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너와 나의 상처를 대하는 법
with 칼 야스퍼스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상처가 시작되는 까닭은 다양하고, 때로 어떤 상처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 혹은 ‘깊은 괴로움이나 깊은 아픔’으로 불릴 만한 상처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토록 깊은 상처를 껴안고, 그와 씨름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이해하는 일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위로하거나 그를 지지하기보다 오히려 그를 미워하거나 비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다시 나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요.

전문가들은 우울감과 우울증을 구분합니다. 살아가며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꼭 질병의 ‘증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제 저녁을 많이 먹고 체해서 그 뒤로도 며칠 소화불량을 앓으며 고생한 것과 특정한 위장‘병’이 있는 것이 같지 않은 것처럼요. 마음의 상처도 어떤 것은 넘어져 무릎을 쏠리는 정도의 상처이지만 어떤 것은 ‘고통’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붙일 만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워’라는 표현을 잘 쓰지는 않지요. 대신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서 미칠 것 같아’라는 식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그러나 어떤 표현을 쓰든 그 상처에는 우리가 좀처럼 어쩌지 못하는 깊은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고통의 본성 ‘아무도 모른다’

전통적으로는 통증과 고통을 구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요. 통증은 신체의 상처이고 고통은 심리적 상처, 곧 괴로움을 겪는 내적 상태, 마음의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증은 영어 pain과 대응하고, 영어 suffering의 번역어는 고통(괴로움)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몸과 마음의 상처가 이렇게 딱 떨어지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고통’이라는 말 자체에 통증과 괴로움이라는 말이 함께 들어 있는 것처럼요.

고통은 몸의 상처, 마음의 상처로 딱 잘라 나눌 수 없고, 몸과 마음은 함께 영향을 받고 함께 작용합니다. 아픔은 몸과 마음 전체에 걸쳐 있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고통을 고통으로 만드는 핵심은 오직 ‘나만 그렇게 느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표현으로도 이 고통을 타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거나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거죠, 내가 얼마나 그리고 어떤 식으로 이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그러니 공감도, 이해도 좀처럼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고립된 기분을 느낍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니까요. 그러니 아플 뿐만 아니라 깊이 외로워집니다.

더욱 심각한 일은 이 고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거예요. 알 수 있으면 좀 낫지 않겠어요? 어떻게든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희망이 생기니까요.
그런데 그런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통입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도 이해할 수 없고, 그러므로 당사자가 어떤 식으로든 컨트롤 할 수 없으니까 고통입니다. 그래서 나만이 아는 괴로움이면서 동시에 나에게도 너무 낯설고, 정말 모르겠고, 그래서 지금 내가 겪는 일에 대해 어떤 긍정적인 반응, 예를 들면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래도 희망을 품는 일 같은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고통을 겪는다는 일의 정체입니다.

고통이 데리고 오는 친구

불행은 혼자만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도 친구들을 데리고 옵니다. 죄책감과 비난, 고립감, 무력감이라는 이름의 친구들이지요. 처음에 사람들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안쓰러워하고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비난의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거든요. 내가 위로해줘도 바뀌는 건 없는 것 같고요.
게다가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은 이전과는 같은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가벼운 인사조차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웃음이 잘 나오지 않고,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거나 인간관계에 꼭 필요한 행동을 하는 것조차 어렵게 느끼게 됩니다.

친밀한 사이라면 이런 일이 더욱 괴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관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배려나 기쁨의 순간을 느끼기는 어려운데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고통을 겪는 당사자는 더욱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 때문에 상대방까지 힘들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자기 자신이 고통과 고통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특징을 야기하는 원인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지금이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그 도무지 알 수 없는 고통, 아무리 애를 써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나 죄책감은 내가 ‘한계 상황’에 놓여 있다는 신호입니다. 한계 상황이란 지금까지 살아오던 것처럼 흘러가는 것이 불가능할 때, 이 상황을 내치거나 제거하는 일이 불가능할 때, 그러므로 이 상황마저 다시 나의 삶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과거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과거와 지금 이 막다른 곳에 몰린 듯한 느낌마저 모두 나라는 사람, 나의 인생 안에 속한다는 것을 결국은 받아들이고 소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우리 삶에서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것이며, 고통을 겪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결실은 ‘살아남는’ 일입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고, 살아남을 때 비록 우리가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한계선은 변화하게 됩니다.

내가 미처 돌보지 못하는 내 전체적인 상황과 내 삶에서 고통이 아닌 다른 순간들을 바라보면서 이 시간을 통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방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 힘으로 힘들 때는 반드시 타인, 그것도 그런 역할을 하도록 정해진 전문가에게 찾아가는 일입니다.

고통이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지 않도록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일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비난하고 나마저 같이 무너져, 관계의 든든한 축을 허물지 않을 만큼의 거리요. 고통이 우리의 관계를 전부 삼키지 않도록 나의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약간의 간격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마음에 감당하지 못할 일을 무리하게 도맡으려 한다면 상대가 미워지고 싫어지기 쉽거든요. 깨지지 않는 바위를 계속 두드리는 계란이 되면 무기력함과 좌절감을 느끼게 되니까요.

상대를 위해서라도 상대에게 마음을 쓰는 나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마세요. 내가 지쳐버리면 나중에 그 사람을 위해 정말 힘을 내야 할 때 손 하나 까딱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고통과의 동거는 어쩌면 장기 레이스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너무 애써서 무엇인가를 하려 하지 말고 감당할 수 있는 한에서 평범하게 곁에 있어주세요. 먹고 마시고 걷고 햇볕을 쐬고…. 상대가 잊고 있을 작고 사소한, 그러나 가장 필요한 일상의 순간을 함께하면서요.

6. 완벽주의와 번아웃
with 도가 철학

실제로 우리 사회는 몸이 부서지게 노력하는 것을 당연한 삶의 스펙처럼 요구하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몰아붙여 노력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지 않을 때는 자신이 제대로,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노력의 끝은 번아웃?

세계보건기구 WHO는 2019년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을 만성적 직장스트레스 증후군으로 규정했습니다. 의학적 질병까지는 아니지만 건강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증상이라는 것인데요. 번아웃 증후군은 소위 ‘하얗게 불태운 후’의 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겪게 되는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피로 상태로서 의욕이 떨어지고 공감 능력이 저하되며, 부정적 사고는 강화됩니다. 그러니 성격도 평소 자신의 모습과 달라지고, 증상이 심화되면 점차 모든 것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고 하네요. 처음의 스트레스 요인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싫어지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지는 것이죠. 친밀했던 인간관계에 소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밀레니얼 세대는 앞선 세대에 비해 더 어릴 적부터, 높은 확률로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단체로 ‘투 머치too much 노력 증후군’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표현도 그런 생각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노력에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요.

노력에도 안전벨트가 필요해

노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노력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은 노력을 북돋는 약이기도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무척 오만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나만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거든요. 그러나 하나의 일이 성취되기까지는 많은 조건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나의 노력은 일이 성공하기 위한 무수한 조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노력을 통해 목표한 것을 반드시 얻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고 노력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런 만큼 노력에 한계선을 긋기 어려워집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노력을 강조하는 태도는 종종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조건을 가리기 위한 위장 장치가 됩니다.

노력의 재료인 나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휴식 없이 일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사실 기계도 무조건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계가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컴퓨터가 많은 곳은 컴퓨터의 정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온도와 습도를 조절합니다. 컴퓨터를 끌 때에도 강제로 종료하면 좋지 않습니다. 적절한 과정을 밟아 전원을 꺼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쉼 없이 끝없는 노력을 할 수는 없고, 노력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조건을 참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력의 적정치는 그 사람의 상황, 상태,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나 자신의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 고비를 넘어가는 과정이어서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지쳐서 잠깐 쉬는 게 좋겠다고 나 자신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는 일은 어렵거든요.

무위, 무리하지 않는 노력

‘무위’는 사실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위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그 반대말인 ‘유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유위有爲란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며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 일을 아예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도가의 무위 사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거나 노력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존재가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려는 노력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누구라도 노력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곧, 유위는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를 지우며 다른 것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위는 내 삶이 아닌 것에 ‘억지로,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노력이 단지 수고로운 게 아니라 괴로워지는 순간은 대개 내가 나와 멀어지는 일과 맞닿아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뜯어고치려 하기

세상에는 내가 선택할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조건이 있습니다.

동그라미가 네모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네모가 잘난 척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요. 장자는 그저 저마다 자신의 모습대로 살 뿐이며, 그 자신의 모습대로 충실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은 일견 대단한 노력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부정하는 일과도 닿아 있습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삶을 만족스럽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무언가보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을 바꾸려고 무리하게 노력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계속 바뀌지 않는 것에는 무력감을 느끼기 쉽거든요.

좋아하는 일이 싫어질 정도로 노력하기

시간이 흐르며 상황이 바뀌고 나의 신체가 변하고 감정이 변하듯이, 내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던 것, 내가 만족했던 상태 또한 변할 수 있습니다. 기쁨도 언제까지 영원할 수는 없어요. 사랑이 변하듯, 꿈도 변하고 들일 수 있는 노력의 모습이나 정도도 변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예전에 했던 만큼으로 유지하고 싶거나 혹은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을 거예요. 그 마음은 나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싫어질 정도로 노력하지는 않아도 됩니다.

좋아하는 일이 싫어지고 무서워진다는 것은 지금 그만큼의 여력이 되지 않는 나의 삶을 억눌러 끼워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나로 살기 위한 노력인가? 물어보기

그럴 때는 그 신호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한동안 안 하고 좀 쉬는 거죠.

그러나 이미 번아웃 상태가 되어버렸고 바로 그만둘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자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하니까 아마 그만두라고 할 것 같아요. 장자에게 내 삶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꼭 ‘해야 하는’ 것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쉽게 그만두기 어려운 현대인의 입장에서 타협하자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예전에 하던 것과는 다르게요. 7시간 하던 것을 2시간 할 수 있고, 열 번 하던 것을 한 번 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나 잡다한 고민과는 거리를 두고 바로 눈앞의 아주 사소한 일들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밥을 먹고, 햇빛을 보고, 산책을 하고, 계절과 함께 바뀌는 색을 알아차리는 것들이요. 여행을 가도 좋아요. 싫은데 억지로 ‘꼭’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놓아버리는 것도 너무 싫으면 그때는 그냥 ‘느슨하게’ 있으면 됩니다.

즐길 수 없을 때, 너무 힘들 때는 그저 버티는 것으로도 좋습니다. 내가 지금 즐기지 못하고 그저 버틴다고 해서 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길을 간다고 해서 내가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변화하는 나를 느끼고 이해하고 사이좋게 같이 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하나, 다른 방식의 노력은 노력이 아닌가? 둘, 이것이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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