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유적•유물/성덕대왕신종

771년 통일신라 때 만든 범종으로, 구리 12만 근을 들여 30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크기가 엄청날 뿐더러 울림의 깊이와 외관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이다. 전설에 따르면 어린아이를 넣어만들어서 ‘에밀레종‘이라 불렸다지만 조사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성덕대왕신종은 아름다운 비천상 문양이 유명하다. 비천상은 천상을 날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면서 꽃을 뿌리는 천사 같은 존재를 형상화한 것으로, 부처님과 불국토의 이상을 그리는 작품에 많이 그려진다. 보통 피리를 부는 모양이 일반적인데 성덕대왕신종은 성덕왕의 명복을 비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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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연도나 사건, 사람 이름을 외워야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참 고통스럽죠. 재미없는 것은 당연하고요. 저는 접근법을 바꿔 과거 그 시대 사람들을 만나보기를 권합니다. 그 시대에 나랑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떤 절망이 있고 어떤 희망이 있었을까? 한번 생각해보는 거예요. 과거의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해보는 거죠.

역사학자 E.H. 카의 유명한 말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미리 벽을 세워버려요. 역사 속 인물은 과거의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름을 외우고 업적을 외우는 게 끝이죠. 하지만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과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이순신은 싸워서 이기는 장수가 아니에요. 이겨놓고 싸우는 장수입니다. 빈틈없이 전략 전술을 세워놓고 백 퍼센트 확신이 들어야 움직이는 완벽주의자예요. 23전 23승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하라는 싸움은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이순신은 조정에서 입수했다는 정보가 거짓임을 눈치채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이순신은 군인이에요.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이순신의 행동은 명령 불복종이 되는 겁니다. 당연히 쫓겨나게 되죠.
이순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이 원균입니다. 원균도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이순신이 왜 그랬는지 말입니다. 일본의 정보가 거짓인 것도 알고 패배도 예감했어요. 심지어 처음에는 이순신처럼 좀 버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칠천량으로 갑니다. 군인이니까 명령을 받았으면 가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일본에 대패합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조선 수군이 완전히 궤멸해요.
원균을 옹호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역사 속 인물의 선택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뜻이죠.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눈앞에 보이는 글자만 읽고 말아요. 죽어 있는 텍스트로 접합니다. 그러지 말고 역사 속에 들어가서 인물들과 만나보면 좋겠어요. 그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보세요. 꿈이 뭐예요? 왜 그런 일을 했어요? 그 선택에 후회는 없나요? 꿈이 이뤄진 것 같나요? 이렇게 물어보고 답을 상상해보는 겁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내 삶에 대입시켜서 답해보는 거죠.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얻지 못했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역사는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공부입니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의 긴 시간 안에 엄청나게 많은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어요. 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절로 가슴이 뜁니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고민과 선택과 행동에 깊이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좀 더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고민, 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무리 힘든 세상에서도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법을 배우게 될 테죠. 그게 바로 역사의 힘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 저는 여러분이 역사를 그렇게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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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장소/임진각

임진각은 1972년 북한을 바라보고 분단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게 조성된 곳이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데, 애초에는 안보 관광이라는 명분으로 개발됐다면 최근에는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이라는 가치로 관광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임진각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특수성 때문에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도 많았다. 1987년 10월에는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 총재 노태우와 야당이던 통일민주당총재 김영삼이 이곳에서 만났다.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되자 새로운 민주 사회를 모색하기 위한 상징적인 만남을 가졌던 것이다.
1990년 9월에는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한의 총리가 만난다.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렸기 때문인데, 연형묵 총리를 중심으로 북한 대표단 90여 명이 3박4일간 서울을 방문했다. 이때 판문점에서 성명을 발표한 후 임진각을 거쳐 서울로 들어온다. 1998년에는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이 임진각에서 천여 마리의 소떼를 끌고 방북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기업의 회장 역시 실향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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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은 나이가 되었지만 저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여전히 고민합니다. 하나의 생각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리고, 내게 옳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틀린 것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가끔은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더군요. 삶의 방향을 정하고 저만의 가치관을 찾는 일에 더욱 매달리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역사가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것은 착각이고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예요. 역사를 공부했음에도 살아가는 데 어떠한 영감도 받지 못했다면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모든 수업의 1강을 ‘역사는 왜 배우는가’에 할애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빨리, 많이 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죠. 그런데 문제는 시험이 끝나면 열심히 암기했던 사실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역사 공부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다 잊어도 괜찮다고, 다만 역사를 배우면서 느꼈던 감정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굳이 시간을 되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무수히 많은 선택과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어요. 세상에 이보다 더 쓸모 있는 학문이 있을까요? 제가 이 책에 ‘역사의 쓸모’라는 제목을 붙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의 실용적인 측면만 너무 강조하는 것 같아 조금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만 역사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은 일반인에게 역사를 학문적인 관점으로 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역사의 ‘쓸모’보다 역사의 ‘실체’를 강조하는 접근은 역사로부터 대중을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흘러간 가요의 제목처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는 거죠.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역사학자에게 맡기고 저는 학자들이 잠을 줄여가며 연구한 소중한 역사 속의 ‘사람’에게 집중하려 합니다. 대중 강연에서 인물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도 저에게 감동을 선사해준 그들의 삶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이 책에서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삶의 방향을 바로잡게 하는 인물을 여럿 다루었어요. 그들과 만나면서 재미와 감동이 있는 그들의 삶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에게 ‘왜’라고 묻고, 가슴으로 대화해보세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고민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기에 그때마다 막막하고 불안하지요.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역사 속 인물들은 이미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선택을 들여다보면 어떤 길이 나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역사.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는 역사. 그래서 궁극적으로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하게 하는 역사.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본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이 책을 펼친 독자 여러분도 역사의 쓸모를 발견하고 역사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 이 ‘쓸데없다’는 것만 찾아 모은 분이 계세요. 바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입니다. ‘유遺’라는 한자에는 ‘버리다, 유기하다’라는 뜻이 있어요. ‘유사遺事’라는 건 말 그대로 ‘버려진 것들을 모은 역사’입니다. 버려졌다는 말은 곧 이미 무언가를 취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선택된 것은 무엇이냐?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저는 『삼국유사』에도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정말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우리가 시험을 위한 공부로 『삼국유사』를 접했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를 비교하며 차이점을 표로 그리면서 외우느라 정작 그 이야기에는 소홀했던 겁니다. 기전체의 관찬 사서, 기사본말체의 사찬 사서 등 형식적인 내용을 공부하느라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놓친 것이죠.
『삼국유사』가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라면, 혹은 안데르센의 동화라면 어땠을까요. 교과서나 시험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만화책으로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접했다면 그 이야기와 등장인물을 좀 더 매력적이고 낭만적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일연 스님이 안데르센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이야기꾼이거든요. 그런데 일연 스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지나치게 고정적입니다. 어쩌면 『삼국유사』의 콘텐츠가 충분히 활용되지 않은 탓이기도 합니다. 사극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의 이야기나 전통 의복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듯이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도 다양한 형태로 접할 수 있다면 더 친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의 숙제기도 합니다.

역사의 실용성을 말할 때 『삼국유사』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쓸데없다고 버려진 이야기들이 사실은 참 ‘쓸 데 있음’을 증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 지역 문화 개발은 물론 국가 외교에도 활용되고 있어요. 계속해서 발굴되고, 쓰이고 있습니다.
김부식은 쓸데없는 요상한 이야기라고 빼버린 단군신화를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 실은 덕분에 일제강점기에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가 창시되어 신자들이 독립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 간섭기에 민족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던 일연 스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이야기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한 것은 물론, 괴로운 시대를 버틸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준 것이죠. 김부식은 쓸모없다고 버렸지만, 사실은 가치가 없던 것이 아니라 가치를 못 알아봤던 것입니다.

우리는 참 재미없게 역사를 배웠습니다. ‘어떻게 역사를 공부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인가’에 집중했죠. 그래서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을 외우고,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외우고…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역사를 다시 공부하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저는 역사를 알리는 사람으로서 일연 스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일연 스님은 휴지 조각처럼 버려진 이야기들을 주워 잘 펴서 우리에게 남겨준 분이잖아요. 저도 사람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역사,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역사를 재미있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고, 이 시대에 맞는 의미를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지요.

이 시대에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 그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답을 합니다. 역사는 아득한 시간 동안 쌓인 무수한 사건과 인물의 기록입니다.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콘텐츠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삶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의 흥망성쇠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새로운 대상을 접하든, 어떤 일을 벌이든 역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어요. 음식도, 옷도, 우리 삶을 구성하는 주변의 모든 것이 역사 속에서 함께 발전해온 것이니까요.
역사를 골치 아픈 암기 과목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역사의 품으로 첫발을 디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보물이 가득 쌓여 있는 그 지도를 신나게 펼쳐보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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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물/광해군

광해군(1575년~1641년)은 조선의 15대 국왕으로 1608년부터 1623년까지 재위하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광해군은 선조의 적자가 아니었고 위로는 첫째 서자 임해군이 있었다. 선조는 죽을 때까지 그를 미덥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그에게 중요한 기회였다. 선조는 광해군과 임해군 등에게 신하를 나눠 분조(조정을 나눈다는 말)함으로써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의 공격 속에서 왕조를 보존하려 했다. 이때 광해군은 각 지역을 돌면서 적극적으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통해 신하들과 백성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재위 초반기에 광해군은 여러모로 괜찮았다. 서인, 남인 등 각양의 저명한 인사들을 끌어들여 거국 내각을 구성했고, 허준을 후원하여 《동의보감》을 완성케 하는등 여러 노력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을 북인에게만 집중한 것이 문제였다. 북인의 정신적 지주인 정인홍은 서인과 남인을 지나치게 공박했고 실권을 쥐던 이이첨은 갈수록 전횡을 더했다. 북인은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하는 등 위기 가운데 큰 역량을 발휘했지만 국정 운영에 있어서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다. 더구나 대북 소북으로 나뉘어져서 자신들끼리도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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