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는 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 아이들, 그토록 충실한 나의 반려, 나의 일"이라고. 이 대목을 길잡이 삼아 나는 한 사람의 생으로 들어갔다. 케테는 격동의 시대에 성장했다.

‘그토록 충실한’ 반려인 남편이 무료 진료소에서 일하는 의사였기에 케테의 생활도 하층민의 삶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가까이서 제대로 보았다. 그래서 민중을 지배당하는 대상에만 가두지 않고 억압을 뚫고 살아내는 역동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인생에는 유쾌한 면도 있는데 왜 당신은 비참한 것만을 그리는가 하고 묻는 이에게 케테는 답했다. "나는 정확한 답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명확히 말해두고 싶다. 나는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에 동정하거나 공감했기 때문에 그들을 그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서 단순 명쾌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유언처럼 남긴 석판화의 제목은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다. 우리는 전쟁터에 보내려고 자식을 낳은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케테가 전쟁이 끝나는 걸 못 보고 숨을 거둔 게 안타까웠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적이 있었던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관심 두지 않는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그때마다 씨앗들이 가장 먼저 제일 쉽게 무참히 짓밟혔다. 세르비아 속담대로 정치인은 전쟁을 시작하고, 부자는 무기를 대고, 가난한 사람은 자녀를 제공한다. 전쟁이 끝나면 정치인들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고, 부자들은 생필품의 가격을 올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녀의 무덤을 찾아간다.
‘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는 케테의 속울음이 판화처럼 복제되고 있다. 이 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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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겨울눈은 이미 가을에 꼴을 갖춘다. 늦여름부터 나무는 잎으로 향하는 양분을 차츰 줄여 결실과 겨울눈 만드는 데 에너지를 더 쓴다. 혹독한 시절을 견딜 어떤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나무는 겨울눈을 안전하게 만들고 나서야 낙엽을 떨어뜨린다. 이파리가 연둣빛을 상실한 채 말라간다고 해서 나무가 발달을 멈추는 건 아니다. 더 치밀하게 세포를 만드는 방식으로 겨울을 대비한다.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하듯이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이겠지. 그건 생존 전략인 동시에 일종의 신성한 의식일 수도 있다. 겨울을 무사히 건너기를 빌고 봄의 새순을 희망하는, 나무 세계의 동제 같은 것.

고사리 새순의 등장은 봄을 알린다. 노인이 된 우리 할머니는 등이 굽어 고사리순처럼 구부정했지만 어린 내 눈에는 팽나무 고목처럼 강건해 보였다. 뿌리째 먹는 봄나물 냉이는 캐야 하고 고사리는 뿌리가 상하지 않게 순만 취해야 한다고, 그러니 고사리는 캐는 게 아니라 새순을 꺾는 거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당신의 엄마한테 배웠다고 했다. 열매 맺고 나면 뿌리마저 시드는 두해살이 냉이와 달리 고사리는 여러해살이라 뿌리를 살려야 내년에도 순을 얻을 수 있다고. 어린 나는 그 애순을 모으며 식물이 싹을 내밀고 잎을 펼치고 또 말라가는 자연스러운 이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고마운 식물을 내가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그들의 질서를 인간이 함부로 훼손하지 않도록 지켜줘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 게 그 무렵이던가. 나는 당신의 눈이었을까.

생명이 눈을 틔우고 결실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시작도, 절정도, 쇠락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봄을.

어느 인류학자는 친밀한 존재를 떠나보낸 이들이 "흐르는 시간에서 비껴나 고이는 시간에 갇힌 존재"라고 했어. 죽음이라는 사건은 남겨진 이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해. 유교 상례는 애도하는 존재가 상중의 시간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도록 안식처를 제공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간은 무언가를 ‘함’보다는 ‘하지 않음’으로 채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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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인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흔히 생각하듯이 우리가 어떤 사실을 정신적으로 지각하면 그것에서 감정이 생기고 육체적 표현이 뒤따르는 게 아니라고 한다. 이를테면 나쁜 일을 당하면 슬퍼서 울고 곰을 만나면 무서워서 도망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울기 때문에 슬픔을 느낀다. 몸을 덜덜 떨고 도망치기 때문에 무서워진다. 신체 표현이 없다면 지각은 흐릿하고 색도 없고 감정적 온기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나의 계절도 가을이다. 낮이 점점 짧아지고 총기도 사그라진다. 심장이 덜컹거리고 감정은 둔탁하다. 가을은 시들고 이우는 계절이지만, 무성한 잎을 내주는 대신 결실을 맺는 계절이기도 하다. 찬란하지는 않지만 쓸모가 있는 계절이다. 그래야 하는데, 어느덧 시대가 바뀌었고 내가 지금껏 축적해 온 지식이 무용해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요새는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50년을 살았는데, 다음 해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처럼 많이 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것 또한 어쩌면 자연스러운 섭리인지 모른다. 나이 든 사람은 닥쳐오는 어두운 겨울을 애써 들여다보는 대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도. 이 가을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하면서 아직 어린 것들을 거두어 건사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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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정말 광활합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세계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또 다가올 미래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바다의 파도처럼,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날이 지나갔고, 또 수없이 많은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단 하루씩을 살아가지요.

한치를 먹으며 밤이 깊어가는 동안, 문득 얼어붙은 한치를 먹으며 차가워서 한치인가 싶던 밤은 또 언제였던가 싶더군요.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그때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알지 못했지요. 지금의 우리는 또 먼 훗날의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여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듯이. 매일의 날씨가 달라지듯이.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고, 낮과 밤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낮은 밤을 모르고 밤은 아침을 알지 못하지만,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또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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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과 정체성은 같은 의미로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은 인격자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비인격자다.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사람이라도 정체성을 확립하면 인격자로 나아갈 수 있다. 정체성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에게 주어진 삶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란 자연이 질서를 확립해 가는 일종의 자정 작용이다. 질서가 잘 잡힌 평화로운 세상을 ‘치세’라고 부른다. 반면 질서가 흐트러진 혼돈한 세상을 ‘난세’라 부른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치세인가 난세인가를 가늠해 보고 싶다면 유유상종이 얼마큼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남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다. 남을 실망시킨 일은 생각 외로 빨리 잊힌다. 하지만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은 오래도록 이어지는 부끄러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부끄러움은 치료가 어렵다. 부끄러운 감정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난치병이다.

평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과 욕심에 달려 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좋은 평판이, 욕심을 부리는 사람에게는 나쁜 평판이 따라붙는다.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173는 말이 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평판을 남긴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과연 나의 평판은 양심과 욕심 중 어떤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가. 하루쯤 곰곰이 살펴볼 일이다.

정체성을 알아야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 내면의 혼돈이 걷히며 찾아온 평화를 여전히 혼돈 속에 있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난세에서 치세로의 전환점은 그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는 세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 가운데에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뜨거운 낙인을 쥔 사람이 자신의 손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 모르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접힌 세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잊어버린 듯하다. 폈던 손가락을 오므리고 당당하게 나의 길을 걸어갈 때, 아쉬운 일요일은 낙관적인 하루로 변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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