ‘그 기준이 과연 그렇게나 합당하여 변할 수 없는 것일까? 세상에 그런 기준이나 가치밖에 없을까?’라며 들이대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아 그래, 내가 지금 그런 상태구나’ 하고 허허로이 끌어안는 방식이죠.

자기긍정왕의 최고 단계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마저도 자기가 원한 것으로 포용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뜻대로 살아도 결과마저 자기 뜻대로 완벽하게 맞추어 통제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더욱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시간이 이미 흘러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때로 깊은 후회에 치명상을 입는 것은, 이제는 깨닫고 반성하고 바뀌게 되었어도 그때 그 일을 되돌리거나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니체는 그마저도 ‘오, 그래. 내가 원한 거야’라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초인은 장애물을 전부 부술 수 있는 수퍼히어로 같은 존재가 아니라 어찌 되었든 나의 삶, 나의 매 순간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게 되는 순간을 계속해서 넘어서기 때문에 ‘초超’인이지요. 그래서 니체에게 최고 단계의 초인은 가치에 저항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만나도 놀이로 만드는 어린아이처럼, 사건, 사고에도 ‘이런 게 여행의 참맛이지’라고 생각하는 여행객처럼 삶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짜 두려운 것은 타인의 기준이나 평가가 아니라, 그런 기준에 따라 나의 지나온 시간을 전부 평가절하하는 나 자신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상적인 타협점을 찾는 것도, 나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나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선택 혹은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마주하는 일입니다.

4. 시간이 갈수록 나는 약해질까요?
with 주디스 버틀러

역설적으로 이제야 알게 된 것은 어른이라고 다른 ‘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변하는 것, 아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머물러 있는 것이 점차 늘어나 쌓이는 일’이었습니다.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내가 되는 것, 혹은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가 되는 것, 함께 변화할 수 없는 내가 되는 일이요.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나이 먹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나 생각은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 있는데, 나머지 것들은 변해가는 것이죠.

정말로 두려운 것은 마음조차 변하는 것이다

결국은 마음마저 변하는 거예요. 단지 몸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꿈도 상상력도 모든 것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이 그 약함의 절정도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전조이고, 어쩌면 일시적인 피로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약함, 과거‘처럼’ 할 수 없음은 나에게서 점차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대로 약해질 수는 없다?

오히려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영영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고, 나의 몸도 생각도, 내가 맞이하는 삶의 과제와 그 의미도 계속 변화할 텐데 나만이 변하지 않으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태도라면 더욱 더 힘들 수밖에 없겠죠. 흐름을 따라가는 일보다 흐름을 거스르는 일에는 더 많은 노고가 필요하니까요. 게다가 변화를 통해서만 얻게 되는 깨우침도 있고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조건 강한 것이 아니고, 할 수 없는 것이 무조건 약한 것은 아닙니다.

사회가 장애라고 규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는 구조나 기능상의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환경이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많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약해짐, 무력해짐 등이 우리를 구성하는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취약한 존재입니다.

‘강한 인간’은 사실이라기보다 ‘우리의 바람을 투영하여 조각한 이상’입니다. 자신의 일을 알아서 척척 스스로 다 잘해낼 수 있다는 ‘독립적’ 인간관 역시 사회가 만들어 주입하는 환영이고요. 독립적으로 살아야 하고,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도움을 얻으면 안 되고 그러므로 의존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배우잖아요. 이런 생각은 서구근대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실상을 살펴보면 우리는 늘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독립적이고 강한 인간이 아니라, 상처받기 쉽고 약하여 반드시 다른 것들의 지지와 도움이 필요한 의존적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서로가, 사회가 필요한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서로에게 의존함으로써만 배우고 익히며 해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약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약한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당신이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어떤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 능력을 사회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주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있어서는 ‘강한 인간’이란 개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떤 조건과 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어야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나의 약함을 포용하기, 변하지 않는 것과 함께

하지만 ‘약한 것이 나쁘지 않다’, ‘인간은 늘 약하고 할 수 있음과 없음은 상대적이다’라는 사실을 알아도 그 사실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수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약함을 순순히 인정하고 포용하는 방법을 우리는 배워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아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덜 약해질까, 느리게 약해질까, 다시 강해질까?라는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할 수 없음과 할 수 있음을 오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약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인 듯합니다. 무엇보다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고요. 조건이 달라져서 다른 방식의 상호의존과 도움을 요청하는 상태가 되어가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취약함, 나약함, 무력함, 잘하지 못함, 잘할 수 없음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미 우리 곁에 바싹 붙어 따라다니는데 우리가 그것을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나이를 먹어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로 약해지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나의 서투름과 약함을 점차 더 많이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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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누구나 그렇다는 인생의 물음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마주한 철학자들의 이야기와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이끈 방식과 흐름이 내 인생의 고민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근엄한 그들의 생각 방식이 우리 고민을 자유롭게 풀어볼 기회, 자유롭게 생각해도 될 기회를 열어주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생각을 발판 삼아 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깊이 잠수하여 내 안에서 유영할 수 있는 틈을 찾기를. 나를 위해 숨을 고르고, 깊이 숨 쉬는 시간이기를.

1. 나만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걸까요?
with 에리히 프롬

외로움의 가장 놀라운 점은 ‘침투력’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어떤 상태이든 외로울 수 있거든요. 우리는 여러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생일파티를 하고 있을 때도, 사람을 만날 틈조차 없이 일에 치이며 살 때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외로울 정신도 없는 듯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그 바쁜 와중에도 밀려오는 깊은 헛헛함이 있습니다.
흔히 ‘인간은 누구나 외로우니 별달리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지요. 저명한 철학자들에게도 인간은 본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입니다.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라서 외로울 뿐만 아니라, 너무 막연해서 외롭다고요. 막연해서 불안하고, 불안해서 외로워지는 것이라고요.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오늘 잘 나가다가도 내일 당장 넘어질 수 있거든요. 그나마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인생의 끝, 죽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끝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내게 찾아올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막연한가요.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지금 무엇을 갖고 있든,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든 전혀 안정적이지 않은 게 우리네 인생이지요.

안 그래도 내 인생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 혼자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는데 뭐가 어떻게 될지도 몰라 막연하고 불안하기까지 하다니, 이쯤 되면 외로움은 거의 자연재해급입니다. 딱 짚어 무엇이, 언제 어떻게 되는지를 알면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지만 뭐라 딱 꼬집을 수 없는 게 불안이니,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거든요. 게다가 내 삶이 미리 다 정해지지 않아서, 자유가 있어서 외로운 것이라고 하니 더욱 더 할 말이 없지요.

해결책이 없다니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할 때의 장점은 내가 외로움을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임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나의 외로움 자체를 부정하고 억누르게 되잖아요. 괜히 내가 엄살부리는 것 같고, 이런 감정을 느끼거나 빠져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고요. 그러나 외로움이 누구에게나 인생의 그림자처럼 반드시 따라붙는 것이라면 외로울 때는 그냥 외로워해도 괜찮겠죠. 내 감정 때문에 굳이 나를 탓하지는 말고요.

본래 외롭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누군가가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연결감과 소속감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을 느끼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강렬한 감각에 빠지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느낌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런 활동은 강렬한 만큼 지속 시간이 짧고 건강을 해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업무, 종교, 온라인 커뮤니티 등 자신보다 큰 무엇인가에 소속되려 합니다. 조금 더 온건하고 지속 가능한 일을 찾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방식 역시 건강을 해치는 중독적인 것이 되기 쉽고, 외로움을 단지 회피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냥 잠깐 나를 잊고 지우는 일이죠.

좋은 연결의 방법으로 창작과 사랑을 추천합니다. 창작은 사물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들은 너무 자극적이지도, 일시적이지도 않고 나를 지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활성화하지요.

지독히 외로운 지금의 나에게는 그 어떤 사랑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현재 외로움 때문에 너무 가난한 상태라면,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사랑, 창작, 그 무엇이든 내가 나서서 ‘하는’ 일에 엄두가 나지 않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의외로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힘을 빼고 긴장을 푸는 일이요.

신경을 곤두세우고 읽는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흡수되지는 않습니다. 곧, 책과 내가 연결되지는 않는 것이죠. 무엇인가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빈틈이 있어야 합니다. 외로워서 너무 괴로울 때는 얼른, 한시라도 빨리 이 순간을 넘어서고 싶고, 그래서 빨리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외로움에 쫓기는 마음만 내 안에 가득 차버리죠. 이 외로움을 달래줄 다른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는 중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외로움에만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것과 잘 연결되려면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것과의 연결에 나의 힘을 쏟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죠. 힘을 쓰기는 쓰는데, 다른 것과의 연결을 만드는 ‘활동’이 아니라 외로움에 쫓기며 도망치는 ‘고생’ 중인 셈입니다.

내가 너무 힘이 들 때는 굳이 나로부터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또 다른 감정이, 세계가 당신에게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조금만 긴장을 풀어봅시다

외로움은 이겨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반려감정 같은 것입니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평생 같이 살아가는 거죠. 그러나 우리의 삶에 들어 있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이 외로움만은 아닙니다. 삶이 본래 외로운 것이라 하여도, 삶의 모든 순간이 온통 외로움만으로 칠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요. 기쁨, 놀라움, 즐거움, 애틋함, 감사함, 뒤늦게 찾아드는 깨달음에 대한 수많은 감정들… 삶이라는 캔버스에는 외로움 외에도 다양한 색깔의 감정이 이미 섞여 있습니다. 외로움의 무게에 짓눌려 문득문득 잊곤 하지만요. 다시 말해, 우리는 늘 외로움과 함께 살지만 이따금 외롭지 않은 순간도 있고, 외롭다 하여도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타인과 나, 비교의 중심 잡기
with 프리드리히 헤겔

마음이 조급하고 초조해져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습니다. 나만 이 자리 그대로인 것 같아서요. 처음에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나 동료 등 다른 사람이 나보다 빠르고 능숙하게 잘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저 진득하게 시간을 보내며 쌓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불안해집니다.

나는 한없이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지다 못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은 그사이 앞으로 더 나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꾸만 가슴이 무겁고 막막해집니다. 때로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처럼 두려워지기도 하고요.

비교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말을 자주 본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고요.

비교를 때려치워야 할까요? 하지만 그게 쉬웠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겠죠. 살면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어쩌면 거의 매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항상 비교를 하며 살아갑니다.

비교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닌 거죠. 설령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요.

문제는 비교 자체가 아니라 ‘나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입니다.

우리가 비교 때문에 힘들 때는 자기를 낮추게 될 때입니다. 저 사람보다 못하는, 저 사람보다 느리고 서투른 내가 못난 사람처럼 느껴지고,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그 순간에는 내가 엄청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지면서 나 자신을 좋아하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는 노력을 해도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왜소해 보일수록 내 과제는 더욱 무겁게 느껴지죠. 결국은 그 안에 빠져 나아가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요. 기왕 비교를 할 것이라면, 어차피 비교를 그만둘 수 없다면 나를 자꾸 작게 만드는 비교 말고 나를 더 잘하게 도와주는 비교를 할 수는 없을까요?

나의 자유로운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무엇보다 이 열등감, 초조함, 불안감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나 자신에 대해 의식하는 것,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곧 자기의식입니다. 우리는 자기의식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은 내 선택에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그 사람과 부딪히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의식합니다.

자기의식이 생기면 그 뒤에 바로 따라붙는 것이 있거든요. 바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인정 욕구입니다. ‘자의식이 있다면, 그런 자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 같은 느낌이죠.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인정 욕구는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성취해낸 것에 대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평가할 때도 이 같은 노력과 성취는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노력의 시간과 과정은 본인이 제일 잘 알테니까요.

우리가 남들과 비교하면서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잘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비교 또한 이 같은 인정 욕구와 닿아 있습니다. 이런 인정 욕구를 채우려면 우리는 쉴 수가 없습니다. 매번 이전의 나를 갱신하며 더 나아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매번 지난번의 나보다 나아질 수 있겠어요. 지금 이 상태도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것인데, 더 나아지려면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노력의 결과로써 얻은 성취가 내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잘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하면 삶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서바이벌 오디션이 됩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항상 지금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매번 더 잘하고 더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합니다. 내 성취에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은 아주 잠시뿐입니다. 뭔가를 이루어내더라도 내 마음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의 노력이 지금보다, 그리고 남들보다 나은 결과를 낳지 않으면, 그 노력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항상 초조하고, 항상 불안하겠죠.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 보람도 자부심도 느끼기 어렵고요.

모든 인정 욕구의 토대이기도 한 이 욕구는, 피라미드로 치면 윗단을 놓기 위해 먼저 놓아야 하는 밑받침입니다. 바로 ‘그냥 나’에 대한 인정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이뤄내지 않은 그냥 나, 나 자신에 대한 인정이요.
이러한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수많은 성취를 이루고 그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타인에게 인정받아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성취도, 거기에 들인 노력도, 성취로 이뤄낸 결과물도 나 자체는 아니니까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되어야 하는 평가와 인정은 자연체인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과 긍정입니다.
여기서 인정은 그리 거창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니? 아, 그렇구나~’ 하고 그 상태를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것이 인정입니다.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일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인정입니다. 이것이 충분히 충족될 때, 우리의 토대는 단단해지고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정받을 목표를 세우는 것도, 노력을 하는 것도 나름의 자기의식을 지닌 내가 있지 않으면 시작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자기의식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자기의식을 계속 변화시키고 새롭게 선택할 수 있고, 계속 스스로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갈 힘을 이미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성취가 없이도 이미 인정할, 인정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비교는 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입니다. 나에게 아직 없는 것을 가진 사람,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죠. 그러나 흔들려야 비로소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비교를 하는 주인공도 나, 그 비교 끝에 다시 돌아오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내가 잘하고 싶은 건 나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비교의 중심이 나한테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더라도 결국은 나에게서 시작하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얼마만큼 많이 그리고 얼마만큼 빠르게 성취해야 인정할 만한 나인지를 타인의 관점과 시선에서 출발하고, 다시 타인의 평가로 마무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기의식의 중심에, 그리고 내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이겠죠. 당신의 모든 노력과 비교의 중심에 당신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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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멀어질수록 행복해진다 - 관계 지옥에서 해방되는 개인주의 연습
쓰루미 와타루 지음, 배조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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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질수록 행복해진다?!
과연 무엇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행복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인간관계에서의 모든 문제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온다고 해요~ 적당한 거리두기는 코로나같은 바이러스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조금 떨어진 거리, 적당한 거리가 가장 어려운 거리이지만 나, 너, 우리 모두를 위한 거리라면 두고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개인주의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참고하시라고 책의 일부를 공유해 봅니다.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상태란 어느 정도를 말할까? 최소한 자신의 의지로 하고자 하는 일에 매사 걸림돌이 되는 정도라면, 남은 인생을 위해서라도 돌파할 필요가 있다. 꼭 과거의 나처럼 불안장애가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문제다.
- 19p

시끌벅적한 단체의 세상에서 도망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끌벅적한 단체 사진을 보고 부러워하는 마음 역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나이가 되고도, 게다가 직접 꽤 큰 모임을 운영하면서도 역시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단체 생활의 중요성이 얼마나 뿌리 깊이 세뇌된 건가 싶어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친구 수를 늘리려고 하거나, 나 역시 모임에서 단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의 미학은 떠벌리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소통하는 데 있다.
진짜 우정은 과시하지 않는다.
- 48p

마음을 계속 괴롭게 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길 권한다. 한 명, 한 명을 이름으로 떠올려보는 것이다.
- 75p

당신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도 괜찮다.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집에서 자랐다고 한들, 그것은 결코 당신의 부족함이나 결핍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미디어의 허상과 당신의 삶을 견주며 가뜩이나 힘든 삶에 절망할 거리를 하나 더 더하지 않길 바란다.
- 81p

애착의 대상은 어째서 이렇게 남자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들만 있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껏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태도는 자립한 개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 기준이 한층 더 엄격하게 적용된 대상이 어른, 그리고 남자였다. 그러나 성적소수자가 용인되는 분위기와 더불어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더 이상 남자가 남자답지 않아도 된다.
그다음으로 깨뜨려야 할 압박은 ‘어른스러움’이어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자립을 중시하는 환경 속에 자란 사람은 타인과 건강한 애착 관계를 만드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거기에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더해지면 더더욱 회피적인 성향이 되고, 비자발적으로 외로운 삶을 살아가기 쉽다.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
- 85p

혈연주의는 상당히 배타적이다. 혈연이 가장 중요한 세상에서는 친부모가 아니면 아이를 좀처럼 접할 수가 없다. 아이와 만나려면 자신이 낳은 아이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상식이 되었다. 모 아니면 도다. ‘도’일 때도 싫지만 ‘모’일 때도 너무 책임이 막중해서 거부감이 든다. 출산율이 매해 더 떨어지는 것도 그 막중한 책임 때문인 듯하다. 그동안 우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혈연을 중시했다. 그러나 묻고 싶다.
핏줄로 이어져서 뭐가 좋은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부부처럼 부모와 자식도 헤어지거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편이 낫다. 같은 핏줄끼리 사이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금 자기 가족을 바라보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 89p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족에 대한 상식은 아마도 화목한 가정 속에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아니, 인간관계에 대한 상식 대부분이 그렇다. 사이좋은 가족이라면 그 상태로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오랫동안 함께 지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기준은 ‘지금까지 사이가 좋았는지 아닌지’다. 그것밖에 없다.
- 95p

누구나 언젠가는 파트너를 잃는다. 자신에게 그날이 언제 올지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누군가와 함께 산다고 해도, 자립심을 잃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잊지 말자. 거리를 두지 않으면 함께 멀리 갈 수 없다.
- 120p

애초에 도망칠 수 없는 곳은 지옥이 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거리를 두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렇게 쉽게 지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충성’보다 ‘자유’에 방점이 찍히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선택은 달라졌다. 한 회사에 충성을 맹세했던 사원이 이직을 하거나 프리랜서를 택한다. 평생의 해로를 꿈꾸었던 사람들이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다. ‘힘들어도 참고 살아야지’라는 해묵은 압박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 123p

성실하고 근면적인 삶의 태도를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국가에 사는 사람일수록,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술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는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성실함도 지나치면 불행해지고, 때때로 죽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대충대충 적당히 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므로 어쩔 수 없다.
- 128p

괴로움으로부터 편안해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아주 당연한 한 가지 방법은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때 의지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길은 극복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물론 포기했으므로 문제는 그대로 존재한다. 아쉬움과 미련이 두고두고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기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좋은 점도 있다. 바로 흠뻑 젖은 사람이 얻는 일종의 강인함이다.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단념한 사람은 강하다. 안 좋은 일이 수없이 거듭된 끝에 도달하는 무외(無畏)의 경지를 나는 오래도록 믿어왔다.
- 131p

당장 화가 솟구치는데 꼭 해야 할 말만 담백하게 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든 이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
‘감정이 앞설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138p

분노는 일단 지나갈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만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만 화를 입지 않는다.
- 138p

인피니티 미러도 SNS도, 안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 세상은 사라지고 점차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려 나로 돌아올 수 있다.
- 147p

‘개인주의’란 자신과 타인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태도를 말한다. 결코 제멋대로 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이기주의다. 진정한 개인주의란 모든 개인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남을 배려하고,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굳건할 때, 건강하고 대등한 관계 맺기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 150p

마지막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이 몇 없는 일본 속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속담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 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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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1-06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계에서 ‘벽‘과 ‘거리‘를 두는 게 개인주의가 심한 것인가?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것은 나와 너를 존중하는 마음이 강한 것이로군요.
음… 큰 깨달음입니다.^^

억울한홍합 2025-01-0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알고 계셨을 것 같은데 알기 쉽게 콕콕 꼬집어 말씀해 주시는 센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람과 서로를 의식하고, 영향을 주고받거나 비교하면서 살아간다. 타인의 지나친 간섭이나 집착 때문에 난처해하기도 하고, 반대로 타인의 언행이 끊임없이 신경 쓰여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행복과 마음의 평화가 강조되는 시대이지만, 아직도 자기 마음보다 주변 사람 시선만 살피느라 주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매 순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존감을 잃어간다.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리를 반드시 끊어내야만 한다. 현명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잃어버린 삶의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

개인주의는 ‘제멋대로’가 아니다

‘개인주의’란 자신과 타인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태도를 말한다. 결코 제멋대로 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이기주의다. 진정한 개인주의란 모든 개인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남을 배려하고,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굳건할 때, 건강하고 대등한 관계 맺기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건전하게 서로 대등한 관계와 한쪽이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는 확연히 다르다. 한 개인으로서 어떻게든 제 역할을 하는 사람끼리라면 어느 정도 의존 관계가 형성되어도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의존한다면 위험하다.

멈춰야 한다. 행동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상대와 확실하게 맞설 줄도 알아야 한다.
어렵다면 마음속으로라도 반복해서 이렇게 말해보자.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상처를 주지?"
타인의 말을 존중하기 전에 당신 자신의 가치를 먼저 존중하라. 당신 앞에서 온갖 잘난 척과 대단한 척을 하는 그가 알고 보면 부족한 것투성이인 나약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적당히 대충 해도 괜찮다

애초에 다수에게 주의를 주는 이유는 지극히 일부 부주의한 사람을 위해서다.

이제 더 이상 경고할 필요 없다 해도 ‘부주의한 사람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뭐라 할 말도 없다. 하지만 이미 걱정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는 날은 오지 않는다. 지나치게 걱정하는 사람의 괴로움은 결국 아무도 헤아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스로 "좀 더 적당히 해도 돼"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좀 더 느긋하게 살아가는 지역이 많다. 특히 따뜻한 지역에서는 개방적인 성격이 많다고 한다.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지역의 여유로운 음악을 들어보는 방법도 좋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이 몇 없는 일본 속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속담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마음의 시력 교정하기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문제를 맞닥뜨려 고민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고민 없는 삶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괴로운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끼리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도 있다.

한 발 물러나 사물을 전망하듯 의식해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우리가 어딘가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관찰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야를 넓힐수록 여유가 생기고, 좁은 시야에 갇혀 빠져들수록 작은 문제에도 무섭게 압도되어버린다는 점을 기억하자.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은 넓은 세계 그 자체, 긴 시간 그 자체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거듭 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느 정도 편안해진다.

절망의 끝에는 웃음이 있다

궁지에 몰렸을 때는 웃음으로 승화할 수밖에 없다. 긴장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른 어딘가에서라도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 지금 고민하는 일은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조금 여유를 갖고 다시 들여다보면 ‘뭐, 별거 아니네’ 싶어질 수 있다.
마음이 긴장된 날들에는 웃음이 가장 강력한 약이 된다. 유튜브 개그 채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인터넷상에 차고 넘친다.
별일 아닌 고민에 짓눌린 나 자신까지, 함께 웃음으로 넘겨버리자.

에필로그

지금의 세상과 다른 세상을 하나 더 만든다면, 그 세상은 반드시 인간에게 친절해야만 한다. 이 세상은 원래 친절하지 않은 곳이므로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것을 굳이 하나 더 만들 필요는 없다. 어딜 가도 비판, 악의, 조롱, 대립이 넘치는 세상에서 마음 편히 기댈 곳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사회 구석구석에 친절한 세상을 만들어나가보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 번이라도 죽음을 떠올려본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얘기다.

이 세상은 잔혹한 곳이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세상의 비정함에 마음이 꺾이기 전에, 이 진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고 이 불친절한 세상에서 우리만큼은 좀 더 친절해지길 바란다. 친절을 베풀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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