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지친다

나는 언제나 문제가 있으면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똑바로 마주하고 해결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인간관계를 비롯한 문제를 하나하나 늘어놓고 해결책을 생각했다. 문제가 눈앞에 있는데 보고도 못 본 척 도망치는 태도를 경멸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거짓말이나 가식을 유독 싫어했다. 실속 없이 남이 듣기에만 좋은 말을 하는 것도 ‘도망치는 짓’이라고 여겼다. 마음에 없는 인사치레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것도 가식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꺼렸다. 그렇게 점차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교감의 폭이 적어지다 보니 대화가 재밌기는커녕 긴장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황이 더 나빠지면 한층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극복해야 한다며 힘을 쏟았다.

그때의 고지식하고 진지한 태도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관계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을 쓰고 있는 만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완전히 버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좀 더 편안해지는 방법, 괴로움으로부터 빠르게 도망치는 법을 추천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도 이제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평생 잊지 못할 괴로움을 느끼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성실함을 강요하는 사회

‘일본인은 성실하다’라는 말은 해외에서도 국내에서도 많이 들어왔다. 성실하다는 말 안에는 집중력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뿌리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마 일본의 교육이나 사회적 풍토와도 관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는 성실함이 너무 많이 주입되었다. 내가 십 대였던 무렵에는 그런 주입식 교육이 더욱 성행했다.

이처럼 성실하고 근면적인 삶의 태도를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국가에 사는 사람일수록,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술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는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성실함도 지나치면 불행해지고, 때때로 죽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대충대충 적당히 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므로 어쩔 수 없다.

포기하면 우울증이 낫는다

어떤 일을 지금보다 더 잘하려고 발버둥 치면 그 과정 내내 마음이 괴롭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괴로움은 필요하다. 성실한 사람일수록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괴로움을 견디며 극복하려고 한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문제는 모든 일의 결과가 노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목표와 점점 더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버둥 치는 건 정신 건강을 생각하면 그리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이미 조금씩 가슴 한구석에서는 포기하려는 마음이 자라나고, 점점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것이다. 그럴 때 절대 포기는 없다는 고집을 계속해서 세우면 양가적인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괴로움만 커진다.

괴로움으로부터 편안해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아주 당연한 한 가지 방법은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때 의지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길은 극복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물론 포기했으므로 문제는 그대로 존재한다. 아쉬움과 미련이 두고두고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기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좋은 점도 있다. 바로 흠뻑 젖은 사람이 얻는 일종의 강인함이다.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단념한 사람은 강하다. 안 좋은 일이 수없이 거듭된 끝에 도달하는 무외(無畏)의 경지를 나는 오래도록 믿어왔다.

죽음이라는 단념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을 상실하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손쓸 방법이 없다. 반면 마음의 평화를 위해 포기할 것은 얼마든지 있다.

분노는 적어도 하룻밤 이상 재운다

분노에 사로잡히면 ‘곧바로 반박하고 싶다’라는 격한 충동이 올라오기 쉽다. 그럴 때일수록 기다려야 한다.
흔히 6초 동안 기다리라고 말하지만, 그건 직접 대화하고 있을 때에 해당된다. 6초로는 너무 짧다. 상대방에게 어떻게 대응할지는 적어도 하룻밤 자고 나서 정하는 것이 낫다. ‘내일 아침이 되기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라고 단호하게 결론지어야 한다.

6초, 이성이 작동하기까지의 시간

화난 직후가 가장 위험하다

신변의 위험에 처한 상황이라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맞다. 또 상대방이 명백하게 잘못된 언행을 일삼을 때도 무조건 참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느끼는 분노의 대부분은 그리 긴급 상황도 아니고, 반론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상황도 많다. 혹 반론이 필요할 때라 해도 어느 정도는 분노를 억눌러야만 현명한 처신이 가능하다.

당장 화가 솟구치는데 꼭 해야 할 말만 담백하게 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든 이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
‘감정이 앞설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분노는 일단 지나갈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만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만 화를 입지 않는다.

분노에도 게으름을 피우자

평상시의 게으름 피우던 모습을 떠올리자.
‘그동안 내가 하기로 맘먹었던 모든 일을 빠뜨리지 않고 했던가?’
‘이 일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할 만큼 내 인생에서 중차대한 일인가?’
아니라면 귀찮은 일은 미루자. ‘무례한 사람은 저 사람이며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내버려두는 연습을 하자. 분노에 관한 한, 게으름은 훌륭한 장점이 된다.

싫어하면서도 계속 보는 심리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일수록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싫어하는 대상을 신경 쓰는 일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무서운 것을 보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가도 다시 손을 내리고 힐끔거리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무섭거나 거부감이 드는 대상을 계속 들여다보는 심리 기저엔 ‘좀 더 알고 싶은 욕구’가 깔려 있다. 싫어하는 사람을 계속 관찰하고 그와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는 심리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짧고 불안은 길다

당신이 진심으로 지금 당장 변해보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하지만 행복은 온 마음을 다해야만 붙잡을 수 있다. 딱히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최악의 상태로 10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그 정도로 인생은 무서운 법이다.

내 손 밖의 일에서 생각을 떼어내자

안 좋은 상황을 계속 고민해봤자 좋아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상황이 호전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어느 쪽이든 큰 차이는 없다. 무언가에 무섭게 집착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신경 썼을까’ 생각한 경험이 누구나 한두 번쯤 있을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시야를 먼 미래에 두고 지금을 바라보자.

누가 뭘 했는지에 신경을 끈다

평소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누가 뭘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상당히 강력한 화제가 된다. 몇 사람이 대화하는 자리에서 주의를 끌고 싶으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하면 된다. 우리는 주변 지인이나 유명인처럼 특정한 인물에 대한 화제에 이상할 정도로 빠져든다. SNS도 결국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와 주말에 어디에 놀러 갔는지, 누구는 최근 어디에 빠져 있는지, 끝도 없이 SNS를 보며 관찰하고 신경 쓴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경험과 언행을 주제 삼아 이야기하다 보면 다음 두 가지 심리로 이어지기 쉽다. 부러워하거나, 깔보거나. 타인에 대한 정보를 쉽게 입에 올리고 쉽게 판단할수록 열등감이나 혐오감도 쉽게 생겨난다는 의미다. 인스타그램을 활발히 사용하는 영국과 미국의 십 대 소녀 세 명 중 한 명은 체형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걱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타인과의 잦은 비교로 인해 열등감이 싹튼 것이다.

시선에 갇힐수록 공허해진다

인피니티 미러도 SNS도, 안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 세상은 사라지고 점차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려 나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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