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고 나는 나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람과 서로를 의식하고, 영향을 주고받거나 비교하면서 살아간다. 타인의 지나친 간섭이나 집착 때문에 난처해하기도 하고, 반대로 타인의 언행이 끊임없이 신경 쓰여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행복과 마음의 평화가 강조되는 시대이지만, 아직도 자기 마음보다 주변 사람 시선만 살피느라 주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매 순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존감을 잃어간다.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리를 반드시 끊어내야만 한다. 현명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잃어버린 삶의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

개인주의는 ‘제멋대로’가 아니다

‘개인주의’란 자신과 타인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태도를 말한다. 결코 제멋대로 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이기주의다. 진정한 개인주의란 모든 개인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남을 배려하고,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굳건할 때, 건강하고 대등한 관계 맺기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건전하게 서로 대등한 관계와 한쪽이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는 확연히 다르다. 한 개인으로서 어떻게든 제 역할을 하는 사람끼리라면 어느 정도 의존 관계가 형성되어도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의존한다면 위험하다.

멈춰야 한다. 행동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상대와 확실하게 맞설 줄도 알아야 한다.
어렵다면 마음속으로라도 반복해서 이렇게 말해보자.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상처를 주지?"
타인의 말을 존중하기 전에 당신 자신의 가치를 먼저 존중하라. 당신 앞에서 온갖 잘난 척과 대단한 척을 하는 그가 알고 보면 부족한 것투성이인 나약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적당히 대충 해도 괜찮다

애초에 다수에게 주의를 주는 이유는 지극히 일부 부주의한 사람을 위해서다.

이제 더 이상 경고할 필요 없다 해도 ‘부주의한 사람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뭐라 할 말도 없다. 하지만 이미 걱정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는 날은 오지 않는다. 지나치게 걱정하는 사람의 괴로움은 결국 아무도 헤아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스로 "좀 더 적당히 해도 돼"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좀 더 느긋하게 살아가는 지역이 많다. 특히 따뜻한 지역에서는 개방적인 성격이 많다고 한다.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지역의 여유로운 음악을 들어보는 방법도 좋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이 몇 없는 일본 속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속담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마음의 시력 교정하기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문제를 맞닥뜨려 고민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고민 없는 삶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괴로운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끼리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도 있다.

한 발 물러나 사물을 전망하듯 의식해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우리가 어딘가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관찰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야를 넓힐수록 여유가 생기고, 좁은 시야에 갇혀 빠져들수록 작은 문제에도 무섭게 압도되어버린다는 점을 기억하자.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은 넓은 세계 그 자체, 긴 시간 그 자체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거듭 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느 정도 편안해진다.

절망의 끝에는 웃음이 있다

궁지에 몰렸을 때는 웃음으로 승화할 수밖에 없다. 긴장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른 어딘가에서라도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 지금 고민하는 일은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조금 여유를 갖고 다시 들여다보면 ‘뭐, 별거 아니네’ 싶어질 수 있다.
마음이 긴장된 날들에는 웃음이 가장 강력한 약이 된다. 유튜브 개그 채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인터넷상에 차고 넘친다.
별일 아닌 고민에 짓눌린 나 자신까지, 함께 웃음으로 넘겨버리자.

에필로그

지금의 세상과 다른 세상을 하나 더 만든다면, 그 세상은 반드시 인간에게 친절해야만 한다. 이 세상은 원래 친절하지 않은 곳이므로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것을 굳이 하나 더 만들 필요는 없다. 어딜 가도 비판, 악의, 조롱, 대립이 넘치는 세상에서 마음 편히 기댈 곳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사회 구석구석에 친절한 세상을 만들어나가보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 번이라도 죽음을 떠올려본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얘기다.

이 세상은 잔혹한 곳이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세상의 비정함에 마음이 꺾이기 전에, 이 진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고 이 불친절한 세상에서 우리만큼은 좀 더 친절해지길 바란다. 친절을 베풀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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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지친다

나는 언제나 문제가 있으면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똑바로 마주하고 해결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인간관계를 비롯한 문제를 하나하나 늘어놓고 해결책을 생각했다. 문제가 눈앞에 있는데 보고도 못 본 척 도망치는 태도를 경멸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거짓말이나 가식을 유독 싫어했다. 실속 없이 남이 듣기에만 좋은 말을 하는 것도 ‘도망치는 짓’이라고 여겼다. 마음에 없는 인사치레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것도 가식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꺼렸다. 그렇게 점차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교감의 폭이 적어지다 보니 대화가 재밌기는커녕 긴장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황이 더 나빠지면 한층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극복해야 한다며 힘을 쏟았다.

그때의 고지식하고 진지한 태도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관계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을 쓰고 있는 만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완전히 버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좀 더 편안해지는 방법, 괴로움으로부터 빠르게 도망치는 법을 추천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도 이제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평생 잊지 못할 괴로움을 느끼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성실함을 강요하는 사회

‘일본인은 성실하다’라는 말은 해외에서도 국내에서도 많이 들어왔다. 성실하다는 말 안에는 집중력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뿌리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마 일본의 교육이나 사회적 풍토와도 관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는 성실함이 너무 많이 주입되었다. 내가 십 대였던 무렵에는 그런 주입식 교육이 더욱 성행했다.

이처럼 성실하고 근면적인 삶의 태도를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국가에 사는 사람일수록,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술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는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성실함도 지나치면 불행해지고, 때때로 죽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대충대충 적당히 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므로 어쩔 수 없다.

포기하면 우울증이 낫는다

어떤 일을 지금보다 더 잘하려고 발버둥 치면 그 과정 내내 마음이 괴롭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괴로움은 필요하다. 성실한 사람일수록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괴로움을 견디며 극복하려고 한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문제는 모든 일의 결과가 노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목표와 점점 더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버둥 치는 건 정신 건강을 생각하면 그리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이미 조금씩 가슴 한구석에서는 포기하려는 마음이 자라나고, 점점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것이다. 그럴 때 절대 포기는 없다는 고집을 계속해서 세우면 양가적인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괴로움만 커진다.

괴로움으로부터 편안해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아주 당연한 한 가지 방법은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때 의지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길은 극복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물론 포기했으므로 문제는 그대로 존재한다. 아쉬움과 미련이 두고두고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기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좋은 점도 있다. 바로 흠뻑 젖은 사람이 얻는 일종의 강인함이다.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단념한 사람은 강하다. 안 좋은 일이 수없이 거듭된 끝에 도달하는 무외(無畏)의 경지를 나는 오래도록 믿어왔다.

죽음이라는 단념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을 상실하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손쓸 방법이 없다. 반면 마음의 평화를 위해 포기할 것은 얼마든지 있다.

분노는 적어도 하룻밤 이상 재운다

분노에 사로잡히면 ‘곧바로 반박하고 싶다’라는 격한 충동이 올라오기 쉽다. 그럴 때일수록 기다려야 한다.
흔히 6초 동안 기다리라고 말하지만, 그건 직접 대화하고 있을 때에 해당된다. 6초로는 너무 짧다. 상대방에게 어떻게 대응할지는 적어도 하룻밤 자고 나서 정하는 것이 낫다. ‘내일 아침이 되기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라고 단호하게 결론지어야 한다.

6초, 이성이 작동하기까지의 시간

화난 직후가 가장 위험하다

신변의 위험에 처한 상황이라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맞다. 또 상대방이 명백하게 잘못된 언행을 일삼을 때도 무조건 참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느끼는 분노의 대부분은 그리 긴급 상황도 아니고, 반론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상황도 많다. 혹 반론이 필요할 때라 해도 어느 정도는 분노를 억눌러야만 현명한 처신이 가능하다.

당장 화가 솟구치는데 꼭 해야 할 말만 담백하게 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든 이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
‘감정이 앞설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분노는 일단 지나갈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만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만 화를 입지 않는다.

분노에도 게으름을 피우자

평상시의 게으름 피우던 모습을 떠올리자.
‘그동안 내가 하기로 맘먹었던 모든 일을 빠뜨리지 않고 했던가?’
‘이 일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할 만큼 내 인생에서 중차대한 일인가?’
아니라면 귀찮은 일은 미루자. ‘무례한 사람은 저 사람이며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내버려두는 연습을 하자. 분노에 관한 한, 게으름은 훌륭한 장점이 된다.

싫어하면서도 계속 보는 심리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일수록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싫어하는 대상을 신경 쓰는 일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무서운 것을 보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가도 다시 손을 내리고 힐끔거리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무섭거나 거부감이 드는 대상을 계속 들여다보는 심리 기저엔 ‘좀 더 알고 싶은 욕구’가 깔려 있다. 싫어하는 사람을 계속 관찰하고 그와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는 심리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짧고 불안은 길다

당신이 진심으로 지금 당장 변해보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하지만 행복은 온 마음을 다해야만 붙잡을 수 있다. 딱히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최악의 상태로 10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그 정도로 인생은 무서운 법이다.

내 손 밖의 일에서 생각을 떼어내자

안 좋은 상황을 계속 고민해봤자 좋아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상황이 호전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어느 쪽이든 큰 차이는 없다. 무언가에 무섭게 집착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신경 썼을까’ 생각한 경험이 누구나 한두 번쯤 있을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시야를 먼 미래에 두고 지금을 바라보자.

누가 뭘 했는지에 신경을 끈다

평소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누가 뭘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상당히 강력한 화제가 된다. 몇 사람이 대화하는 자리에서 주의를 끌고 싶으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하면 된다. 우리는 주변 지인이나 유명인처럼 특정한 인물에 대한 화제에 이상할 정도로 빠져든다. SNS도 결국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와 주말에 어디에 놀러 갔는지, 누구는 최근 어디에 빠져 있는지, 끝도 없이 SNS를 보며 관찰하고 신경 쓴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경험과 언행을 주제 삼아 이야기하다 보면 다음 두 가지 심리로 이어지기 쉽다. 부러워하거나, 깔보거나. 타인에 대한 정보를 쉽게 입에 올리고 쉽게 판단할수록 열등감이나 혐오감도 쉽게 생겨난다는 의미다. 인스타그램을 활발히 사용하는 영국과 미국의 십 대 소녀 세 명 중 한 명은 체형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걱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타인과의 잦은 비교로 인해 열등감이 싹튼 것이다.

시선에 갇힐수록 공허해진다

인피니티 미러도 SNS도, 안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 세상은 사라지고 점차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려 나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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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 교제가 혼자보다 괴롭다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면 나중에 큰 후회가 남지 않는 것 같다. 혹시 후회스러운 경험을 하더라도 본인의 선택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감당이 된다. 문제는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사회적인 시선이나 편견 때문에 억지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데서 생긴다.
‘모두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강요하는 일은 반드시 의심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싸우지 않는 상대를 고른다

결혼할 상대를 고르는 기준으로 딱 하나를 정해야 한다면 뭘 택하겠는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재정 상태, 능력, 외모, 가치관 등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준이 저마다 있겠지만, 내가 첫 번째로 삼는 기준은 조금 다르다. 특히 멘탈이 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기준이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상대’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싫은 사람은 나와 한창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그 전에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는 상관없다. 당신에게 어떻게 잘해주었든, 다툼이 반복해서 생긴다면 더 이상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가까이에서 당신에게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단 호의로 대할 것

인간관계의 법칙에 대한 글을 쓰게 된 이상 꼭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상대에게 호의로 대하면 호의가 돌아오고, 악의로 대하면 악의가 돌아온다. 그러니까 사람을 대할 때는 우선 호의로 대해야 한다.’

단순한 법칙이지만, 이걸 고려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다툼을 쉽게 만든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면, 당신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상대에게 어디까지 호의로 대해야 할지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상대가 악의로 대하는가, 아닌가를 기준 삼으면 된다. 악의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호의로 답례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인간의 존엄은 이렇게 유지된다.

기본적 인권은 몰라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개념은 아이들도 안다. 이 또한 대등의 원리이다.
연쇄 악의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볍게 싸움을 시작하지 말 것. 계기를 만들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할 것. 기본 중의 기본인 이 인간관계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정말로 많다.

‘상호 대등 원칙’에 대한 의식이 희박할수록 자신의 분노나 고집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당연히 싸움도 잘 일어난다. 결혼 상대나 연인은 쉽게 연을 끊기 어려운 관계 중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이런 상대로 싸움이 너무 쉽게 일어나는 사람을 고름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 내밀한 관계뿐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때 역시 이러한 조건을 절대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혼자서 행복한 삶도 충분히 좋다

결혼은 그야말로 ‘가정을 이루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회 전반에 고정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던 시대였다. 그런 인생을 동경하면서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최근 눈에 띄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평생 방황하고 싶다. 방황하면서 여유롭게 행복해지고 싶다. 마음 편히 그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것 같다. 당신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을 오롯이 당신이게 하는 것, 하루를 기쁨으로 채우는 것이 있다면 이미 충분히 충만한 인생이다.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협박

나는 고등학생 때 공부를 잘해서 도쿄대에 들어갔다. 공부뿐 아니라 운동도 제법 잘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너무 잘했던 것이 지나친 인간관계와 과로를 초래해서 마음을 병들게 한 원인이 되었다. 마음의 병은 이후 오래 계속되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로 자리 잡았다.

나답지도 않게 그렇게 열심히 했던 이유가 있다. 어렸을 때 공부와 운동(아니면 동아리 활동)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말을 세뇌당하듯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공부와 운동을 안 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했던 것을 평생 후회하게 되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내 평생의 후회는 사회가 강요하는 무책임한 인생 조언을 지나치게 믿은 것이었다.

결혼과 연애 등 인생의 모든 수순에 이러한 사회적 압력이 존재해왔다. 지금은 많이 느슨해진 듯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분위기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탓에 지나치게 자신을 억제하는 사람도 많다. 사회가 강요하는 인생 조언은 당신을 위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인생의 방식이란 모두에게 딱 맞는 대량생산 기성복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맞춤옷을 지어 입듯이 살아가야 한다.

함께 살아도 거리를 둔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함께 살지만 너무 가까워지지 않았던 것이 동거를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가보면 우리의 생활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부모님은 하루 종일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함께 잠자리에 든다. 마치 두 분이서 하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듯 보인다. 바로 그 부분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애정도 너무 가까우면 민폐가 된다

여기에는 인간관계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진실이 있다. 바로 ‘아무리 애정을 갖고 한 일이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악의로 괴롭히는 것과 같다’라는 사실이다.

관계가 가까울수록 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저 사람이 더 잘되길 원하는 마음도 같이 커지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대로 상대방이 움직인다면 그의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라는 생각이 들면 참견을 하지 않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고 조언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답답함은 더욱 커진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놓는 것이 최선이다. 상대방이 선택한 것이 그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건 그의 몫이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이 관계를 위한 최선이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함께 멀리 갈 수 없다

결혼 생활을 갈등 없이 지속해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태도 중의 하나는, 파트너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파트너를 잃는다. 자신에게 그날이 언제 올지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누군가와 함께 산다고 해도, 자립심을 잃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잊지 말자. 거리를 두지 않으면 함께 멀리 갈 수 없다.

충성보다 자유가 낫다

애초에 도망칠 수 없는 곳은 지옥이 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거리를 두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렇게 쉽게 지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충성’보다 ‘자유’에 방점이 찍히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선택은 달라졌다. 한 회사에 충성을 맹세했던 사원이 이직을 하거나 프리랜서를 택한다. 평생의 해로를 꿈꾸었던 사람들이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다. ‘힘들어도 참고 살아야지’라는 해묵은 압박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로 돌아가는 이별도 괜찮다

더 이상 당신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지 않는 관계라면 헤어져도 괜찮다. 이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평생 헤어지지 않고 산다면 그것대로 훌륭한 일이겠지만, 역시 자연스럽지는 않다.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별을 절대 실패나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던 ‘사람은 가까이 붙어 있을수록 싫어진다’라는 원칙을 떠올려보자. 서로 상처 주는 관계를 오래 끌어서 인생 최악의 괴로운 기억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똑같은 갈등이 계속 반복되는 관계는 남은 생을 위해 하루빨리 정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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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이 하나 더 있다는 구원

인간관계가 어려웠던 어린 시절 내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미션은 집이나 회사, 학교가 내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는 라디오를 즐겨 듣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라디오를 들으러 내 방으로 향했다. 늦은 밤까지 진행자가 선곡한 음악을 들려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는 젊은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야 방송이 전성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진행자가 방송하는 시간이면 가족이 모두 잠든 조용한 시간에 볼륨을 낮춰서 듣고는 했다.

나의 진짜 인생은 이 라디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에 추구해온 것, 표현해온 것은 모두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나에게 집은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라디오는 내가 있을 곳도, 사람도 아니었지만, 또 다른 세상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 나를 살게 했다.

서드 플레이스

‘서드 플레이스thirdplace’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정이 제1의 장소, 회사나 학교가 제2의 장소라면 그와는 다른 곳이 바로 제3의 장소, 서드 플레이스다.

사이좋은 가족이라고 해도 집에만 계속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세상과 접해야 숨이 트이고, 각자의 세상을 넓은 시야로 비교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지킬 수 있다. 서드 플레이스가 없는 세상에서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면,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가족과 평생 떨어져 살아도 괜찮다

가족과 계속 떨어져 살아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이미 오래 떨어져 살았는데 부모의 병간호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고민은 더 깊어진다. 그러나 함께 지낼 때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계속 따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같이 있어서 즐거웠다면 기회가 될 때 다시 함께 살면 된다. 반면 마음이 잘 맞지도 않을뿐더러 위압적이거나 폭력을 계속 휘두르는 사람이 있었다면 물어보고 싶다. 단지 ‘가족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과 다시 가까이에서 지내는 것이 과연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남은 인생에 좋은 일일까?

사이좋은 가족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부모를 봉양하며 같이 산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사이가 나쁜데 병간호 때문에 억지로 같이 살게 된다면 더 큰 불행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족에 대한 상식은 아마도 화목한 가정 속에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아니, 인간관계에 대한 상식 대부분이 그렇다. 사이좋은 가족이라면 그 상태로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오랫동안 함께 지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기준은 ‘지금까지 사이가 좋았는지 아닌지’다.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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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은 자신의 좋은 부분만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전체라고 생각하고 일일이 비교하고 낙담할 필요가 없다.
SNS에 누군가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 올라온다면 이렇게 생각하자.
‘아, 이게 이 사람이 가진 행복의 단면이구나.’
어떤 인생이든 좋은 부분만 잘라내서 보여줄 수 있다. 한없이 고되고 불운한 삶일지라도 말이다. 유년 시절 불행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자란 나도 작정하면 좋은 부분만 편집해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의 형태를 원하지 않는다면 부러워할 것도, 고집할 것도 없이 포기하면 된다. 수시로 마음을 괴롭히는 가족과 지내면서 줄곧 원망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 가족 없는 자유로운 삶도 그 자체로 편해서 좋고, 원한다면 전혀 다른 형태의 가정을 구성할 수도 있다.

가족이든 아니든, 인간은 가까워질수록 애정이 커질 수도 있지만 싫어하는 감정도 그만큼 커지기 쉽다.

마음의 거리는 물리적인 관계를 떠나,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횟수에 비례한다는 얘기다. 이 거리가 가까울수록 ‘싫다’라는 부정적인 감정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반대로 멀어질수록 좋아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무감해진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가족이란 어쩌다 보니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같이 있게 된 특수한 관계일 뿐이다.

평생 자식 없이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2010년 통계 조사에 따르면 남성의 30퍼센트, 여성의 20퍼센트가 이에 해당했다. 그리고 2035년이 되면 남성은 40퍼센트, 여성은 30퍼센트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30~40퍼센트라는 숫자를 보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식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저출생률 국가인데, 대만, 홍콩, 싱가포르도 비슷한 수준이다. 놀라지 말라. 이 지역들은 모두 2018년 전 세계 출생률 워스트 5위에 들었다. 출생률이 낮기로 유명한 일본은 그보다는 조금 높은 저출생률 19위이다. 유럽 선진국과 미국도 하위권에 슬쩍 끼어 있고, 상위 100위 이내에는 개발도상국밖에 없다.
부유한 국가에서는 점차 아이를 낳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아이가 없는 사람은 이제 상당히 많다. 그러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에, ‘자식이 없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라고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것 같다. 행복을 결정하는 건 자녀의 유무가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아는가에 달렸다. 아이 없는 삶이 불안하다면 ‘내가 원하는 행복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한번 적어보기 바란다. 그 기준이 거짓 없고 정확하려면, 사회적 압력과 편견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잔혹한 생물이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지 않으면 얼마든지 남을 괴롭히고 폭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누군가 보고 있는 곳에서는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친구 집단에서도 남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심한 따돌림이 벌어진다. 아이들의 따돌림 문제 전문가도 따돌림의 원인 중 하나로 학교의 폐쇄성을 자주 언급한다.

다른 많은 집단 중에서 가정만큼 쉽게 폐쇄성을 띠는 집단도 없다. 경찰도 가정 내 다툼에는 ‘민사 불개입’이라며 거의 손대지 않는다. 이 또한 폐쇄성을 높이는 원인이다. 가정은 그렇지 않아도 나쁜 일이 발생하기 쉬운 장소다. 가정 내 안전을 지키고 싶다면 무조건 은폐되는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는 좀처럼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가본 적 없는 장소에 가보는 것은 간단하지만, 처음 어떤 집단에 들어가기란 상당히 망설여진다. 하지만 한 번 시도해본 뒤에는 큰 변화를 느낀다.
은둔형 외톨이인 자식을 살해한 전직 고위 관료의 가정도, 그리고 내가 자란 우리 집도, 바깥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면 불행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신의 가족은 좋은 가족인가, 나쁜 가족인가?
쉽사리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가족은 너무나 가까운 존재라, 사회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을 볼 때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힘들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모두 확대 렌즈를 대고 보듯 가깝게 보여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다. 명백하게 나쁜 부모, 나쁜 형제였다고 해도 지나치게 미워하면 도리어 자기만 피곤해질 뿐이다.

마음을 계속 괴롭게 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길 권한다. 한 명, 한 명을 이름으로 떠올려보는 것이다.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부모에게는 길러준 은혜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상당히 흔한 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거리를 둬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에 지나치게 매이면, 누구나 평생 부모와 대등하게 맞설 수 없다.

‘길러준 은혜’는 차치하고, 우선 대등한 개인으로 생각해보자. 상대방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의 경우 ‘부모는 부모 자신을 위해서 나를 키웠다’라는 사고방식이 나의 부모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로잡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상하거나 나쁜 방향이 아니라 제대로, 객관적으로 다시 파악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전부 부모가 잘못 키운 탓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전부 부모 탓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더라도, 가족 내에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인가 있다.
만약 부모 탓이라 해도 부모를 항상 미워해서는 마음이 편안해질 수 없다. 어느 쪽이 되었든 가족과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증오도 지나치게 커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가족과의 원근감을 바로잡으면 편안해질 수 있다.

당신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도 괜찮다.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집에서 자랐다고 한들, 그것은 결코 당신의 부족함이나 결핍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미디어의 허상과 당신의 삶을 견주며 가뜩이나 힘든 삶에 절망할 거리를 하나 더 더하지 않길 바란다.

내가 식물에 빠졌던 때는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땐 ‘남자가 꽃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물며 ‘인형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남자가, 심지어 어른이 꺼내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애착의 대상은 어째서 이렇게 남자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들만 있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껏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태도는 자립한 개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 기준이 한층 더 엄격하게 적용된 대상이 어른, 그리고 남자였다. 그러나 성적소수자가 용인되는 분위기와 더불어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더 이상 남자가 남자답지 않아도 된다.

그다음으로 깨뜨려야 할 압박은 ‘어른스러움’이어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자립을 중시하는 환경 속에 자란 사람은 타인과 건강한 애착 관계를 만드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거기에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더해지면 더더욱 회피적인 성향이 되고, 비자발적으로 외로운 삶을 살아가기 쉽다.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혈연이 아닌 부부가 차라리 마음이 더 잘 맞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유전자가 비슷한 것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한 것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서 특별히 슬퍼할 필요도 없다. 최소한 그 정도로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의외의 사실은, 혈연을 중시하는 풍조가 그리 오래된 관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자식’이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를 일컫도록 법률로 정해졌고, 친부모가 책임을 갖고 아이를 기르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물론 관행으로 양자도 허용되었지만, 혼외자를 포함해 혈연이 아닌 자식은 조금씩 설 곳을 잃어갔다. 즉, ‘친자’나 ‘피를 나눈 형제’ 같은 관계를 중시하게 된 것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 분위기가 한 바퀴 돌아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혈연주의는 상당히 배타적이다. 혈연이 가장 중요한 세상에서는 친부모가 아니면 아이를 좀처럼 접할 수가 없다. 아이와 만나려면 자신이 낳은 아이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상식이 되었다. 모 아니면 도다. ‘도’일 때도 싫지만 ‘모’일 때도 너무 책임이 막중해서 거부감이 든다. 출산율이 매해 더 떨어지는 것도 그 막중한 책임 때문인 듯하다.
그동안 우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혈연을 중시했다. 그러나 묻고 싶다.
핏줄로 이어져서 뭐가 좋은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부부처럼 부모와 자식도 헤어지거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편이 낫다. 같은 핏줄끼리 사이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금 자기 가족을 바라보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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