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장소/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조사당벽화 등 문화재가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다.
기둥의 중앙부를 좀 더 도톰하게 만들어서 건축물의 안정감과 유려함을 더하는 배흘림기둥이 유명하고, 주심포식 건축물의 대표적인 예로 소개된다.
사실 부석사는 ‘위치의 미학‘으로 많은 학자의 찬사를 받곤 한다.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이 발원하는 자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오르기는 힘들지만 한번 오르면 잊을 수 없는 풍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찰이 산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 시대 때는 대형 사찰이 수도의 중앙에 위치했고, 절과 탑의 규모가 엄청났다. 하지만 선종이 등장하고 조선 시대불교 탄압 정책이 강화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산사가 발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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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인물/견훤
백제에서 배출한 마지막 왕답게 영웅담도 파란만장하다.

후백제를 세운 왕으로, 경상북도 상주 출신에 아버지는 아자개였다. 견훤(867년~936년)은 하급 군인 출신으로 출정하는 곳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견훤을 무너뜨렸던 것은 집안 문제였다. 큰 아들 신검이 견훤을 몰아내고 제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이때 역설적이게도 견훤은 왕건을 찾아간다. 그리고 936년 평생을 다퉈온 왕건과 함께 신검 토벌에 나선다. 결국 스스로 세운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린 후 얼마 되지 않아 깊은 고뇌 속에서 등창에 걸려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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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세 같은 건 믿지 않았지만 가급적 엄마가 바랐을 법한 모습을 따르고 싶었다. 화장할 때 입힌 옷이나 내가 고른 묘비를 두고 엄마의 영혼이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고상해 보이는, 가장자리에 아이비 문양을 돋을새김한 청동 묘비를 골랐다. 우리는 그 위에 엄마의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그리고 ‘사랑스러운 엄마이자 아내이자 단짝’이라는 문구를 새겨달라고 했다.

엄마는 나를 딱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사랑스럽다’는 말을 고를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그 단어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열정을 아우르는 말처럼 느껴졌나보다.

나는 우리집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있는 묘지를 골랐다. 언덕을 절반쯤 내려가다보면 나오는, 철문이 있는 긴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였다. 아빠는 매장을 하는 것에 두려움이 좀 있다고 고백했다. 해충 구제업자로 몇 년을 일했으니 벌레들이 앙갚음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엄마의 재를 땅에 묻는 일은 나에게 중요했다. 꽃을 가져와 놓아둘 공간이 필요했다. 쓰러질 수 있는 땅이, 주저앉을 바닥이, 아무 철이고 와서 눈물을 흘릴 풀밭과 토양이 필요했다. 마치 은행이나 도서관에 찾아간 것처럼 진열장 앞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그토록 잘 아는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고르고 고른 단어마다 초라하기 짝이 없고 허식만 가득했다. 오직 나만이 드러낼 수 있는 엄마의 특별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엄마는 단순히 주부나 엄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두 역할을 독선적인 태도로 얕잡아보았다. 양육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 곡 책 한 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랑 없이는 노래도 책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한 조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냥 겁이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모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모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런 이모가 엄마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집, 엄마의 부재가 그득한 집안을 보자 감정이 있는 대로 폭발했다. 나는 이모가 어떤 기분일지, 세 자매 중 장녀로 두 동생이 몇 년 사이 같은 병으로 죽는 걸 지켜본 심정이 어떨지 헤아려보려 했다. 세상이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 것만 같았다. 이미 고통을 느껴본 사람들과 앞으로 느낄 사람들로. 이모는 우리와 같은 부류였다. 이런 고통을 너무도 잘 알았다.

나는 음식과 와인으로 배를 가득 채우고 아빠가 계산하는 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가 기어이 감정의 마개를 열었다. 그동안 꽉 닫아두고 있었던 그 마개를. 그동안 나는 음식만이 아니라 생각마저 굶주려 있었다. 최대한 금욕적으로 지내려고, 가족에게 눈물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그렇게 막아두었던 감정이 한순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우는 나를 쳐다보는 걸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실컷 감정을 풀어놓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얼굴이 수영장 물 절반쯤은 머금은 느낌이었다. 눈도 터질 듯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나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내 방 건너 건너 손님방에서 나미 이모와 성용 오빠가 자고 있었다. 아빠와 별다른 유대감이 없는 나는, 서로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두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엄마처럼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내가 이 집의 안주인이니까.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부엌을 왔다갔다하는 동안, 날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분주하게 준비하던 엄마가 계속 떠올랐다.

잠깐이지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그들의 보살핌을 받기만 하던 내가 드디어 두 사람을 위해 작게나마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엄마가 가고 없기에 나는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엄마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재발견하기 위해 엄마의 소지품을 뒤졌고,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 엄마의 자취를 되살리려 애썼다. 나는 몹시 슬퍼서 미미한 표지라도 의미심장한 단서로 삼아 분석해내려고 발버둥쳤다.

엄마의 그림을 손에 들고 엄마가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기 전의 모습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손에 붓을 들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그려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술이 엄마를 조금은 치유해주었는지, 은미 이모의 죽음이 몰고 온 실존적 두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궁금했다. 나의 창의성이 애초에 엄마에게서 온 건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았다면 엄마도 예술가가 됐을지 궁금했다.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성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는 우리집이 꼭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편안했던 공간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실패를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구도 장식품도 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엄마가 살아 계신 동안 넘치게 듣던 이야기들을, 별의별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암환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의 이웃이 명상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형선고를 물리친 이야기. 림프샘 구석구석까지 암이 퍼졌지만 깨끗한 신장을 떠올리는 방법으로 기적을 일궈내서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인다는 이야기. 낙관적인 태도만 가진다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믿음이 충분치 않았고, 엄마에게 남조류를 억지로라도 충분히 먹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이 우리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암과 싸워 승리를 쟁취한 다른 가족들도 있지만 우리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갖가지 감정이 밀려와 우리 가슴을 찢어놓았지만 그런 패배감 또한 이상할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나는 내세 같은 건 믿지 않았지만 가급적 엄마가 바랐을 법한 모습을 따르고 싶었다. 화장할 때 입힌 옷이나 내가 고른 묘비를 두고 엄마의 영혼이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고상해 보이는, 가장자리에 아이비 문양을 돋을새김한 청동 묘비를 골랐다. 우리는 그 위에 엄마의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그리고 ‘사랑스러운 엄마이자 아내이자 단짝’이라는 문구를 새겨달라고 했다.

엄마는 나를 딱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사랑스럽다’는 말을 고를 거라고 말한 적이 있

나는 우리집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있는 묘지를 골랐다. 언덕을 절반쯤 내려가다보면 나오는, 철문이 있는 긴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였다. 아빠는 매장을 하는 것에 두려움이 좀 있다고 고백했다. 해충 구제업자로 몇 년을 일했으니 벌레들이 앙갚음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엄마의 재를 땅에 묻는 일은 나에게 중요했다. 꽃을 가져와 놓아둘 공간이 필요했다. 쓰러질 수 있는 땅이, 주저앉을 바닥이, 아무 철이고 와서 눈물을 흘릴 풀밭과 토양이 필요했다. 마치 은행이나 도서관에 찾아간 것처럼 진열장 앞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그토록 잘 아는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고르고 고른 단어마다 초라하기 짝이 없고 허식만 가득했다. 오직 나만이 드러낼 수 있는 엄마의 특별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엄마는 단순히 주부나 엄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두 역할을 독선적인 태도로 얕잡아보았다. 양육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 곡 책 한 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랑 없이는 노래도 책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한 조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냥 겁이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모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모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런 이모가 엄마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집, 엄마의 부재가 그득한 집안을 보자 감정이 있는 대로 폭발했다. 나는 이모가 어떤 기분일지, 세 자매 중 장녀로 두 동생이 몇 년 사이 같은 병으로 죽는 걸 지켜본 심정이 어떨지 헤아려보려 했다. 세상이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 것만 같았다. 이미 고통을 느껴본 사람들과 앞으로 느낄 사람들로. 이모는 우리와 같은 부류였다. 이런 고통을 너무도 잘 알았다.

나는 음식과 와인으로 배를 가득 채우고 아빠가 계산하는 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가 기어이 감정의 마개를 열었다. 그동안 꽉 닫아두고 있었던 그 마개를. 그동안 나는 음식만이 아니라 생각마저 굶주려 있었다. 최대한 금욕적으로 지내려고, 가족에게 눈물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그렇게 막아두었던 감정이 한순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우는 나를 쳐다보는 걸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실컷 감정을 풀어놓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얼굴이 수영장 물 절반쯤은 머금은 느낌이었다. 눈도 터질 듯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나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내 방 건너 건너 손님방에서 나미 이모와 성용 오빠가 자고 있었다. 아빠와 별다른 유대감이 없는 나는, 서로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두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엄마처럼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내가 이 집의 안주인이니까.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부엌을 왔다갔다하는 동안, 날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분주하게 준비하던 엄마가 계속 떠올랐다.

잠깐이지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그들의 보살핌을 받기만 하던 내가 드디어 두 사람을 위해 작게나마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엄마가 가고 없기에 나는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엄마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재발견하기 위해 엄마의 소지품을 뒤졌고,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 엄마의 자취를 되살리려 애썼다. 나는 몹시 슬퍼서 미미한 표지라도 의미심장한 단서로 삼아 분석해내려고 발버둥쳤다.

엄마의 그림을 손에 들고 엄마가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기 전의 모습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손에 붓을 들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그려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술이 엄마를 조금은 치유해주었는지, 은미 이모의 죽음이 몰고 온 실존적 두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궁금했다. 나의 창의성이 애초에 엄마에게서 온 건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았다면 엄마도 예술가가 됐을지 궁금했다.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성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는 우리집이 꼭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편안했던 공간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실패를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구도 장식품도 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엄마가 살아 계신 동안 넘치게 듣던 이야기들을, 별의별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암환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의 이웃이 명상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형선고를 물리친 이야기. 림프샘 구석구석까지 암이 퍼졌지만 깨끗한 신장을 떠올리는 방법으로 기적을 일궈내서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인다는 이야기. 낙관적인 태도만 가진다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믿음이 충분치 않았고, 엄마에게 남조류를 억지로라도 충분히 먹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이 우리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암과 싸워 승리를 쟁취한 다른 가족들도 있지만 우리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갖가지 감정이 밀려와 우리 가슴을 찢어놓았지만 그런 패배감 또한 이상할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우울처럼 슬픔도 가장 간단한 일조차 해내기 힘들게 했다. 이 나라의 온갖 좋은 것이 우리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우리는 멋진 경관에 무감각했고 무감동했으며 조용히 비참했고 서로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식당 종업원으로 일한 경력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진 않지만 그 일을 하면서 어떤 명예심을 느꼈다. 나는 동료들을 사랑했고 그들과 한마음이 되어 고객?그루폰 이용자, 음식에 까탈스러운 사람, 스테이크를 웰던으로 구워달라는 사람, 생선에서 비린내가 많이 나냐고 묻는 사람?을 경멸하는 일을 사랑했다. 시간을 현금으로 바꾸어 그렇게 온종일 마실 것을 날라 번 돈을, 밤새도록 바에서 마실 것을 주문하면서 쫄딱 날려버리는 일도 꽤 즐거웠다. 단점은 그 경험 때문에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면 편하게 즐기지만은 못하게 됐다는 점이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면 강박적으로 접시들을 얌전히 하나로 포개놓았고, 서비스가 터무니없이 나빠도 25퍼센트 팁을 주고 나왔으며, 객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면 단순히 내 입맛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음식을 되돌려보내는 짓은 절대 안 하게 됐다. 그래서 아빠가 왜 샐러드를 먹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걸 냅킨에 싸서 버렸으면 버렸지 소란을 피울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빠를 깨진 접시에 비유했다고도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지는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머릿속에 그런 말들이 계속 떠다녔다. 나도 안다. 내가 자라면서 받아온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고, 나를 가장 사랑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어쩌면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것을. 그때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6개월 동안 완벽한 딸이 되려고, 10대 때 일으킨 말썽을 벌충하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그런 내게 아빠는 마치 그 말이 엄마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한 것이다. 그 아이를 조심해, 당신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할 거야, 라고. 아빠가 편안한 아파트 침대에서 잠자는 3주 동안 병원 소파에서 잠을 잔 사람이 바로 나란 걸 엄마는 알았을까? 요강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해대는 아빠 대신 쭉 그걸 비운 사람이 나라는 것은? 엉엉 우는 아빠 때문에 나는 번번이 감정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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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사건/병자호란

ㅇ 최명길은 무작정 화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안도와 황해도를 구원할 방략을 제시했고 화의를 위해서라도 적절한 때 기습전 등을 벌여 전세를 만회하고 싶어 했다. 굴욕적인 화의가 아닌 자주적인 화의를 도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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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끝나고 다시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다. 결혼식이 엄마의 병을 기적적으로 낫게 하거나 아니면 엄마가 풍선처럼 허공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는데, 막상 결혼식이 끝나고 나니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똑같은 병, 똑같은 증상, 똑같은 약, 똑같이 고요한 집.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 곁에 가만히 누워 엄마 손을 잡고 텔레비전만 봤다. 이제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날이 갈수록 기력이 떨어져 우리가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는 잠을 더 자주 잤고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호스피스가 병원용 침대를 가져와 안방에 놓았지만 우리는 엄마를 그 침대로 옮기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너무 우울해질 것 같아서였다.

아빠는 부엌에서 컴퓨터를 했고, 엄마와 나는 침대에 누워 〈인사이드 디 액터스 스튜디오〉*를 시청했다. 〈법과 질서〉**에 출연하는 마리스카 하지테이가 게스트로 나왔다. 진행자 제임스 립튼은 이 배우에게 어머니의 때 이른 죽음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아름답고 냉정한 성인 여자가 곧장 눈물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추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엄마라는 말 한마디의 파급력은 그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몇 년 뒤에 똑같은 감정과 맞닥뜨릴 내 모습을 상상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벌에 쏘이는 그 순간부터, 나란 존재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남은 평생을 벌침이 박힌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내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도 울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으며 서로의 티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한바탕 서럽게 흐느꼈다. 우리는 둘 다 〈법과 질서〉를 본 적이 없고 이 배우가 누군지조차 몰랐지만 마치 나의 미래를, 평생 내 안에 가지고 다닐 고통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통증이 곧 지나갈 거라고 안심시키는 말을 하고 또 하면서 엄마를 붙들고 있는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엄마가 깊은 잠에 빠졌다. 엄마를 사이에 두고 아빠와 같이 셋이 나란히 누워 있자니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의사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 의사는 엄마가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게 하겠다고, 그게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우리를 안심시켰는데…… 엄마 눈을 똑바로 보며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을 했건만, 그 약속은 이토록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엄마의 마지막 말은고통이었다.

엄마가 죽은듯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다가 아빠와 나는 갑자기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전 열어보지도 않던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검정 쓰레기봉투에 마구 쓸어 담았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할 일을 미리 해버리려는 것처럼. 엄마가 진짜로 죽고 나면 그 일이 더 크고 무거워질 걸 아는 것처럼.

아빠는 서럽게 울다가 엄마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통 때였다면 그 말에 충격을 받았겠지만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나는 아빠를 원망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엄마의 임종을 못 지킬까봐 우리는 며칠째 집밖을 나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빠가 밤에 잠은 어떻게 자는지 궁금했다.
"엄마가 아니라 내가 암에 걸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아빠의 등에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생각 안 해요." 사실 내 추악한 마음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빠여야 했다. 엄마가 아빠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가는 건 생각조차 못했다. 엄마와 나는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면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재혼을 할지. 아니면 우리끼리 같이 살지.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아빠와 이야기 나눠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으니까.

나는 마지막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건 고통이 아닌 다른 말을. 호스피스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죽어가는 사람이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경우도 있다고, 마지막 순간에 잠깐 정신이 확 돌아와 내 눈을 보고 마지막 이별의 말 같은 걸 할 수도 있다고.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내가 계속 옆에 있어야 했다.
"엄마, 거기 있어?" 내가 속삭였다. "내 말 들려?"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려 엄마의 파자마 위로 뚝뚝 떨어졌다.
"엄마, 제발 눈 좀 떠봐." 나는 엄마를 깨울 작정이라도 한 듯이 소리쳤다. "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제발, 엄마. 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엄마! 엄마!"
나는 엄마의 언어로, 모국어로 절규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뱉은 단어를. 자동차에 깔린 아이를 구하려고 차를 번쩍 들어올릴 만큼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엄마처럼, 어쩌면 우리 엄마도 아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번쩍 눈뜰지도 몰랐다. 아주 잠깐이라도 눈을 번쩍 뜨고 내게 작별인사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다 잘될 거라는 말을 전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엄마의 마지막 말이고통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만 아니라면 무슨 말이든 다 좋았다.
엄마! 엄마!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반복해서 외치던 그 말. 목구멍 깊은 데서 터져나오는 원초적인 한국식 흐느낌. 한국 영화와 연속극에서 듣던 바로 그 소리. 엄마가 자기 엄마와 동생을 위해 울면서 냈던 그 소리. 고통에 찬 비브라토로 시작해 점점 스타카토로 이어지다 나중에는 작은 돌기에 통통 부딪히며 떨어지듯이 끝나는 그 소리.
하지만 엄마는 눈을 뜨지 않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무거운 숨만 몰아쉬었고, 들숨소리는 갈수록 뜨문뜨문해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가만히 반듯하게 누운 엄마는 지난 며칠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빠도 방문을 등지고 엄마를 향해 모로 누워 있었다. 나는 침대 발치를 돌아서 반대쪽에 누웠다. 시계는 새벽 다섯시를 가리켰다. 바깥에서는 숲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하루가 우리를 위협하듯 시작되고 있었다.

얼굴을 향해 달려든 햇살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꼭 약을 한 기분이었다. 방금 일어난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혹시 내 얼굴에 다 쓰여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을 땐 어쩐지 그 역시 잘못된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다시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 미소를 짓고 웃고 먹는다면 그것도 잘못된 일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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