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명문장/공허한 말만 있다면 어찌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아래는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율곡 이이의 글이다.

"아침 내내 밥상을 차려도 조금도 배부르지 않는 것처럼 공허한 말만 있을 뿐실질이 없다면 어찌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 경연 자리와 상소하는글에 나라를 다스릴 만한 좋은 지략과 곧은 논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 하나의 폐단도 개혁되지 않고 단 하나의 정책도 시행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실질적인 효과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만약 자신의 뜻을 진실 되게 하고자 한다면 여색을 좋아하듯이 선을 좋아하여야 반드시 선을 얻고, 악취를 싫어하듯이 악을 미워하여야 결단코 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조용히 혼자 있거나 어두운 곳에 숨어 있을 때에도 삼가고 두려워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남들이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조심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 만약 간사함을 물리치고자 한다면 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을 하는 자는 잘못된 것이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고, 행적이 공명하거나 바르지 않은 자는 그 숨겨진 간특함을 살펴야 합니다. 건의하는 바가 없는 자는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없음을 알아야 하고, 작위나 녹봉에만 집착하는 자는 어려울 때 목숨을 바치는 절개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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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리 결혼하는 게 좋겠어." 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엄마가 내 결혼식을 보실 수 있게."
피터는 실눈을 떴다. 피터는 한 방 맞은 듯한 얼굴로 운전에 집중했다. 따뜻한 오렌지빛 새벽 햇살이 차창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의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팔을 뻗어 내 손만 꼭 잡았다. 나는 약간 짜증이 났다. 여느 사람들처럼 피터 역시 도통 적절한 말을 할 줄 몰랐다. 이 남자의 위로 방법은 언제나 내 감정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냥 조용히 내 옆에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도 참 고마운 것이, 어차피 그것 말고 그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방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엄마가 끄응 신음을 내뱉었다. 이모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거실로 가서 외출에 필요한 물건을 주섬주섬 챙겼다. 우리 여섯은 자동차 두 대에 나눠 타고 한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나는 아직도 완강히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안정제 주사 한 방이면 엄마가 전처럼 괜찮아질 거라 확신했고, 그때그때 적당히 무마하면서 몇 년은 더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주일 안에 어떻게든 엄마가 회복해서 함께 제주도로 날아갈 수 있기를 고대했다. 이모는 이미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해두었다. 하지만 엄마는 상태가 점점 더 나빠졌다. 일주일이 지나고도 계속 병상에 누워 밤새도록 끔찍한 열과 오한과 싸웠다. 우리는 제주 여행을 취소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는 유진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마저 취소해야 했다.

이제 무안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누가 뭐래도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했고, 모든 것이 작용과 반작용일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엄마가 아직 주무시고 계시면 나는 병원 슬리퍼를 신은 채 승강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혹시 주변에 엄마의 정신을 돌아오게 할 만한 게,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떠올리게 할 만한 게 있는지 찾아다녔다.

엄마는 다리를 이불 밖으로 뻗고 등을 베개에 대고 꿈틀꿈틀 밀면서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정작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은 네 아빠인데."
"난 여기 있는 게 좋아."
"그래. 그래도 아빤 내 남편이잖아." 엄마가 말했다. "근데 여기 있어도 전혀 날 돌볼 줄 몰라. 구강 세척제를 갖다달라고 하면 그냥 그것만 덜렁 갖다줘. 컵도 안 주고."

"아빠가 재혼할 것 같아?"
"아마 하겠지."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 것 같기도 했다. "또 아시아 여자랑 결혼하겠지." 나는 진저리를 쳤다. 또 아시아 여자일 거라니,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니 굴욕감이 밀려왔다. 아빠가 손쉽게 누군가로 엄마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시아인 성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것은 두 사람의 유대를 하찮게 만들었다. 우리를 싸구려로 전락시켰다.
"난 못 참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절대 못 받아들여. 구역질나."
우리를 묶어줄 엄마가 사라지고 나면 아빠와 나는 거의 남남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리는 암암리에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아빠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 두 사람은 계속 티격태격할 게 뻔했다. 가족이라는 닻이 올려지고 완전히 해체되어버릴 가능성이 다분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꾸짖어주길 기다렸다. 그분은 내 아빠라고, 내 핏줄이라고 뚝 잘라 말하길 기다렸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평생 우리를 먹여 살린 사람에게 그러면 못쓴다고 말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말을 하는 대신 내 등에 가만히 손을 대고, 우리가 차마 서로 말 못 하고 있는 부분은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너는 네 도리를 다할 거야."

그때까지 나는 살아가기와 죽어가기는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는 식물인간으로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본 터였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이미 찢겨나간 육체적 자율성의 조각들은 하루하루 누더기 꼴이 되어갔고, 이제 살아가는 일과 죽어가는 일은 그 차이를 분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병상에 묶여 혼자 걸을 수도 없었고 각종 장기도 더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도 팔에 연결된 수액 주머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로 섭취하다가 이제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숨도 혼자 못 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 모습에서 하루가 다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문득, 다섯 살 때쯤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나를 태우고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다리 사이에 나를 끼워 앉히면 나는 연료통 뚜껑을 지지대 삼아 꽉 붙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보면 웅웅대는 엔진소리와 뜨끈한 연료통의 온기에 잠들곤 했다. 눈을 떠보면 이미 우리집 차고 앞일 때도 종종 있었다. 문득, 나쁜 일이라곤 모르던 그때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우리는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한국 여행을 감행하는 위태위태한 줄다리기를 선택했다. 우리는 쟁취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시도했지만 날이 갈수록 상황은 나빠지기만 했다. 죽어가기 대신 살아가기를 택했지만 그 선택은 결국 끔찍한 실수로 판명되었다.

엿새 뒤에 비로소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부랴부랴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승강기 쪽으로 밀고 가는데, 복도에서 의사가 우리를 불러 세우더니 엄마에게 작별 선물을 건넸다. "이걸 보는 순간 환자분 가족 생각이 나더라고요." 의사가 엄마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아빠, 엄마, 딸 한 가족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작은 목각 수공예품이었다. 서로 바짝 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가족은 흡사 나무 한 조각을 깎아 만든 것처럼 매끄럽게 연결돼 있었다.

기대한 대로 나의 결혼식 계획은 마법을 부렸다. 소소하게 종양특이항원 반응이 일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엄마의 의무 후송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어두컴컴한 장막을 확 열어젖히니 방안으로 새로운 빛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엄마는 병마와 싸워서 지켜내야 할 대상이 생겼고, 우리는 엄마의 그런 의지를 적극 활용해 엄마가 움직이고 음식을 먹도록 독려했다.

내가 다음 세상에선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고 물을 때마다 엄마는 매번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엄마가 대단하고 영웅적인 것보다 소박하고 고요한 것으로 환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전혀 뜻밖인 동시에 내게 위안을 주었다.

엄마는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고 잠시나마 엄마를 건강한 사람인 양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는, 그저 멋진 결혼식을 올리기에 딱 어울리는 아름다운 날인 것처럼.

세상에 우리 엄마만큼 내 기분을 있는 대로 잡쳐놓을 수 있는 신랄한 사람도 없지만, 또 우리 엄마만큼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피터조차도 그렇게는 못했다. 나는 언제나 엄마가 하는 말을 마음속 깊이 믿었다. 내 머리가 조금이라도 헝클어졌거나 화장이 진하게 됐을 때 내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줄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엄마가 고쳐주기를 계속 기다렸지만 엄마는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웃고만 있었다. 어쩌면 약에 취해 제대로 분간을 못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소한 비판이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내심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랑은 행위이고, 본능이고, 계획하지 않은 순간들과 작은 몸짓들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이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아프다는 걸 알고 나서 혼자 브루클린 창고에 누워 있는 나의 손을 잡아주려고 이 남자가 일이 끝난 새벽 세시에 뉴욕까지 차를 몰고 달려왔을 때, 사랑이 바로 이런 거란 걸 더없이 절실히 느꼈노라고 말했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이 남자는 몇 번이고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를 날아 내게로 와주었고, 6월부터는 연일 하루에 다섯 번씩 해대는 전화를 받아 참을성 있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 결혼이 좀더 이상적인 환경에서 시작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내 앞에 놓인 미래를 용감하게 걸어나가는 데 오직 이 남자 하나뿐이면 된다는 확신을 준 게 바로 이 시련이었다.

엄마가 계씨 아주머니와 아빠와 함께 걸어가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봤다. 그게 행복의 눈물인지 아니면 끝까지 그 밤을 즐기지 못하는 처지가 속상해서 흘린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샴페인을 한 잔 더 마셨다. 결혼식을 실제로 하게 된 것에,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지 않은 것에, 모든 계획을 취소할 필요가 없었던 것에 한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는 잠시 걱정을 내려놓고 현실도피를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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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상태처럼 텅 빈 내 안에 음악이 훅 밀고 들어와 공허를 채웠다. 음악은 또다른 균열을 만들어 엄마와 나 사이에 이미 위태위태하게 벌어져가던 틈을 완전히 헤집어놓았고, 그 틈은 곧 거대한 심연이 되어 우리를 통째로 집어삼킬 태세였다.

음악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음악은 나의 실존적 공포에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자신들이 직접 쓴 노래를 연주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누군가를 직접 보는 경험은 내게 계시와도 같았다. 투어 생활의 지속적인 고됨을 토로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도, 공연 예매한 걸 후회할지도 모르는, 기껏해야 서른 명도 안 돼 보이는 청중 앞에서 그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내가 이 사람과 무대를 했다니. 이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앉아 있었다니. 그때 예술가의 삶을 얼핏 본 기분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순간 그 길이 티끌만큼은 내게 더 가까워진 듯했다.

닉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내가 우러러보던 누군가가 나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건 정말 기분좋은 일이었다.

엄마라는 닻에서 풀려난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저항해온 온갖 책임으로부터 훨씬 더 멀리 도망갔다. 아빠의 데스크톱컴퓨터에는 내가 반쯤 쓰다 만 각종 대학 지원서 보충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나는 무단결석을 점점 더 자주 했다. 수업에 빠지고 숙제를 내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뒤처진 것이 부끄러웠다. 나중에는 나를 걱정하는 선생님들과 마주치기 싫어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학교 주차장에서 담배만 피우고 앉아 있는 날이 많았다. 내가 죽는 상상도 많이 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그 도구처럼 보였다. 고속도로는 차에 확 치여 죽기에, 5층짜리 건물은 훌쩍 뛰어내려 죽기에 딱 좋아 보였다. 유리 닦는 세제를 보면 저걸 얼마나 마셔야 죽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고,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린 블라인드 줄을 보면 그걸로 목을 매다는 장면이 그려졌다.

엄마가 내게 말을 걸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도 냉정한 척하려고 애를 썼다. 물론 내가 엄마보다 훨씬 약해빠진 사람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엄마는 우리 사이가 멀어진 상황에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듯 행동하다가 내가 브린모어대학으로 떠나려 짐을 싸는 날에야 비로소 침묵을 깼다.

엄마가 어떤 문제를 그처럼 오랫동안 숨기고 살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내가 지키려 했던 비밀은 모두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는 비밀을 지키는 데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나한테까지도. 엄마는 아무도 필요치 않았다. 엄마는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필요치 않은지를 보여주어 나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었다. 자기가 그러듯 항상 나만의 10퍼센트를 따로 남겨두라고 평생을 내게 가르쳐온 엄마지만, 그게 나한테까지 따로 남겨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으리라고는 그때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그동안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어떻게든 보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어릴 때 온갖 과잉 행동으로 엄마를 너무도 힘들게 한 것. 그리고 10대 때 내뱉은 모든 독설. 백화점에서 숨고, 공공장소에서 울고불고 떼쓰고, 엄마가 가장 아끼는 물건을 망가뜨린 일. 그리고 부모님 차를 훔쳐 타고, 약에 취해 집에 들어오고, 음주운전으로 구덩이에 차를 처박은 것까지도.

엄마가 시들어가는 것을 나 혼자 막아낼 것이다. 지금까지 엄마에게 진 빚을 낱낱이 갚을 것이고, 엄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전혀 안 와도 된다고 생각한 걸 후회하게 만들 거다. 완벽한 딸이 될 테다.

비록 우리가 좋게 헤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큰 상자가 내게 날아와, 엄마의 마음속에서는 내가 절대 멀리 떠나 있지 않음을 상기시켜주었다. 상자에는 달달한 쌀강정이며 스물네 팩으로 낱개 포장된 김과 즉석밥, 새우깡과 빼빼로, 지긋지긋한 구내식당에 가지 않고 몇 주는 버틸 수 있게 해줄 신라면컵이 넉넉히 들어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엄마는 의류 스팀기며 보풀 제거 롤러, 비비 크림, 양말 세트까지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건 좋은 브랜드야"라는 설명을 굳이 덧붙여 보낸, 티제이맥스에서 세일할 때 구입한 치마도. 카우보이 부츠는 부모님이 멕시코로 휴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사와 음식과 함께 내게 부쳐준 것이었다. 그걸 신어보는데 웬일인지 가죽이 이미 부드럽게 길들여져 있었다. 알고 보니 엄마가 그걸 일주일 동안 집안에서 신고 다녔다는 거다. 엄마는 양말을 두 겹 신은 발로 그걸 신고 매일 한 시간씩 걸어다니면서 뻣뻣한 신발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만들어놓고, 자기 발바닥으로 평평한 밑창까지 모양을 잡아놓았다. 행여 내가 처음 그걸 신을 때 불편할까봐 말이다.

엄마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컸는지, 엄마 없이도 내가 얼마나 잘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우리 상봉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내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 갈비를 재워놓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냉장고를 채우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몇 주 전에 사놓고서 하루 전에 꺼내놓았다. 좀더 익혀서 내가 도착해서 먹을 때 적당히 알싸한 맛이 나도록.

엄마는 내 뒤 소파에 앉아, 내가 걸신이라도 들린 듯이 어귀어귀 먹는 동안 얼굴 쪽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걷어주었다. 내 몸에 닿는 엄마 손길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살짝 끈적끈적한 크림기가 남아 있는 차가운 손은 더는 내가 화들짝 피하기 바쁜 불쾌한 손이 아니라 가만히 기대고 싶은 손이었다. 마치 엄마의 애정에 이끌리는 어떤 중심이 내 안에 새롭게 생겨난 것만 같았다. 내가 그 자기장에서 떠나 있었을 때까지 새롭게 충전된 중심이. 나는 또다시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동안 홀로서기하느라 좌충우돌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 엄마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고, 그걸 달콤하게 음미하고 싶었다. 스웨터를 세탁기에 돌려버려 두 치수 작게 쪼그라뜨린 일을, 점심을 먹으러 고급 식당에 갔다가 무료인 줄 알고 시켜 마신 탄산수에 12달러를 쓴 일을 재미나게 들려주고 싶었다. 엄마, 엄마가 옳았어, 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투항하고 싶었다.

아빠는 돈을 벌어오는 가장 역할에 만족했다. 하지만 그저 우리 삶에 아빠가 계속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버지가 자신의 성장 배경을 뛰어넘고 온갖 중독을 극복했다는 증거였고, 그건 충분히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나와 엄마처럼 서로 끈끈하게 연결된 사이가 아니었고, 이제 엄마가 아픈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같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나는 엄마에게로 달려가 조심스레 엄마를 껴안았다. 가슴께에서 딱딱한 플라스틱 주사관이 느껴졌다. 나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머리 엄마한테 정말 잘 어울리네. 너무 예뻐."
엄마는 다시 가죽소파에 등을 기댔고, 나는 탁자를 등지고 슬그머니 카펫 바닥에 앉았다.

비록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분이었지만, 아주머니가 오면 그분에게 요리를 배워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딸인지 엄마에게 입증해 보일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우리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마침내 내가 진 빚을 갚는, 그토록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온 사랑과 보살핌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주는 기분좋은 상상을 했다. 엄마를 위로하고 한국을 떠올리게 할 그런 음식들을 엄마가 좋아하는 방식 그대로 만들어 엄마의 기운을 북돋고, 몸에 충분히 영양을 공급하고, 회복에 필요한 힘을 되찾아줄 생각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방충망은 내가 몇 년 전에 떼어내서 창고에 넣어둔 그대로였다.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발을 홈통 쪽에 두고 지붕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한 자세로, 까칠까칠한 타르 종이 위에 누웠다. 쏟아질 듯 많은 별이 반짝였다. 도시의 불빛에 흐려지지 않은 덕분에 그 별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멋졌다. 발아래에선 귀뚜라미와 개구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예전에 나는 부모님이 잠들었을 때 종종 지붕 반대쪽 끝 현관 기둥을 타고 내려가서, 나를 야간 드라이브에 끼워줄 친구와 합류하곤 했다. 자갈이 깔린 진입로를 달려 나를 해방시켜주러 온 아이에게로 가면 이내 자동차 시동이 걸렸고, 나는 바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여기에 있지만, 이번에는 온전히 내 자유의지로 돌아온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 어둠 속으로 무작정 달아날 궁리를 하는 대신, 부디 어둠이 찾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며칠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계속 기다리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불길한 무언가가 소리 없이 집 주위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처음 하루이틀은 엄마의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흘째가 되어서는, 어쩌면 앞으로 그렇게까지 나빠지진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는 좁은 한국 지역사회에서 사실상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엄마는 일찌감치 교회에서 빠져나왔다. 십중팔구 내가 혼혈아로 태어나 자란 탓이었을 텐데, 어쨌든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이 나쁜 아이처럼 느껴져 더 말썽을 피웠던 것 같다. 내가 버릇없이 굴면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이 계속 수업을 듣는 동안, 나를 한쪽 구석에서 손들고 서 있게 했다. 아무튼 꾸준히 한글학교에 다닌 덕분에 나는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어찌어찌 읽고 쓸 줄은 알게 됐다.

병원 문을 나서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차에 온전히 혼자 있게 되자 그제야 하루종일 받은 충격이 몰려와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살면서 해온 모든 일이 터무니없이 이기적이고 하찮게 느껴졌다. 내 자신이 미웠다. 은미 이모가 아팠을 때 이모에게 날마다 편지를 쓰지도, 더 자주 전화하지도 않고, 나미 이모가 보호자 역할을 하느라 고생한 것을 충분히 헤아리지도 못한 내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유진에 더 일찍 오지도, 진료 예약날에 같이 따라가지도 않고, 진작 주의를 기울여야 했을 증상들도 까맣게 몰랐던 내 모습도 미웠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내 증오는 이제 슬금슬금 아빠에게로, 여러 가지 경고를 귓등으로 흘린 아빠에게로 향했다.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기만 했어도 이런 고통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니까.

그날 밤 엄마 옆에 누워 있으려니 어렸을 때 차가운 발을 녹이려고 엄마 넓적다리 사이에 슬며시 발을 끼워넣던 일이 떠올랐다. 엄마는 부르르 떨면서 속삭였다. 널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엄마는 어떤 고통도 감수할 거라고, 그게 바로 상대가 너를 진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 부츠가 떠올랐다. 내가 발이 까지지 않고 편안하게 신을 수 있도록 엄마가 미리 신어 길들여놓은 부츠가. 나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부디 내가 대신 고통받을 방법이 있기를,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엄마에게 증명할 수 있기를, 엄마의 병상에 기어들어가 엄마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키기만 하면 그 무거운 짐을 내가 송두리째 흡수해버릴 수 있기를. 인생이 공평하려면 자식 된 도리를 다할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 같았다. 엄마가 나를 자기 안에 품고 다닌 몇 달 동안 엄마의 온 뱃속 장기들이 나라는 존재에 밀려나 한덩어리로 뭉쳐 있었고,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동안 엄마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그 고통을 보상하려면 지금 내가 이 고통을 대신 짊어져야 마땅했다. 그것이 외동딸에게 주어진 의례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가까이에 누워 있는 것밖에 없었다. 엄마의 지원군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규칙적으로 느리게 울리는 기계 신호음과 나지막이 쌔근거리는 엄마 숨소리를 들으면서.

아빠는 천성이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못 되었다. 게다가 타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남자에게는 이것이 어떤 숙명적인 시험에 드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이 넷을 혼자 벌어 키운 할머니는 막내를 돌볼 시간도 정서적 여유도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아빠는 어른의 보호와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여지없이 아빠는 문제투성이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런 상태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아빠는 경찰에 체포돼 재활센터에 보내졌다. 그뒤로 20대 초반 해충 구제업자로 일했을 때 증세가 잠깐 재발한 적도 있었다. 궁극적으로 아빠를 구원한 것은 우연한 기회의 해외 취업이었다. 만약 이 책이 아빠의 회고록이었다면 제목은 이랬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중고차 세일즈맨’. 그로부터 30년 뒤에는 자신이 군부대에서 미사와, 하이델베르크, 서울 지사 일을 차례로 맡으며 승진 가도를 달렸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신나한 일이 없을 정도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남자에게 해외에서 중고차 세일즈맨으로 산다는 것은 더없이 화려한 소명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병은 아빠가 빠져나갈 묘책을 찾아내거나 초과근무를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빠는 무기력한 기분에 시달리자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빠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나이였지만 상처도 잘 받았다. 아빠는 일말의 진실도 감출 줄 몰랐다. 엄마와 달리 10퍼센트를 따로 남겨두는 법을 몰랐다.

아빠는 리스크가 크고 승산이 희박한 게임에서 전혀 달갑지 않은 파트너였다. 이 사람은 내 아빠였고 나는 아빠가 침착하게 나를 안심시켜주기를 바랐다. 나를 들들 볶아대서 이 절망스러운 길을 외롭게 걸어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빠 앞에서 울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아빠는 분명 내 슬픔에 자기 슬픔을 얹을 터였다. 누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지, 누가 더 상실감이 클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호소하면서. 게다가 아빠는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까지 집이 떠나가라 말해서 내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놓았다. 엄마가 이 병을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쩌면 이제 엄마 없이 우리 둘만 달랑 남게 될 수도 있다고.

그런 거울 속에, 이제는 알아볼 수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도 달갑지 않은 낯선 사람이. 엄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엄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엄마를 감싸안았다. 나 또한 몰라볼 정도인 거울 속 모습에, 우리 인생에 들어온 이 거대한 악마의 물리적 현현에, 나도 엄마와 같이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몸이 뻣뻣해지고, 심장이 단단해지며, 감정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울면 안 돼. 네가 울면 지금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아. 네가 울면 엄마는 울음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울음을 삼키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진심으로 그걸 믿게 하려고.
"그냥 머리카락이잖아, 엄마. 금방 다시 자랄 거야."

나는 내심, 계씨 아주머니가 연장자이니만큼 무슨 강력한 새 전략을 동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엄마 입장에서도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자기 딸을 대할 때처럼 보호 본능부터 앞서지 않는 누군가에게 기대는 게 더 편할 것이었다. 언니라는 존재의 힘 앞에 자연스럽게 굴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엄마에게 칼로리를 섭취하게 하겠다는 이런 강박은 내 식욕까지 앗아갔다. 나는 유진에 온 뒤로 5킬로그램이 빠져 있었다. 엄마가 맨날 꼬집던 똥배가 사라지고, 스트레스로 인해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씩 빠지기 시작했다. 얄궂게도 나는 그게 반가웠다. 줄어든 내 몸무게는 내가 엄마와 더 단단히 묶여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나는 어딘가를 향해 그렇게라도 경고장을 날리고 싶었다. 엄마가 사라지기 시작한다면 나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아주머니에게 빚진 기분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쩐지 조금씩 내 자리에서 밀려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내 마음속 가장 먼 곳으로 밀어내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 한편에서는 지금 이 시간이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으리란 걸 알았고, 아직 뭐든 할 수 있을 때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을 정말 소중하게 보내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았다. 잠깐이지만 비로소 이렇게 우리끼리 있으니 너무 좋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주머니 없이도 우리끼리 얼마든지 잘해나갈 수 있어. 나 혼자 다 할 수 있어.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나는 엄마 옆에 내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내 수저를 엄마 맞은편 자리로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엄마한테 한글로 쓴 장문의 손편지를 건넸다. 그러고는 아빠와 내 앞에서, 그걸 혼자서만 조용히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세 장짜리 편지를 반쯤 읽어내려가다 말고 훌쩍거리면서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읽어내려갔다. 약기운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불편해하고 있단 걸 눈치챘을 테지만, 당시 엄마의 상태로는 우리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갈수록 약이 독해지면서 엄마는 시종일관 졸고 더 둔감해져서 소통하기가 날로 어려워졌다. 엄마는 이제 슬금슬금 모국어로 말을 해서 특히 아빠를 더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진통제 투여량이 늘어날수록 엄마가 우리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게 두려워져 그동안 어떻게든 약 투여량을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우리가 통증의학과에 다녀온 뒤로는 그 씨름을 그만두었다. 고통이 정말로 4 이하가 아니고 6이야? 나는 스프링 노트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그 기록을, 하루에 25마이크로그램짜리 펜타닐 패치에 액상 하이드로코돈을 추가해야 했던 때의 횟수를 숨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엄마의 상태가 보기보다 나쁘지 않다고 우기고 싶었다. 엄마가 고통받는 것도 싫었지만 엄마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도 너무 싫었다.

의사가 나의 좌절감을 알아채고 진통제의 부작용을 상쇄해줄 애더럴을 소량 처방해주었다. 엄마는 그걸 복용하고 처음에는 어찌나 에너지가 넘치는지, 집안 청소를 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는 바람에 우리가 육탄전을 벌여 저지해야 할 정도였다. 일순 엄마가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어서,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꾹꾹 눌러 간신히 참았다. 한때 어떻게든 미국 교외의 또래 사이에 섞이려 안간힘을 쓰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내 소속을 증명해야 할 무언가로 느끼면서 성인이 되었다. 내가 어느 편에 설지, 누구에게 동조할지 결정하는 일은 번번이 남의 손에 맡겨졌지 내 스스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두 세계 중 어느 세계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었다. 노상 반만 인정받고 반은 이방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나보다 그 세계의 지분이 더 많은 누군가가, 온전하고 완전한 누군가가 자기 멋대로 날 쫓아낼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오랫동안 미국이라는 나라에 속하려고 별짓을 다 했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랐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내가 바란 것은 오직, 나를 밀어낸 두 사람에게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우리 세상 사람이 아니야. 네가 아무리 애써본들 네 엄마한테 필요한 게 뭔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할 거야.

은미 이모는 고작 마흔여덟이었는데도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했다. 평생 담배는 입에 대본 적도 없고, 주말이면 꼬박꼬박 교회에 나갔다. 가끔씩 우리끼리 벌인 치킨 파티 때를 제외하면 술도 잘 마시지 않았다. 그 흔한 키스도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알기로 이런 사람은 보통 암에 걸리지 않았다.

은미 이모는 스물네 차례 항암치료를 받은 끝에 밸런타인데이에 돌아가셨다. 낭만적인 사랑이라고는 한 번도 못 해본 여자에겐 실로 잔인한 농담 같은 운명이었다. 이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였다.

두 분의 슬픔이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일 게 뻔한데도 사람들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부당해 보였다.

마지막날에는 나 역시 검정 한복을 입고 흰 면장갑을 낀 채 운구 행렬 선두에 서서 화장장으로 갔다. 매서운 추위가 우리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가 얼굴 피부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콕콕 찌르는 느낌이었고, 세찬 바람이 한 번씩 훅 불 때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은미 이모의 죽음에서 엄마가 가장 크게 배운 점은 항암치료를 스물네 차례나 받아도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엄마가 굳이 겪어내고 싶지 않은 시련이었다. 처음에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엄마는 항암치료를 두 번만 받겠다고 결심했다. 그래도 진전이 없으면 더는 받지 않겠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만일 아빠와 내가 없었다면 그것마저도 시도했을지 의문이다.

밴에는 땀에 전 체취와 김빠진 맥주 냄새가 뒤엉켜 퀴퀴한 쉰내가 진동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 앞에 서니, 한때 그보다 더할 수 없이 멋져 보이던 그 창창한 길?투지와 가능성이 넘치고, 더없이 창조적이고 관대한 타인들과 함께하며, 멋들어진 생활 방식을 품은 것 같았던 그 길?이 빛을 잃고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다고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엄마의 기력이 회복되고 있고, 할일은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그래도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오리건에 가서 두 분과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포트 로더데일 외곽 어딘가에서 15인승 포드 승합차 뒷자리에 앉아 주유소 매점에서 산 타퀴토를 먹고 있을 게 아니라.

마치 아빠가 내 목구멍에 팔을 쑤셔넣어 내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태산 같은 시간을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려 애쓰면서 보내왔다. 확고한 긍정의 화신이 되어, 우리가 기적의 대열에 서 있다는 착각 속에 스스로를 빠져들게 하려고 발버둥치면서.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도 어떻게 이토록 허무한 결말을 맞아야만 할까! 검은 혈관, 머리카락 뭉치들, 병원에서 보낸 밤들, 엄마의 고통. 이 모든 것은 대체 뭘 위한 것이었나!

엄마가 그쯤에서 치료를 포기하는 것에 아빠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아빠는 내가 뭐라고 하며 대들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엄마가 치료를 계속 받도록 설득하자고 말이다. 하지만 항암치료는 이미 엄마에게 남은 존엄을 마지막 조각까지 앗아가버렸고,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더 앗아갈 존엄이 남았다면 그것마저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 것 같았다. 엄마는 암 진단을 받고 나서 많은 결정을 우리에게 맡겨왔다. 우리가 자신의 변호인이 되도록, 자신을 대신해 간호사와 의사에게 간청하고 투약에 관해서 질문하도록. 하지만 나는 은미 이모 덕분에 알게 되었다. 만약 두 차례의 항암치료가 별 효과가 없다면 그쯤에서 치료를 중단하는 게 엄마의 바람이라는 것을. 그것은 내가 반드시 존중해야 할 결정 같았다.
엄마가 아빠에게서 전화를 넘겨받았다. 엄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우리 가족이 다 같이 한국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당시에 엄마는 한동안 몸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고, 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지금은 죽어가기보다는 살아가기를 선택할 때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엄마는 자신의 조국과 언니에게 작별인사를 할 기회를 갖고 싶어했다.

나는 눈을 감고 눈물이 흐르는 대로 그냥 놔두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서울에서 함께 지내는 모습을 그려보려고 애를 썼다.

나는 양 무릎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다가 정신없이 딸꾹질했고, 또 그러다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마구 헐떡였다. 얼굴은 극도의 고통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내 방 나무 바닥에서 멍하니 몸만 앞뒤로 까딱였고, 그 순간 내 존재가 완전히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처음으로 우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 더는 자신의 격언을 들먹일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내가 그동안 참고 참아온 눈물을 터뜨려도 될 때가 됐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파선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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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학문•철학/민족주의

민족의 해방과 번영을 목표로 하는 정치 사회 이념, 보통 민족주의는 프랑스대혁명의 산물로 규정한다. 혁명은 신분 제도를 타파했고 루이 14세 같은 절대 군주가사라지면서 그 빈자리를 국민이 채우게 된다. 절대왕정에서 국민(민족) 국가로 바뀐 것이다.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을 통해 민족에 대한 자각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는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독일 제2제국‘, 마치니, 카보우르, 가리발디의 ‘통일 이탈리아‘의 이상 같은 것들이 민족주의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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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문화/반민특위
1949년부터 본격적으로 반민족 행위자들을 조사해 재판부에 넘겼지만 친일파들이 강력하게 반발해 순탄치 못했다.

친일파 처단을 위해 제헌 국회가 만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약칭으로 활동은 실패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세 가지 민족과제가 있었다. 통일 정부 수립. 토지 개혁 실시, 친일파 처단을 통한 민족정기 수립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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