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 손으로 양육해 키운 자녀를 언제 어떻게 가정에서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나비처럼, 자식도 너무 꽉 붙잡으면 으스러진다. 우리는 역설과 씨름해야 한다. 그들이 독립하기를 원하는 동시에, 우리와 함께 살면서 근처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이다. 곁에 두는 것과 놓아주는 것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찾는 일은 스트레스를 발생시킴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가족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관계를 바꾸려는 결정은 용기를 갖고 첫발을 내디딘 사람에게 위험이 따른다. 변화는 한 사람의 결심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새로운 질서나 변화를 익히려면 심리치료뿐만 아니라 집, 그리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실생활 속에서 함께 연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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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을 가르는
세 가지 인생 자산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세 가지 기본 인생 자산에 기인한 것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범주는 ‘인간을 이루는 것’이다.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을 의미한다.

두 번째 범주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산과 소유물을 의미한다.
세 번째 범주는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즉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즉 남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인생 자산의 첫 번째 범주인 ‘인간을 이루는 것’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자연 스스로가 인간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볼 때 자연이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에 미치는 영향은 단순히 인간들이 결정한 것에 지나지 않은 나머지 두 범주에서 규정한 차이점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영향에 비해 훨씬 더 본질적이고 더 결정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외부의 상황이나 사정이 똑같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에게는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동일한 환경에 살아가는 개개인들은 각각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사람은 자신만의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가지며 단지 그러한 것에만 직접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것들은 그저 그러한 것들의 원인이 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개개인이 살아가는 세상은 각각의 관점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어서 생각의 차이에 따른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세상은 빈곤하고 진부하고 하찮은 곳이거나 혹은 풍요롭고 재미있으며 또 값진 곳이기도 한 것이다.

개개인은 마치 자신의 피부 같은 스스로의 의식 속에 들어가 있고, 오직 그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그를 도울 방법은 별로 없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지위와 부, 즉 역할의 차이와 같은 것은 아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은 오로지 인간의 의식 안에서 존재하고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의식의 수준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며, 나아가 더 본질적으로는 대개 그 형태보다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성질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 어떠한 사치와 향락이라도 멍청한 이의 아둔한 의식 속이라면, 힘든 감옥 안에서도 <돈키호테>를 썼던 세르반테스의 의식에 비하면 빈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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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비난은 기능 장애를 불러오고 우리의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만약에 우리가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과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고, 분노의 감정이 종결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슬퍼할 수 없다.

길들여지거나 친밀한 관계는 우리를 상실에 취약하게 만들 수 있지만,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람들은 바위를 산 정상으로 한 번에 완전히 밀어 올릴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심리적으로 부재하는 가족을 돌보는 데 쏟는 노력이나, 실종자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실종된 사람에 대한 소식을 끝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고난의 시간 속에서 희망과 낙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낙관적이고 창의적이며 유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모호함의 한가운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시인들은 항상 모호함이 불안감을 유발하는 동시에, 매우 매혹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걸 어느 정도는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호한 상실은 우리가 경험하는 강도 높은 스트레스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긍정적인 결과도 안겨준다. 혼란과 분명함의 결핍 속에 창의적인 생각의 기회와 해결을 위해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 방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모호한 상실은 분명히 파괴적이고 지속적인 정신적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적절한 지원과 회복력을 갖춘 일부 사람들은 이 경험을 평생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는 기회로 활용하며, 상실한 것을 애도하는 동시에 여전히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균형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모호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성에 덜 의존하게 하고 자연스러움과 변화에 더 익숙하게 한다. 그러나 이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특히나 책임지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모호한 상실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을 놓아주는 것이 과제가 된다. 우리는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우리는 한 상황에 고착되거나 정지 상태에 머무는 것을 피하고자, 그렇게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상실과 모호함 모두 인간 경험의 핵심 요소이며, 그래서 이 둘이 종종 ‘모호한 상실’로 합쳐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확실성의 부재는 일반적인 상실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므로, 유리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남겨진 가족 구성원들은 그들의 상실을 계속 이해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환자보다 종종 훨씬 더 오래 모호함을 겪는다. 그들의 임무는 안갯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위험을 무릅쓴다. 점진적으로, 그들은 상황에 익숙해져 가며 결정을 내리고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비극적인 상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무언가를 행동에 옮긴다.

우리는 끔찍한 질병이나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발생하는 커다란 모순들뿐만 아니라 현대 가정생활에서 흔히 마주치는 일상적 모순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하루하루 맞닥뜨리는 모호한 상실에 편안해지면 더 심각한 모호함을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모호한 상실의 원인이 바쁘고 부재한 부모의 경우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이 점점 더 향상되어 삶을 모방하거나 생명 연장은 물론 인공 수정까지 할 수 있게 되었고, 일과 가정생활의 병행으로 일상 속에서 부재와 존재의 계속된 혼란을 느끼는 모호한 상실 현상들이 가족 내에서 극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혼란은 증가했다. 이런 현상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와 함께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일깨워준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분명함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한 상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모호한 상황에서 명확함을 얻기를 바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듯, 이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에 빠졌을 때, 우리에게 남겨진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모호한 상실을 감수하며 살아갈 것인가이다. 우리 각자의 답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하지만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한 경우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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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인물/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1820년~1898년)은 조선 말기의 권세가이자 개혁가다. 정조 사망 이후조선은 약 60년간의 세도 정치에 들어간다. 순조-헌종-철종으로 내려오는 이 시기에 주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권력을 번갈아가면서 장악했는데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갈등을 잘 이용해서 집권에 성공한다. 철종이 사망하자 안동 김씨의 발호를 염려한 조대비가 사전에 약속한대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후사로 지명한 것이다. 그가 훗날 고종인데 당시 12살이었기 때문에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 이하응이 약 10년간 권력을 쥔 채 개혁을 주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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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할 필요 없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오랜 양식과 전통을 바꾸는 데 있어서도 자발적이고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모호한 상실 속에서 의미를 찾는 데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논리적으로 공평하고 정의로운 장소로 바라보면 모호한 상실을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자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일 것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에 맞춰 깔끔하게 떨어지는 등식 너머의 것들과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하고,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왜 나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일이 우리 행동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건 안다.

사람들은 세상이 ‘항상’ 정의로워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무작위로 겪는 상실을 장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이다.

상실에 직면하거나 다른 충격적인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필요한 건 흔한 반응이다.

자기 자신을 탓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는 사람은 종종 그들의 불행을 불운 탓으로 돌린다. 이는 모호한 상실에서도 자신을 탓하는 것보다 더 기능적인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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