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겨울눈은 이미 가을에 꼴을 갖춘다. 늦여름부터 나무는 잎으로 향하는 양분을 차츰 줄여 결실과 겨울눈 만드는 데 에너지를 더 쓴다. 혹독한 시절을 견딜 어떤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나무는 겨울눈을 안전하게 만들고 나서야 낙엽을 떨어뜨린다. 이파리가 연둣빛을 상실한 채 말라간다고 해서 나무가 발달을 멈추는 건 아니다. 더 치밀하게 세포를 만드는 방식으로 겨울을 대비한다.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하듯이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이겠지. 그건 생존 전략인 동시에 일종의 신성한 의식일 수도 있다. 겨울을 무사히 건너기를 빌고 봄의 새순을 희망하는, 나무 세계의 동제 같은 것.
고사리 새순의 등장은 봄을 알린다. 노인이 된 우리 할머니는 등이 굽어 고사리순처럼 구부정했지만 어린 내 눈에는 팽나무 고목처럼 강건해 보였다. 뿌리째 먹는 봄나물 냉이는 캐야 하고 고사리는 뿌리가 상하지 않게 순만 취해야 한다고, 그러니 고사리는 캐는 게 아니라 새순을 꺾는 거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당신의 엄마한테 배웠다고 했다. 열매 맺고 나면 뿌리마저 시드는 두해살이 냉이와 달리 고사리는 여러해살이라 뿌리를 살려야 내년에도 순을 얻을 수 있다고. 어린 나는 그 애순을 모으며 식물이 싹을 내밀고 잎을 펼치고 또 말라가는 자연스러운 이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고마운 식물을 내가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그들의 질서를 인간이 함부로 훼손하지 않도록 지켜줘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 게 그 무렵이던가. 나는 당신의 눈이었을까.
생명이 눈을 틔우고 결실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시작도, 절정도, 쇠락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봄을.
어느 인류학자는 친밀한 존재를 떠나보낸 이들이 "흐르는 시간에서 비껴나 고이는 시간에 갇힌 존재"라고 했어. 죽음이라는 사건은 남겨진 이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해. 유교 상례는 애도하는 존재가 상중의 시간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도록 안식처를 제공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간은 무언가를 ‘함’보다는 ‘하지 않음’으로 채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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