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장소/신세계백화점

소공동 일대는 일제 시대 때 유명했던 미쓰코시백화점과 조지아백화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조지아백화점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현재 롯데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미쓰코시백화점은 해방 이후 동화백화점으로 영업하다 신세계백화점으로 바뀌었다. 1930년에 지었던 건물 외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시인 이상이 차를 마시고 온갖 문학적 성찰을 거듭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바겐세일, 신용카드 발급도 이 백화점에서 시작했고, 림스치킨 같은 한국 치킨의 역사도 이곳 식품부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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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인물/조광조

조광조(1482년~1519년)는 조선 전기 중종 때 문신으로, 유교적 개혁 정치를 실천하다 처형당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고,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였는데 연산군의 무오사화 당시 유배 중이었다. 용감하게도 조광조는 유배 중인 김굉필을 찾아가서 사사받는다.
조광조는 과거에 합격한 후 조정에 들어가자마자 여론을 주도하면서 중종의 눈에 들었다. 학문적 탁월함, 정치적 이상의 선명성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표현하며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정치력까지 지녔던 것이다. 당시 중종은 연산군이쫓겨난 후 사실상 반강제로 국왕이 됐기 때문에 여러 공신 세력에게 위축된 상황이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 적극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조광조 역시 중종을 통해 유교적 이상 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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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사건/김구 암살 사건

1949년 안두희에 의해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당한 사건이다. 해방 이후의 상황은 혼돈에 가까웠다. 스스로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38선을 기준으로 소련과 미국 군대가 주둔했고 좌우이념 갈등이 심각했다. 해방 초기 김구는 우익의 결집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동시에 강조하며 정치 활동에 매진한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곧 한계에 봉착하고, 남북 분단이 가시화가 된 상황에서 김구는 기존의 입장에서 대전환을 감행하여 남북협상운동에 매진한다. ‘이념이 민족을 앞설 수 없다‘는 입장에서 최초의 통일운동가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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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명문장/훈민정음해례 후서

(...) 옛날에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吏)를 만들어 관청과 민간에서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어려워서 막히고 혹은 질색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그뿐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계해년(1443, 세종 25)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 ‘훈민정음‘이라 했다. (...)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모두 표현해 쓸 수 있게 됐다. (...) 마침내 해석을 상세히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이해하라고 명하시니 (・・・)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를 지어 (...) 이를 본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했다.

《훈민정음해례본> 끝에 붙어 있는 정인지 (1396년~1478년)의 글 중 일부로, 한글 창제에 대한 자부심과 그 유용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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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심란하고 공허한 날에는
Flix Vallotton
펠릭스 발로통

오렌지와 보랏빛의 하늘, 그레이스에서의 노을
Sunset At Grace, Orange And Violet Sky, 1918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안에 빛이 있으면 저절로 밖까지 빛나는 법이니까요."

알베르트 슈바이처

중요한 것은 하려는 마음, 해내겠다는 의지
Paul Gauguin
폴 고갱

마담 고갱(메트 고갱)
Mette Gauguin, 1880

평생 도전적인 삶을 살았던 고갱은 화가이기 이전에,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유창한 언변과 적극적인 성격 덕분에 파리의 증권회사에서 유능한 주식 중개인으로 활약하며 잘나가던 시기도 있었다. 덴마크 출신의 아름다운 아내와 5명의 자녀를 두고 파리 중심가에서 풍족한 생활을 영유하기도 했지만, 취미로 시작한 주말 화가 생활은 고갱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인생은 자신의 의지로 살 때만 의미가 있는 거야. 얼마나 강한 의지로 살았는지가 중요해."
좋은 직업과 안락한 가정을 포기하고 당대 주류였던 인상파 화풍을 거부한 채 문명화된 도시를 떠나 기인처럼 살았던 고갱이기에, 그가 남긴 이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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