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꿈과 현실, 타협이 될까요? with 프리드리히 니체
시작하기 전에도, 하고 있는 중에도, 그만 접으려 할 때도 고민되는 것이 꿈입니다.
고민할 새 없이 덥석 붙들게 되고, 엄청나게 고민하고, 도무지 쉬운 길이 아닌 것 같고 힘들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드는 것. 이제는 도무지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껴도 그만두기에는 마음이 참 그렇고, 지난 지 한참이 되었어도 두고두고 생각나기도 하는 것이요. 아니, 이렇게까지 어려울(좋을) 일이야, 막상 뛰어들고 나면 상상했던 것과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것까지도요.
사회는 빨리 꿈을 정해서 그것만 보고 달려가기를 요구합니다. 꾸어준 돈 재촉하듯 빨리 정하라고 닦달해서 ‘꿈’이라 부르는 건가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헛꿈 꾸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핀잔을 들을 때도 있거든요. 막상 꿈이 없다고 대답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미묘한 반응이 돌아옵니다. 아, 어쩌란 말인가, 세상이 허락하는 꿈이 따로 있나 싶어요.
그렇게 밀어붙이지 않아도 꿈꾸는 것은 원래 쉽지 않고 많은 에너지를 요합니다. 남들과 비슷하면 비슷한 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 그래요. 경쟁률이나 시장성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꿈이란 것이 지금 없는 것, 아직 없는 것을 그려내어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엄청난 상상력을 요합니다.
어디 꿈을 갖고, 꿈을 꾸는 일만 어렵겠어요. 꿈을 좇는 일도 어렵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꿈을 좇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는 대로 똑같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을 쏟아야 하는지 역시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처지에 따라서는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애초부터 내가 내 주제에 맞지 않는 허황된 꿈,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것은 아닌지 내 판단력 자체가 의심스러울 때도 있고요.
반대로 이렇게 쉽지 않은 현실이야말로 나를 더 꿈꾸게 밀어붙이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을 붙들었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조차 내가 충분히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현실에는 가깝고 구체적인 비교 대상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의 부족함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대로만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다시 꿈을 꾸고 싶어지고요. 나는 그냥 숨만 붙어 있는 채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하면서 이 현실을 살아가고 싶으니까요.
세상을 알아갈수록 나를 잃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점차 내 뜻만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과 조건에 나를 맞추는 법도 배워갑니다. 좋게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로 떵떵거리며 살다가 조금씩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조금씩 더 겸손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더 많이 알아 더 겸손해진 내 모습이 때로는 내가 꿈꾸고 좋아하던 나와는 너무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꿈을 접고 현실을 택하는 일을 ‘현실과 타협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이 본래 얽혀 있다고 생각하면 사실 꿈과 현실과의 타협은 무척 좋은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죠. 타협은 상대의 뜻만을 쫓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원하는 것을 조정하고 맞춰간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니까 문제는 타협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그 타협이야말로 어려운 일이고요.
어느 쪽에 더 끌리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실제로 타협하지 못하는 것은 꿈과 현실이 아니라 ‘나와 나 자신의 마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의 내 모습에 그대로 만족하기는 어렵고, 꿈을 좇기에는 두려운, 이 두 가지 상황의 공통점은 ‘내가 나 자신을 긍정하기 어렵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어느 쪽이든 나를 좋아할 수 없는 거예요.
니체는 19세기의 철학자로, ‘신은 죽었다’ 같은 발언과 함께 전통적인 서양철학에 전면적 반기를 든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니체가 신이 죽었다는 말로 주장하고자 한 것은 신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가치가 무너진 시대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시대적인 급변으로 인해 지난날의 가치가 구식이 되면서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원래부터 합당하지 않은 것이 합당한 척, 모두에게 해당할 수 없는 것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척했기 때문이지요.
이 순간 우선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이미 자리 잡은 ‘어떠한 기준’이고 그 기준에 따라 누군가를 ‘평가하는 공식’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 기준에 따라 낮게 평가된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면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해도 마음 편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는 사람, 평생을 타협하며 맞춰가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 걸요. 조금만 체해도 하루 종일 속이 불편한데,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체한 상태라면 얼마나 고되겠어요.
나 자신으로 사는 첫 번째 방식, ‘어쩌라고’ 마인드 갖기
기존의 유럽 정신사를 전면 비판한 니체처럼 기존의 기준, 조건을 내가 꼭 그럴 법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기준이나 평가에 대한 단 한 번의 반발이 어려워서만은 아니고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것이 현명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치를 다 치워버리면 사실 평범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당혹감과 혼란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방식, ‘원하지 않았다’에서 시작하기
어떤 기준이든 평가든 꿀떡 삼켜서 소화하는 나로 움직이는 방향이요. 아까는 ‘그 기준이 과연 그렇게나 합당하여 변할 수 없는 것일까? 세상에 그런 기준이나 가치밖에 없을까?’라며 들이대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아 그래, 내가 지금 그런 상태구나’ 하고 허허로이 끌어안는 방식이죠.
자기긍정왕의 최고 단계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마저도 자기가 원한 것으로 포용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뜻대로 살아도 결과마저 자기 뜻대로 완벽하게 맞추어 통제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더욱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시간이 이미 흘러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때로 깊은 후회에 치명상을 입는 것은, 이제는 깨닫고 반성하고 바뀌게 되었어도 그때 그 일을 되돌리거나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니체는 그마저도 ‘오, 그래. 내가 원한 거야’라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초인은 장애물을 전부 부술 수 있는 수퍼히어로 같은 존재가 아니라 어찌 되었든 나의 삶, 나의 매 순간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게 되는 순간을 계속해서 넘어서기 때문에 ‘초超’인이지요. 그래서 니체에게 최고 단계의 초인은 가치에 저항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만나도 놀이로 만드는 어린아이처럼, 사건, 사고에도 ‘이런 게 여행의 참맛이지’라고 생각하는 여행객처럼 삶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짜 두려운 것은 타인의 기준이나 평가가 아니라, 그런 기준에 따라 나의 지나온 시간을 전부 평가절하하는 나 자신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상적인 타협점을 찾는 것도, 나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나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선택 혹은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마주하는 일입니다.
4. 시간이 갈수록 나는 약해질까요? with 주디스 버틀러
역설적으로 이제야 알게 된 것은 어른이라고 다른 ‘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변하는 것, 아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머물러 있는 것이 점차 늘어나 쌓이는 일’이었습니다.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내가 되는 것, 혹은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가 되는 것, 함께 변화할 수 없는 내가 되는 일이요.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나이 먹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나 생각은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 있는데, 나머지 것들은 변해가는 것이죠.
결국은 마음마저 변하는 거예요. 단지 몸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꿈도 상상력도 모든 것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이 그 약함의 절정도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전조이고, 어쩌면 일시적인 피로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약함, 과거‘처럼’ 할 수 없음은 나에게서 점차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오히려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영영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고, 나의 몸도 생각도, 내가 맞이하는 삶의 과제와 그 의미도 계속 변화할 텐데 나만이 변하지 않으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태도라면 더욱 더 힘들 수밖에 없겠죠. 흐름을 따라가는 일보다 흐름을 거스르는 일에는 더 많은 노고가 필요하니까요. 게다가 변화를 통해서만 얻게 되는 깨우침도 있고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조건 강한 것이 아니고, 할 수 없는 것이 무조건 약한 것은 아닙니다.
사회가 장애라고 규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는 구조나 기능상의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환경이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많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약해짐, 무력해짐 등이 우리를 구성하는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취약한 존재입니다.
‘강한 인간’은 사실이라기보다 ‘우리의 바람을 투영하여 조각한 이상’입니다. 자신의 일을 알아서 척척 스스로 다 잘해낼 수 있다는 ‘독립적’ 인간관 역시 사회가 만들어 주입하는 환영이고요. 독립적으로 살아야 하고,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도움을 얻으면 안 되고 그러므로 의존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배우잖아요. 이런 생각은 서구근대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실상을 살펴보면 우리는 늘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독립적이고 강한 인간이 아니라, 상처받기 쉽고 약하여 반드시 다른 것들의 지지와 도움이 필요한 의존적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서로가, 사회가 필요한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서로에게 의존함으로써만 배우고 익히며 해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약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약한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당신이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어떤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 능력을 사회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주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있어서는 ‘강한 인간’이란 개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떤 조건과 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어야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나의 약함을 포용하기, 변하지 않는 것과 함께
하지만 ‘약한 것이 나쁘지 않다’, ‘인간은 늘 약하고 할 수 있음과 없음은 상대적이다’라는 사실을 알아도 그 사실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수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약함을 순순히 인정하고 포용하는 방법을 우리는 배워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아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덜 약해질까, 느리게 약해질까, 다시 강해질까?라는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할 수 없음과 할 수 있음을 오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약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인 듯합니다. 무엇보다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고요. 조건이 달라져서 다른 방식의 상호의존과 도움을 요청하는 상태가 되어가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취약함, 나약함, 무력함, 잘하지 못함, 잘할 수 없음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미 우리 곁에 바싹 붙어 따라다니는데 우리가 그것을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나이를 먹어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로 약해지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나의 서투름과 약함을 점차 더 많이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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