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세 같은 건 믿지 않았지만 가급적 엄마가 바랐을 법한 모습을 따르고 싶었다. 화장할 때 입힌 옷이나 내가 고른 묘비를 두고 엄마의 영혼이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고상해 보이는, 가장자리에 아이비 문양을 돋을새김한 청동 묘비를 골랐다. 우리는 그 위에 엄마의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그리고 ‘사랑스러운 엄마이자 아내이자 단짝’이라는 문구를 새겨달라고 했다.
엄마는 나를 딱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사랑스럽다’는 말을 고를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그 단어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열정을 아우르는 말처럼 느껴졌나보다.
나는 우리집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있는 묘지를 골랐다. 언덕을 절반쯤 내려가다보면 나오는, 철문이 있는 긴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였다. 아빠는 매장을 하는 것에 두려움이 좀 있다고 고백했다. 해충 구제업자로 몇 년을 일했으니 벌레들이 앙갚음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엄마의 재를 땅에 묻는 일은 나에게 중요했다. 꽃을 가져와 놓아둘 공간이 필요했다. 쓰러질 수 있는 땅이, 주저앉을 바닥이, 아무 철이고 와서 눈물을 흘릴 풀밭과 토양이 필요했다. 마치 은행이나 도서관에 찾아간 것처럼 진열장 앞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그토록 잘 아는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고르고 고른 단어마다 초라하기 짝이 없고 허식만 가득했다. 오직 나만이 드러낼 수 있는 엄마의 특별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엄마는 단순히 주부나 엄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두 역할을 독선적인 태도로 얕잡아보았다. 양육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 곡 책 한 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랑 없이는 노래도 책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한 조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냥 겁이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모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모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런 이모가 엄마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집, 엄마의 부재가 그득한 집안을 보자 감정이 있는 대로 폭발했다. 나는 이모가 어떤 기분일지, 세 자매 중 장녀로 두 동생이 몇 년 사이 같은 병으로 죽는 걸 지켜본 심정이 어떨지 헤아려보려 했다. 세상이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 것만 같았다. 이미 고통을 느껴본 사람들과 앞으로 느낄 사람들로. 이모는 우리와 같은 부류였다. 이런 고통을 너무도 잘 알았다.
나는 음식과 와인으로 배를 가득 채우고 아빠가 계산하는 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가 기어이 감정의 마개를 열었다. 그동안 꽉 닫아두고 있었던 그 마개를. 그동안 나는 음식만이 아니라 생각마저 굶주려 있었다. 최대한 금욕적으로 지내려고, 가족에게 눈물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그렇게 막아두었던 감정이 한순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우는 나를 쳐다보는 걸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실컷 감정을 풀어놓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얼굴이 수영장 물 절반쯤은 머금은 느낌이었다. 눈도 터질 듯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나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내 방 건너 건너 손님방에서 나미 이모와 성용 오빠가 자고 있었다. 아빠와 별다른 유대감이 없는 나는, 서로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두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엄마처럼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내가 이 집의 안주인이니까.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부엌을 왔다갔다하는 동안, 날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분주하게 준비하던 엄마가 계속 떠올랐다.
잠깐이지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그들의 보살핌을 받기만 하던 내가 드디어 두 사람을 위해 작게나마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엄마가 가고 없기에 나는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엄마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재발견하기 위해 엄마의 소지품을 뒤졌고,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 엄마의 자취를 되살리려 애썼다. 나는 몹시 슬퍼서 미미한 표지라도 의미심장한 단서로 삼아 분석해내려고 발버둥쳤다.
엄마의 그림을 손에 들고 엄마가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기 전의 모습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손에 붓을 들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그려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술이 엄마를 조금은 치유해주었는지, 은미 이모의 죽음이 몰고 온 실존적 두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궁금했다. 나의 창의성이 애초에 엄마에게서 온 건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았다면 엄마도 예술가가 됐을지 궁금했다.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성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는 우리집이 꼭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편안했던 공간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실패를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구도 장식품도 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엄마가 살아 계신 동안 넘치게 듣던 이야기들을, 별의별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암환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의 이웃이 명상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형선고를 물리친 이야기. 림프샘 구석구석까지 암이 퍼졌지만 깨끗한 신장을 떠올리는 방법으로 기적을 일궈내서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인다는 이야기. 낙관적인 태도만 가진다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믿음이 충분치 않았고, 엄마에게 남조류를 억지로라도 충분히 먹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이 우리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암과 싸워 승리를 쟁취한 다른 가족들도 있지만 우리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갖가지 감정이 밀려와 우리 가슴을 찢어놓았지만 그런 패배감 또한 이상할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나는 내세 같은 건 믿지 않았지만 가급적 엄마가 바랐을 법한 모습을 따르고 싶었다. 화장할 때 입힌 옷이나 내가 고른 묘비를 두고 엄마의 영혼이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고상해 보이는, 가장자리에 아이비 문양을 돋을새김한 청동 묘비를 골랐다. 우리는 그 위에 엄마의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그리고 ‘사랑스러운 엄마이자 아내이자 단짝’이라는 문구를 새겨달라고 했다.
엄마는 나를 딱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사랑스럽다’는 말을 고를 거라고 말한 적이 있
나는 우리집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있는 묘지를 골랐다. 언덕을 절반쯤 내려가다보면 나오는, 철문이 있는 긴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였다. 아빠는 매장을 하는 것에 두려움이 좀 있다고 고백했다. 해충 구제업자로 몇 년을 일했으니 벌레들이 앙갚음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엄마의 재를 땅에 묻는 일은 나에게 중요했다. 꽃을 가져와 놓아둘 공간이 필요했다. 쓰러질 수 있는 땅이, 주저앉을 바닥이, 아무 철이고 와서 눈물을 흘릴 풀밭과 토양이 필요했다. 마치 은행이나 도서관에 찾아간 것처럼 진열장 앞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그토록 잘 아는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고르고 고른 단어마다 초라하기 짝이 없고 허식만 가득했다. 오직 나만이 드러낼 수 있는 엄마의 특별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엄마는 단순히 주부나 엄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두 역할을 독선적인 태도로 얕잡아보았다. 양육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 곡 책 한 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랑 없이는 노래도 책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한 조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냥 겁이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모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모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런 이모가 엄마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집, 엄마의 부재가 그득한 집안을 보자 감정이 있는 대로 폭발했다. 나는 이모가 어떤 기분일지, 세 자매 중 장녀로 두 동생이 몇 년 사이 같은 병으로 죽는 걸 지켜본 심정이 어떨지 헤아려보려 했다. 세상이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 것만 같았다. 이미 고통을 느껴본 사람들과 앞으로 느낄 사람들로. 이모는 우리와 같은 부류였다. 이런 고통을 너무도 잘 알았다.
나는 음식과 와인으로 배를 가득 채우고 아빠가 계산하는 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가 기어이 감정의 마개를 열었다. 그동안 꽉 닫아두고 있었던 그 마개를. 그동안 나는 음식만이 아니라 생각마저 굶주려 있었다. 최대한 금욕적으로 지내려고, 가족에게 눈물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그렇게 막아두었던 감정이 한순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우는 나를 쳐다보는 걸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실컷 감정을 풀어놓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얼굴이 수영장 물 절반쯤은 머금은 느낌이었다. 눈도 터질 듯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나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내 방 건너 건너 손님방에서 나미 이모와 성용 오빠가 자고 있었다. 아빠와 별다른 유대감이 없는 나는, 서로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두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엄마처럼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내가 이 집의 안주인이니까.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부엌을 왔다갔다하는 동안, 날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분주하게 준비하던 엄마가 계속 떠올랐다.
잠깐이지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그들의 보살핌을 받기만 하던 내가 드디어 두 사람을 위해 작게나마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엄마가 가고 없기에 나는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엄마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재발견하기 위해 엄마의 소지품을 뒤졌고,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 엄마의 자취를 되살리려 애썼다. 나는 몹시 슬퍼서 미미한 표지라도 의미심장한 단서로 삼아 분석해내려고 발버둥쳤다.
엄마의 그림을 손에 들고 엄마가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기 전의 모습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손에 붓을 들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그려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술이 엄마를 조금은 치유해주었는지, 은미 이모의 죽음이 몰고 온 실존적 두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궁금했다. 나의 창의성이 애초에 엄마에게서 온 건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았다면 엄마도 예술가가 됐을지 궁금했다.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성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는 우리집이 꼭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편안했던 공간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실패를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구도 장식품도 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엄마가 살아 계신 동안 넘치게 듣던 이야기들을, 별의별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암환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의 이웃이 명상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형선고를 물리친 이야기. 림프샘 구석구석까지 암이 퍼졌지만 깨끗한 신장을 떠올리는 방법으로 기적을 일궈내서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인다는 이야기. 낙관적인 태도만 가진다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믿음이 충분치 않았고, 엄마에게 남조류를 억지로라도 충분히 먹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이 우리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암과 싸워 승리를 쟁취한 다른 가족들도 있지만 우리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갖가지 감정이 밀려와 우리 가슴을 찢어놓았지만 그런 패배감 또한 이상할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우울처럼 슬픔도 가장 간단한 일조차 해내기 힘들게 했다. 이 나라의 온갖 좋은 것이 우리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우리는 멋진 경관에 무감각했고 무감동했으며 조용히 비참했고 서로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식당 종업원으로 일한 경력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진 않지만 그 일을 하면서 어떤 명예심을 느꼈다. 나는 동료들을 사랑했고 그들과 한마음이 되어 고객?그루폰 이용자, 음식에 까탈스러운 사람, 스테이크를 웰던으로 구워달라는 사람, 생선에서 비린내가 많이 나냐고 묻는 사람?을 경멸하는 일을 사랑했다. 시간을 현금으로 바꾸어 그렇게 온종일 마실 것을 날라 번 돈을, 밤새도록 바에서 마실 것을 주문하면서 쫄딱 날려버리는 일도 꽤 즐거웠다. 단점은 그 경험 때문에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면 편하게 즐기지만은 못하게 됐다는 점이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면 강박적으로 접시들을 얌전히 하나로 포개놓았고, 서비스가 터무니없이 나빠도 25퍼센트 팁을 주고 나왔으며, 객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면 단순히 내 입맛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음식을 되돌려보내는 짓은 절대 안 하게 됐다. 그래서 아빠가 왜 샐러드를 먹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걸 냅킨에 싸서 버렸으면 버렸지 소란을 피울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빠를 깨진 접시에 비유했다고도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지는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머릿속에 그런 말들이 계속 떠다녔다. 나도 안다. 내가 자라면서 받아온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고, 나를 가장 사랑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어쩌면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것을. 그때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6개월 동안 완벽한 딸이 되려고, 10대 때 일으킨 말썽을 벌충하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그런 내게 아빠는 마치 그 말이 엄마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한 것이다. 그 아이를 조심해, 당신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할 거야, 라고. 아빠가 편안한 아파트 침대에서 잠자는 3주 동안 병원 소파에서 잠을 잔 사람이 바로 나란 걸 엄마는 알았을까? 요강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해대는 아빠 대신 쭉 그걸 비운 사람이 나라는 것은? 엉엉 우는 아빠 때문에 나는 번번이 감정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