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유적•유물/팔만대장경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 동안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대장경으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대장경은 불교 경전 편찬 사업 정도로 여기면 된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도 1011년부터 약 70년간의 작업을 통해1087년 초조대장경을 만들었다. 하지만 1232년 몽골의 침략에 의해 초조대장경이 불에 탄다. 또 몽골의 침략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국난 극복을 위해 두 번째로 대장경 작업에 들어가는데 초조대장경을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 16년 만에 완성한다. 완성된 경판의 숫자가 8만 개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대장경에는 ‘경장‘, ‘논쟁‘, ‘율장‘ 등이 담겨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경장, 말씀에 대한 해석을 논장,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명을 율장이라 부르는데 당시 편찬된 거의 모든 경전을 담았다고 한다. 새겨진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인데,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와 버금가는 숫자다.
팔만장의 경판을 쌓으면 백두산 높이에 이른다고 하는데, 경판 제작에 들어간 원목만 1만 그루 이상으로 추정한다. 탁월한 글씨체와 정성스러운 판각 작업으로인해 예술성의 진가를 인정받고 있는데 애초에는 강화도에서 제작했으나 현재는 해인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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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장소/창덕궁
1997년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대부분 전각들이 복원되지 않은 원형이다.

태종 때 만들어진 조선 시대 궁궐로, 경복궁과 더불어 조선의 법궁 기능을 담당했다. 주요 국왕이 창덕궁에 머물렀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탔지만 광해군에 의해 복원된 후 조선 후기에도 국왕이 주로 이곳에 머물며 국가를 운영했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구조가 확연히 다르다. 평지가 아닌 비탈진 곳에 지어졌기 때문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형태이고, 건물도 계단식이다. 일반적으로 정문이 정남쪽에 있어야 하는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위치상 서남쪽 후미진곳에 위치한다. 경복궁이 유교적 이상을 담은 정도전의 작품이라면, 창덕궁은 왕권 강화를 강조한 태종의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자연과 어우러지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 살펴야겠지만 후원을 비롯하여 왕이 머물면서 누릴 수 있는부분을 한층 배려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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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인물/김춘추

김춘추(?~661년)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신라 시대를 연 국왕으로, 탁월한 외교가로 평가받고 있다. 폐위당했던 진지왕의 손자다.
그는 왕손에, 최고급 진골귀족이었음에도 뒤늦게 정치에 등장한다. 642년 의자왕이 이끄는 백제군이 대야성에서 신라군을 격파하는데 이때 김춘추의 사위였던 깁품석과 딸이 처형당한다. 그는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아가면서 외교 행보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의 땅, 과거 고구려의 영토를 돌려달라는 역제안을 했고 협상은 실패하고 만다. 간신히 억류 생활에서 탈출한 그는 오히려 더욱 과감한 외교전에 뛰어들게 된다.

한편 김춘추는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도 승리를 거둔다.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진덕여왕의 즉위를 도모한 후 진덕여왕 사후 무열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내부적으로 왕권 강화에 주력하는 기간 동안 동북아 정세는 요동을 쳤다. 백제,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당태종이 이끄는 100만 대군이 연개소문의 고구려에 패했다. 김춘추는 김유신을 중용하여 백제와의 전투에서 지속적으로 승리했고,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0만 대군과 연합한다. 결국 5만의 군사를 파견하여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다. 백제 멸망 직전에 김춘추는 사망하는데 이후 아들 문무왕과 김유신이 삼국 통일의 숙원을 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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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4월 혁명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1960년에 벌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 혁명, 이승만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들어선다. 대한민국은 독립운동 단계에서부터 민주 공화정을 표방했고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 아래 민주 헌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헌법을 두 차례나 뜯어고치고 경쟁자인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서 사법살인을 하는 등 독재자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무리한 국정 운영으로 민심이 근본적으로 와해되는 가운데 네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는 엄청난 부정 선거를 통해 당선된다. 이를 3.15 부정선거라고 하는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의거가 일어난다. 경찰 병력이 마산 시위를 진압하면서 무차별 발포를 했고 시위 도중 실종됐던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자 마산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규탄 시위가 벌어진다.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정치 깡패들이 대학생 시위대를 습격하여 수십 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결국 다음 날인 4월 19일 중고등학생과 서울 시민 약 10만여 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온다. 이에 대응하여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무차별적인 시위 진압에 나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하지만 4월 25일 전국 대학 교수단 데모를 계기로 시위는 다시 격화됐고 미국도 하야를 권고하는 등이승만정권은 사면초가에 몰린다. 결국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면서 과도기를 거쳐 내각책임제 개헌 후 제2공화국이 수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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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 명문장/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명나라 장수 가운데서도 장세작이란 자는 특히 앞장서 철군을 주장했다. 우리가 물러나지 않자 그는 화가 난 표정으로 순변사 이빈에게 발길질까지 해댔다.
(・・・) 나(류성룡)는 다시 한 번 청했다. "병사들이 한번 물러나면 왜적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질 것이고, 주위의 백성들 또한 놀라 흩어지게 되면 임진강 북쪽도 지키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부디 좀 더 주둔하면서 형세를 판단한 후에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이에 (명나라) 제독도 그러고 했으나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물러 나오자 제독은 곧 개성으로 돌아갔고, 뒤이어 여러 부대도 개성으로물러갔다. 이제 임진강을 지키는 부대는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 관승선의 병사수백 명밖에 없었다.
그대로 동파에 머물고 있던 나는 날마다 사람을 보내 다시 진격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 제독은 이렇게 말하며 시간만 끌었다.
"날씨가 좋아져서 길이 마르면 당연히 진격할 것이오."
(・・・) 하루는 명나라 장수들이 군량이 바닥났다는 것을 핑계 삼아 제독에게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제독은 화를 내며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불러들였다. (군량 부족을 문제 삼아) 뜰아래 우리를 꿇어앉히고는큰소리로 문책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사죄하면서 제독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나라의 모습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 류성룡, 《징비록》 중

류성룡(1542년~1607년)은 임진왜란 당시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후에는 도체찰사가 되어 군사 업무를 담당했으며, 이후에는 영의정, 훈련도감 제조 등을 맡아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원조는 육전에서 전세를 만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평양성 수복 후 벽제관에서패배를 당하자 명나라 군대는 진격을 거부하고 어설픈 화의를 도모하는 등 임진왜란이 장기화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했던 조선의 답답한 처지가 반영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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