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누구나 그렇다는 인생의 물음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마주한 철학자들의 이야기와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이끈 방식과 흐름이 내 인생의 고민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근엄한 그들의 생각 방식이 우리 고민을 자유롭게 풀어볼 기회, 자유롭게 생각해도 될 기회를 열어주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생각을 발판 삼아 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깊이 잠수하여 내 안에서 유영할 수 있는 틈을 찾기를. 나를 위해 숨을 고르고, 깊이 숨 쉬는 시간이기를.

1. 나만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걸까요?
with 에리히 프롬

외로움의 가장 놀라운 점은 ‘침투력’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어떤 상태이든 외로울 수 있거든요. 우리는 여러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생일파티를 하고 있을 때도, 사람을 만날 틈조차 없이 일에 치이며 살 때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외로울 정신도 없는 듯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그 바쁜 와중에도 밀려오는 깊은 헛헛함이 있습니다.
흔히 ‘인간은 누구나 외로우니 별달리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지요. 저명한 철학자들에게도 인간은 본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입니다.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라서 외로울 뿐만 아니라, 너무 막연해서 외롭다고요. 막연해서 불안하고, 불안해서 외로워지는 것이라고요.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오늘 잘 나가다가도 내일 당장 넘어질 수 있거든요. 그나마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인생의 끝, 죽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끝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내게 찾아올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막연한가요.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지금 무엇을 갖고 있든,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든 전혀 안정적이지 않은 게 우리네 인생이지요.

안 그래도 내 인생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 혼자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는데 뭐가 어떻게 될지도 몰라 막연하고 불안하기까지 하다니, 이쯤 되면 외로움은 거의 자연재해급입니다. 딱 짚어 무엇이, 언제 어떻게 되는지를 알면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지만 뭐라 딱 꼬집을 수 없는 게 불안이니,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거든요. 게다가 내 삶이 미리 다 정해지지 않아서, 자유가 있어서 외로운 것이라고 하니 더욱 더 할 말이 없지요.

해결책이 없다니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할 때의 장점은 내가 외로움을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임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나의 외로움 자체를 부정하고 억누르게 되잖아요. 괜히 내가 엄살부리는 것 같고, 이런 감정을 느끼거나 빠져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고요. 그러나 외로움이 누구에게나 인생의 그림자처럼 반드시 따라붙는 것이라면 외로울 때는 그냥 외로워해도 괜찮겠죠. 내 감정 때문에 굳이 나를 탓하지는 말고요.

본래 외롭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누군가가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연결감과 소속감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을 느끼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강렬한 감각에 빠지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느낌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런 활동은 강렬한 만큼 지속 시간이 짧고 건강을 해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업무, 종교, 온라인 커뮤니티 등 자신보다 큰 무엇인가에 소속되려 합니다. 조금 더 온건하고 지속 가능한 일을 찾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방식 역시 건강을 해치는 중독적인 것이 되기 쉽고, 외로움을 단지 회피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냥 잠깐 나를 잊고 지우는 일이죠.

좋은 연결의 방법으로 창작과 사랑을 추천합니다. 창작은 사물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들은 너무 자극적이지도, 일시적이지도 않고 나를 지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활성화하지요.

지독히 외로운 지금의 나에게는 그 어떤 사랑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현재 외로움 때문에 너무 가난한 상태라면,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사랑, 창작, 그 무엇이든 내가 나서서 ‘하는’ 일에 엄두가 나지 않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의외로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힘을 빼고 긴장을 푸는 일이요.

신경을 곤두세우고 읽는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흡수되지는 않습니다. 곧, 책과 내가 연결되지는 않는 것이죠. 무엇인가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빈틈이 있어야 합니다. 외로워서 너무 괴로울 때는 얼른, 한시라도 빨리 이 순간을 넘어서고 싶고, 그래서 빨리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외로움에 쫓기는 마음만 내 안에 가득 차버리죠. 이 외로움을 달래줄 다른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는 중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외로움에만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것과 잘 연결되려면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것과의 연결에 나의 힘을 쏟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죠. 힘을 쓰기는 쓰는데, 다른 것과의 연결을 만드는 ‘활동’이 아니라 외로움에 쫓기며 도망치는 ‘고생’ 중인 셈입니다.

내가 너무 힘이 들 때는 굳이 나로부터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또 다른 감정이, 세계가 당신에게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조금만 긴장을 풀어봅시다

외로움은 이겨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반려감정 같은 것입니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평생 같이 살아가는 거죠. 그러나 우리의 삶에 들어 있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이 외로움만은 아닙니다. 삶이 본래 외로운 것이라 하여도, 삶의 모든 순간이 온통 외로움만으로 칠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요. 기쁨, 놀라움, 즐거움, 애틋함, 감사함, 뒤늦게 찾아드는 깨달음에 대한 수많은 감정들… 삶이라는 캔버스에는 외로움 외에도 다양한 색깔의 감정이 이미 섞여 있습니다. 외로움의 무게에 짓눌려 문득문득 잊곤 하지만요. 다시 말해, 우리는 늘 외로움과 함께 살지만 이따금 외롭지 않은 순간도 있고, 외롭다 하여도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타인과 나, 비교의 중심 잡기
with 프리드리히 헤겔

마음이 조급하고 초조해져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습니다. 나만 이 자리 그대로인 것 같아서요. 처음에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나 동료 등 다른 사람이 나보다 빠르고 능숙하게 잘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저 진득하게 시간을 보내며 쌓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불안해집니다.

나는 한없이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지다 못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은 그사이 앞으로 더 나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꾸만 가슴이 무겁고 막막해집니다. 때로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처럼 두려워지기도 하고요.

비교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말을 자주 본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고요.

비교를 때려치워야 할까요? 하지만 그게 쉬웠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겠죠. 살면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어쩌면 거의 매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항상 비교를 하며 살아갑니다.

비교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닌 거죠. 설령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요.

문제는 비교 자체가 아니라 ‘나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입니다.

우리가 비교 때문에 힘들 때는 자기를 낮추게 될 때입니다. 저 사람보다 못하는, 저 사람보다 느리고 서투른 내가 못난 사람처럼 느껴지고,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그 순간에는 내가 엄청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지면서 나 자신을 좋아하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는 노력을 해도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왜소해 보일수록 내 과제는 더욱 무겁게 느껴지죠. 결국은 그 안에 빠져 나아가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요. 기왕 비교를 할 것이라면, 어차피 비교를 그만둘 수 없다면 나를 자꾸 작게 만드는 비교 말고 나를 더 잘하게 도와주는 비교를 할 수는 없을까요?

나의 자유로운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무엇보다 이 열등감, 초조함, 불안감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나 자신에 대해 의식하는 것,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곧 자기의식입니다. 우리는 자기의식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은 내 선택에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그 사람과 부딪히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의식합니다.

자기의식이 생기면 그 뒤에 바로 따라붙는 것이 있거든요. 바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인정 욕구입니다. ‘자의식이 있다면, 그런 자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 같은 느낌이죠.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인정 욕구는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성취해낸 것에 대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평가할 때도 이 같은 노력과 성취는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노력의 시간과 과정은 본인이 제일 잘 알테니까요.

우리가 남들과 비교하면서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잘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비교 또한 이 같은 인정 욕구와 닿아 있습니다. 이런 인정 욕구를 채우려면 우리는 쉴 수가 없습니다. 매번 이전의 나를 갱신하며 더 나아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매번 지난번의 나보다 나아질 수 있겠어요. 지금 이 상태도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것인데, 더 나아지려면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노력의 결과로써 얻은 성취가 내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잘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하면 삶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서바이벌 오디션이 됩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항상 지금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매번 더 잘하고 더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합니다. 내 성취에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은 아주 잠시뿐입니다. 뭔가를 이루어내더라도 내 마음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의 노력이 지금보다, 그리고 남들보다 나은 결과를 낳지 않으면, 그 노력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항상 초조하고, 항상 불안하겠죠.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 보람도 자부심도 느끼기 어렵고요.

모든 인정 욕구의 토대이기도 한 이 욕구는, 피라미드로 치면 윗단을 놓기 위해 먼저 놓아야 하는 밑받침입니다. 바로 ‘그냥 나’에 대한 인정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이뤄내지 않은 그냥 나, 나 자신에 대한 인정이요.
이러한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수많은 성취를 이루고 그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타인에게 인정받아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성취도, 거기에 들인 노력도, 성취로 이뤄낸 결과물도 나 자체는 아니니까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되어야 하는 평가와 인정은 자연체인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과 긍정입니다.
여기서 인정은 그리 거창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니? 아, 그렇구나~’ 하고 그 상태를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것이 인정입니다.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일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인정입니다. 이것이 충분히 충족될 때, 우리의 토대는 단단해지고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정받을 목표를 세우는 것도, 노력을 하는 것도 나름의 자기의식을 지닌 내가 있지 않으면 시작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자기의식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자기의식을 계속 변화시키고 새롭게 선택할 수 있고, 계속 스스로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갈 힘을 이미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성취가 없이도 이미 인정할, 인정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비교는 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입니다. 나에게 아직 없는 것을 가진 사람,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죠. 그러나 흔들려야 비로소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비교를 하는 주인공도 나, 그 비교 끝에 다시 돌아오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내가 잘하고 싶은 건 나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비교의 중심이 나한테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더라도 결국은 나에게서 시작하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얼마만큼 많이 그리고 얼마만큼 빠르게 성취해야 인정할 만한 나인지를 타인의 관점과 시선에서 출발하고, 다시 타인의 평가로 마무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기의식의 중심에, 그리고 내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이겠죠. 당신의 모든 노력과 비교의 중심에 당신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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