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유적•유물/덕수궁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즉위한다. 이때 순종이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고종에게 덕수라는 칭호를 올렸고 ‘덕수 황제가 사시는 곳‘이란 뜻으로 호칭이 바뀐다.

덕수궁은 다른 궁궐과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중화전 같은 전통 건물과 석조전같은 신식 건물이 함께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또 규모가 작고 건물의 배치가 안정적이지 못한 느낌도 드는데, 외세의 침략 속에서 어렵사리 조선을 지키려고 했던 불안한 시대 상황이 건축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듯하다.

오늘날 덕수궁은 대한문을 통해 들어가기 때문에 대부분 대한문을 정문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조선 궁궐의 정문에는 모두 ‘화(化)‘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경희궁은 흥화문이듯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인화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을 마주보는 자리였다고 추정될 뿐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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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때 동기를 강하게 느낀다면 추동력이 생겨 열심히 할 수 있다. 이 경우 동기는 인간을 움직이는 에너지이다. 심리학적으로도 동기는 ‘행동에 에너지를부여하여 목표를 지향하고 또 유지해주는 욕구‘를 의미한다.

즉, 동기는 행동의 ‘이유‘ 이며 초반부터 최종 결과인 행동에 영향을미치는 핵심 ‘원인‘이다.

작동 과정을 들여다보면 동기를 느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기가 만들어낸 정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동기를 랄아챈다. 그 정서가 주는 신호의 양과 방향대로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뇌에서 동기와 정서를 담당하는 영역 모두 정상이어도 이 둘을 연결하는 시냅스synapse에 문제가 발생하면, 동기가 생겨도 그에 따른 생각과 행동을 하지 못한다. 반면 동기를 담당하는 영역이 쉬고 있어도 정서를 담당하는 영역이 활동하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취한다.

토리 히긴스는 인간의 동기를 접근과 회피 두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접근동기는 무언가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하게 하는 반면 회피동기는 무언가 좋지 않은 것에서 벗어나거나 회피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끔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느 동기에 더 들어맞느냐에 따라 내가 가져야 할 동기도 달라진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이 좋은 것을 지향한다면 ‘이 일을 잘해서 즐거워야지‘라고 생각해야 한다. 반면 그 일이 나쁜 것을 막기 위한 일이라면 ‘이 일을 잘해서 바보같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마음먹어야 한다.

세상의 수많은 일이 접근동기로 해야 할 것과 회피동기로 해야 할것이 따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동기와 일이 접근과 회피의 차원에서 서로 궁합이 맞지 않다면 그 결과가 좋아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를 넘어 신기한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간, 언어, 가치관, 문화, 성격 등 인간 사고의 재료나 대상이 되는 수많은 변인과 접근-회피의 두 방향성이 상호적용하면서 끊임없이 다양한 변수들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현재까지의 연구나 관찰 결과만을 종합해보더라도 꽤 많은 사례가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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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 장소/경주

경상북도에 소재한 신라의 수도, 경주만큼 오랫동안 명성을 이어온 곳도 없을 것이다. 신라 천 년의 수도였고, 고려 전기에는 ‘남경‘이라 지칭하며 신성한 땅으로 여겨졌다. 신라가 삼국의 최종 승리자가 됐고, 신라의 후예들이 고려 조정에서 문벌귀족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주 하면 신라를 생각하지만 조선 시대와도 연관이 깊다. 옥산서원, 양동마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조선의 숨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일반인에게는 낯설지만 조선 유학사에서는 조광조와 이황을 잇는 중요한 인물이다.
남산 하면 서울의 목멱산을 떠올리지만 신라에도 남산이 있다. 이곳에는 불교유적이 집중적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에 불교사와 불교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이 필수적으로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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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어 세상을 살면서 직면하는 문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음을 알고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일이 많다. 안타깝게도 실패를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다양한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는 데만 신경쓴다. 기존 지식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실패를 경험했음에도 말이다.
왜 이런 악순환이 반복될까?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보다 꺼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기 때문이다. 꺼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사고를 마치 어떤 실존의 물질처럼 취급할 때 그것을 더 오랫동안 유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일이나 결론에 의견 역시 이렇게 무형이 아닌 유형의 물질처럼 취급돼야 한다. 실제로 이를 위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일종의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리병에 넣어 보관하기도 하고 캡슐에 넣어 전시하기도 한다. 절대로 미신행동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스스로 무형적인 무언가를 유형적인 물질의 형태로 유지하는 자기 자신을 볼 때 실제로 몰입이나 행덩의 뉴지 효과가 더 커진다. 한 번쯤은 이 글을 핑계 삼아 그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00%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부정적 정서를 담당하는뇌 구조물은 안쪽에 긍정적 정서를 담당하는 뇌 구조물은 더 바깥쪽에 분포한다. 이것은 우리가 긍정적 정서를 느끼기 위해서는 후천적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공포나 불안은 우리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과 기쁨은 우리가 그 느낌을 향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얻을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직전의 정서적 흥분은 무관한 현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화를 낼 때도 ‘3분의 법칙‘ 을 말하는 것이다. 화가 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이럴 때는 무조건 타임아웃을 가져야 한다. 3분간 도망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심장 박동수가 3분정도 지나면 일반적으로 평상시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방에게 필요 이상의 폭언이나 무절제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직후의 무관한 일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기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다. 무언가 흥분된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신뢰하기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어떤 결정을 내렸다면 이후 다시 평온한 상태에 와서도 그 결정이 유효한지 다시 봐야 한다.
하지만 평온한 상태에서 결정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정서적으로 나에게 오는 신호들은 그 자체로 중요한 단서들이다. 매우 신뢰할 수 있다. 필자에게 무수히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 ‘언제 직관을 믿고 언제 믿지 말아야 하는지‘ 말이다. 이게 바로 필자의 대답이다.

생생함은 전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다. 우리는 외부 세상이 어떤 양상을 띠고 있건 간에 쉽게 머리에 떠올라 생생한 느낌이면 그것이 정답이고, 더 많으며 혹은 더 올바르다는 생각마저 한다. 한마디로 무조건 정답이라는 것이다. 물론 틀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생생함이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잣대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함정과 오류를 어떻게 극복하고 우리의 생각을 좀 더 질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개별 오류들을 예시하고, 그 오류들에 대한 개별 해결책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나 리처드 탈러의 <넛지>와 같은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그러한 오류를 만들어내는 인간 생각의 기본 속성을 이해하고 그 속성의 작동 원리를 바탕으로 한 단계 한 단계씩 길을 찾아나가는 방식이다. 전자의 방법은 우리 인간의 판단과 의사결정 행태, 이와 관련된 예시를 통해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후자는 한 번의 이해를 통해 다양하고 새로운 문제들에 적용하여 차근차근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방식 모두를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나자신에게 어떤 방식이 더 적합한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어떤 부분이부족한지도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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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 인물/전태일
흔히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전태일 열사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노동 운동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며,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전태일 열사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현재 수준보다 대우받지 못하거나 대우받는 시기가 늦어졌을 것이다.
- 출처 네이버

전태일(1948년~1970년)은 대한민국 최초로 1970년에 분신자살로 노동 문제를 세상에 알린 노동 운동가다.
1960년대는 산업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 문제가 발생하던 때였다. 이촌향도 혐상이 본격화됐고, 많은 이가 청계천 일대의 무허가 판자촌에서 생활했다. 젊은 여성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에 올라왔다가 속임을 당하여 염창동에 끌려가 성매매여성이 되기도 했다. 많은 여성이 공장에 취직했는데 하루 15시간 이상의 고강도노동과 열악하기 그지없는 근무환경으로 큰 고통을 당했다. 1층 건물을 반 층씩두 개로 나눠 작업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허리를 굽혀 일해야 했고, 30분인 점심시간 동안에도 일하는 자리에 앉아 밥을 먹어야 했다. 잔업수당이 있었기 때문에 잠안 오는 약을 복용하며 야근에 매달려야 했고 주말에도 일했다. 작업반장에 의한성추행이나 폭행도 일상이었다. 농촌에서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농업으로 먹고사는 것이 어렵던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이 서울로 몰려들어 힘겨운 생활을 연명했던 것이다. 도시 문제, 빈민 문제, 노동 문제, 여성 문제가 복합적으로 들끓었지만 사회적 인식이 따라오지 못했고 정치권은 관념적인 민주주의 투쟁에만 매몰돼 있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던 전태일은 노동청, 서울시, 청와대 등 공공기관에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렸으나 정부도 노동자들의 편은 아니었다. 결국 전태일은 1970년11월 14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자살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정치권에서 비로소 노동 문제를 인식했다. 비로소 노동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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