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작가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확률은, 그 사람이 단 한 번의 실패나 실연, 상처를 경험하지 않을 확률만큼이나 희박하다.(7쪽)”고 말한다. 마음이라는 건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마음이 자꾸만 길을 잃을 때, 매일 사막을 건너는 기분일 때 내 삶을 굴러가게 하는 소소하고,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는 듯 하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이토록 흔하지만, 우리가 이를 논하는 것은 터부시된다. 스스로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고, 참고 참다 옥상에 올라 내가 죽으면 슬퍼할 가족들 생각에 눈물만 떨구기도 한다. 들면 안 되는 그런 ‘나쁜‘ 생각이 내 마음에 찾아왔다는 그 사실 자체로 자책하고 버거워한다.
죽고 싶다기보다 죽고 싶을 만큼 버겁고 힘들다고, 삶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그 마음, 그렇지만 죽음은 막막하거 두려운 것이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그 마음들이 모두 이상할 것은 없었다.
기분과 삶의 괴리는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저염식·저당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지만 라면과 초콜릿의 유혹에 무너지기도 하고, 화가 날 때는 시간을 두고 조금 차분히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은 줄 알면서도 벌컥 화를 내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그러뜨리기도 한다. 우리는 기분 내키는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인데, 그럴수록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결과를 마주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왜 이렇게 내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을까‘란 고민이 또 한 번나를 괴롭힌다.
지금 내 마음에서 강렬하게 떠오르는 충동이 기분을 지향하는 덧인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인지를 구분하다 보면, 기분과 행동 사이의 ‘틈‘이 생겨 삶에 이로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본능과 기분이 유발하는 회피 행동보다는 내가 되새기는 삶의 의미,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지향하는 행동이 조금 더 나의 행복과가까울 때가 많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기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끌려ㅠ가는 행동 대신 내가 어떤 하루, 어떤 삶을 원하는지를 떠올려 보고 이를 위한 행동으로 하루를 채워보면 어떨까.기분만을 지향하던 행동들을 하나둘 목적 지향적인 행동들로 바꿔간다면, 원치 않는 것으로 가득한 것 같은 삶에도 내 바람과 닮아가는 것들이 조금씩 늘어가지 않을까.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노력이 틀렸다는 의미는 아니다.오히려 이러한 노력들은 우리에게 충만함과 행복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더 높다. 단지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내 마음을 설득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납득시키기 위해‘ 이를 행할 필요가 없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누군가에게, 특히 스스로의 마음에게 굳이 ‘확인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언어에는 힘이 있다. 하려는 일에 노력한다. 열심히 한다는 이름표를 붙이면 그 일은 지금 하기는 싫지만 미래를 위해 참고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 된다. 하지만 마음은 이성만큼 냉정하고 효율적이지 못하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노력하자, 열심히 하자라는 이성의 독려가 실천으로 잘 이어지지 않는 이유, 조금 이어지다가도 이내 중단되는 이유다. 그런 상황에서우리는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계속 노력하기로 결심했는데‘라며또다시 고뇌한다.그렇게 우리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일이든, 관계든, 개인적 성취는 무언가를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것을 하는 것은 너무 귀찮고, 어렵고, 막막하고, 기약이 없어 실천에 옮기질 못한다. 막연히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열심히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빠져 그저 어제만큼의 하루를 보내게 된다. 아니, 어제만큼의 하루를 보내기도 벅차다.
하고 싶은 것만을 할 수 있는 삶,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속하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 새삼스러운 현실은 10년 전에도, 지난달에도, 어제도 그랬다. 지금 나를 피로하고 지치게 하는 것은, 어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이 아니라 ‘이대로는 안 되는데‘, ‘노력해야 하는데‘라는 강박임을 깨달았다.이를 느낀 이후부터는 내가 하는 일에 ‘노력한다는 이름표‘를 공연히 붙이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냥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을 포함해,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할 만한 이유, 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 일을 하는 데 굳이 노력은 필요하지 않다. 지금의 나 그리고 앞으로의 나에게 가장 좋은 일이므로 기꺼이 할 수 있다.
애써 참거나 노력하지 않고 그냥 한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들을 하며 보내는 하루가 내게는 가장 완벽한 하루다.
슬픔과 행복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는 것이 삶이다. 이런 삶에서 스트레스를 ‘반드시‘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은 슬플 때는 슬퍼서, 기쁠 때는 그 기쁨에 몰입하지 못하게 해서 슬퍼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잡아당긴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삶에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는 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스트레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관점으로 인해 힘겨워하기보다는, 그 마음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보듬어주면 어떨까. 그리고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소소하고 소중한 것들에 마음을 기울여보면 어떨까.굳이 힘든 마음을 지금 당장 해소하려 노력하지 않고, 아끼는 순간들을 슬픔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소모하지 않으며 그 소중함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 그것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자 행복으로 향하는 방법이다. - P206
마음은 일관성을 선호하고 변화를 싫어한다. 우리가 익숙함을 지향하는 것은 일상을 이어나가는 데 시간적, 신체적 에너지와 심리적인 여유라는 자원을 가장 적게 소모하는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어떤 변화를 시작하기 전 그것이 얼마나 내게좋은 것들을 가져다줄지 이상으로 내게 얼마나 손해가 될지를 끊임없이 따진다. 불확실한 이득의 가능성에 비해 명확하게 체감되는 손해를 상상하며 우리는 변화를 회피한다. 오늘 하루, 지금의 내 모습, 나의 삶이 있는 그대로 좋아서라기보다 익숙해서 따르는 것이다.
Just because I choose to do, 간단한 이 한마디는 익숙함만을 지향하는 마음의 함정에서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냥, 내가 하기로 했기 때문에 시도하는Sur son변화로 우리를 인도한다. 어제보다 오늘을 아주 조금 더 사랑할 수있는 힘을 더해주는 주문을, 당신에게도 전하고 싶다.
우리는 늘 판단한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잘 살아가고 있는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지금의 선택이 내게 최선인지. 그러나 대개는 그 판단이 맞는지 바로 알 수 없다.
지금의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니 그저 당장 원하거나, 혹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매진하면 된다. 잘되든 못되든 그것은 자책하고 후회할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수많은 생각들이 희망과 긍정의 가능성을 논리로 압도해서 고민이라면 원래 비관이 ‘매력적인 오답‘임을 기억하면 좋겠다. 앞서 설명했듯이 본디 비관적인 생각이 이성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행복을 지향하기 보다는 ‘적어도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경향이 강하며 이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하다 보면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어떤 선택을 했을 때 나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한다. 오늘의 당신을 웃게 하는 것이 무엇일지 십 년 전의 당신이 상상할 수 없었듯, 먼 훗날의 당신은 지금의 당신이 그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행벅할 것이기 때문이다.
삶을 신중하고 깊이 있게 성찰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다만 그러한 생각에만 매달리면 오히려 삶과 현실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인생의 답을 내리기 위해 과도하게 생각에 몰두하는 것고민이라면, 답이 내려지지 않는 그 불편함을 일상의 일부로 안은 채 ‘그냥‘ 살아보기를 권한다.
PTSD의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에 존재한다. 기억회로에 과거로 통합되지 못한 상처들이 오늘, 지금, 여기에서 지나간 아픔을 재생시킨다. 끝없는 고통의 당사자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회피뿐이다. 외상의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은 두려움을 유발하고 과거의 기억을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일이라면 무엇이든 피하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추억만 앨범에 남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통스럽고 힘든 기억일수록 ‘지나간 경험‘이라는 앨범 속에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을 돌아보고 이를 글로 남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때로는 내가 왜 이렇게 다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용기를 내보면 좋겠다.이미 수많은 사람의 아픔을 치유한, 쓰기가 주는 위로가 당신에게도 닿았으면 좋겠다.쓰는 과정에서 되살아나는 아픔, 공포, 초조함, 눈물이 지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는 오래된 것임을 자각하고, 나는 그때와는 다른 현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껴보기를 바란다. 지난 시간을 바꿀 순 없지만, 늘 마음속에서 도드라져 있던 ‘그때‘의 기억이 다른 기억들처럼 바래질 때의 평온함을 당신이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지우고 싶은 기억만 깨끗이 끄집어내 없애는 방법, 그 일이 없었던 이전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다. 과거의 상처를 지우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그 상처에 연연하는 마음을 먼저 내려놓고 그걸 깨끗이 없앨 방법은 없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잊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지우고 싶은 기억을 한 번 더 떠올리는 것이 우리 마음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초연해지기 힘들다면 적어도 힘듦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미워하지는 말라.‘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마음이다.
오히려 살아가면서 답을 내릴 수 없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함께 하려고 한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행복해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과거에 맛본 만족감을 희미하게 만들고 감흥을 없앤다. 그래서 한때 매력을 느낀 것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는다.
짠맛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면 익숙한 것도 새롭게 보이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모든 것에서 쾌락을 느끼라는 게 아니다. 하나를 정해 여유를 가지고 오랫동안 천천히 음미하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은 소비 행위가 아니다. 욕망은 타깃을 정해 먹고 마시고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음미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없다면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특함과 풍요로움에도 무뎌져 모든 걸 잊고 말 것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계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가진 것을 계속 음미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중에 없어지고 나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깨달아도 소용없다.
인생에서 모든 것이 맛있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신비로움을 일깨워주고, 행복의 비밀이나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속삭여주는 듯한 최고의 순간들은 있다. 바로 그 순간들이 기억에 색채를 더한다. 그 기억의 색채가 흐릿한 잿빛이 되면 우리는 다시 색을 이끌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