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장소/창덕궁
1997년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대부분 전각들이 복원되지 않은 원형이다.

태종 때 만들어진 조선 시대 궁궐로, 경복궁과 더불어 조선의 법궁 기능을 담당했다. 주요 국왕이 창덕궁에 머물렀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탔지만 광해군에 의해 복원된 후 조선 후기에도 국왕이 주로 이곳에 머물며 국가를 운영했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구조가 확연히 다르다. 평지가 아닌 비탈진 곳에 지어졌기 때문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형태이고, 건물도 계단식이다. 일반적으로 정문이 정남쪽에 있어야 하는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위치상 서남쪽 후미진곳에 위치한다. 경복궁이 유교적 이상을 담은 정도전의 작품이라면, 창덕궁은 왕권 강화를 강조한 태종의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자연과 어우러지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 살펴야겠지만 후원을 비롯하여 왕이 머물면서 누릴 수 있는부분을 한층 배려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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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인물/김춘추

김춘추(?~661년)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신라 시대를 연 국왕으로, 탁월한 외교가로 평가받고 있다. 폐위당했던 진지왕의 손자다.
그는 왕손에, 최고급 진골귀족이었음에도 뒤늦게 정치에 등장한다. 642년 의자왕이 이끄는 백제군이 대야성에서 신라군을 격파하는데 이때 김춘추의 사위였던 깁품석과 딸이 처형당한다. 그는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아가면서 외교 행보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의 땅, 과거 고구려의 영토를 돌려달라는 역제안을 했고 협상은 실패하고 만다. 간신히 억류 생활에서 탈출한 그는 오히려 더욱 과감한 외교전에 뛰어들게 된다.

한편 김춘추는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도 승리를 거둔다.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진덕여왕의 즉위를 도모한 후 진덕여왕 사후 무열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내부적으로 왕권 강화에 주력하는 기간 동안 동북아 정세는 요동을 쳤다. 백제,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당태종이 이끄는 100만 대군이 연개소문의 고구려에 패했다. 김춘추는 김유신을 중용하여 백제와의 전투에서 지속적으로 승리했고,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0만 대군과 연합한다. 결국 5만의 군사를 파견하여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다. 백제 멸망 직전에 김춘추는 사망하는데 이후 아들 문무왕과 김유신이 삼국 통일의 숙원을 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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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4월 혁명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1960년에 벌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 혁명, 이승만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들어선다. 대한민국은 독립운동 단계에서부터 민주 공화정을 표방했고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 아래 민주 헌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헌법을 두 차례나 뜯어고치고 경쟁자인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서 사법살인을 하는 등 독재자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무리한 국정 운영으로 민심이 근본적으로 와해되는 가운데 네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는 엄청난 부정 선거를 통해 당선된다. 이를 3.15 부정선거라고 하는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의거가 일어난다. 경찰 병력이 마산 시위를 진압하면서 무차별 발포를 했고 시위 도중 실종됐던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자 마산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규탄 시위가 벌어진다.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정치 깡패들이 대학생 시위대를 습격하여 수십 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결국 다음 날인 4월 19일 중고등학생과 서울 시민 약 10만여 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온다. 이에 대응하여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무차별적인 시위 진압에 나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하지만 4월 25일 전국 대학 교수단 데모를 계기로 시위는 다시 격화됐고 미국도 하야를 권고하는 등이승만정권은 사면초가에 몰린다. 결국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면서 과도기를 거쳐 내각책임제 개헌 후 제2공화국이 수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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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 명문장/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명나라 장수 가운데서도 장세작이란 자는 특히 앞장서 철군을 주장했다. 우리가 물러나지 않자 그는 화가 난 표정으로 순변사 이빈에게 발길질까지 해댔다.
(・・・) 나(류성룡)는 다시 한 번 청했다. "병사들이 한번 물러나면 왜적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질 것이고, 주위의 백성들 또한 놀라 흩어지게 되면 임진강 북쪽도 지키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부디 좀 더 주둔하면서 형세를 판단한 후에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이에 (명나라) 제독도 그러고 했으나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물러 나오자 제독은 곧 개성으로 돌아갔고, 뒤이어 여러 부대도 개성으로물러갔다. 이제 임진강을 지키는 부대는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 관승선의 병사수백 명밖에 없었다.
그대로 동파에 머물고 있던 나는 날마다 사람을 보내 다시 진격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 제독은 이렇게 말하며 시간만 끌었다.
"날씨가 좋아져서 길이 마르면 당연히 진격할 것이오."
(・・・) 하루는 명나라 장수들이 군량이 바닥났다는 것을 핑계 삼아 제독에게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제독은 화를 내며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불러들였다. (군량 부족을 문제 삼아) 뜰아래 우리를 꿇어앉히고는큰소리로 문책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사죄하면서 제독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나라의 모습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 류성룡, 《징비록》 중

류성룡(1542년~1607년)은 임진왜란 당시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후에는 도체찰사가 되어 군사 업무를 담당했으며, 이후에는 영의정, 훈련도감 제조 등을 맡아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원조는 육전에서 전세를 만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평양성 수복 후 벽제관에서패배를 당하자 명나라 군대는 진격을 거부하고 어설픈 화의를 도모하는 등 임진왜란이 장기화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했던 조선의 답답한 처지가 반영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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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섬’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이지만 바닷가에 거무스름한 바위들이 있는 한적한 곳이라서 ‘검은 섬’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섬은 아니다.

네루다가 원래 수집벽이 있어 갖가지 물건을 소장하고 있었던 데다 돈이 생길 때마다 시인다운 상상력을 가미해 집을 계속 증축하면서 이슬라 네그라 집은 일약 명소가 되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해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마을 자체도 조그만 휴양지로 변했다. 네루다가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민중 시인으로 이름이 높고 그의 무덤이 집 앞,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는 점도 이슬라 네그라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스카르메타의 삶은 그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소설과 시나리오 창작을 병행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몸이 근질근질해 한 가지 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데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 부조리를 진지하고 침울하게 성찰하고 고발하는 데 주력한 당시 칠레 문학과는 달리, 첫 단편집 『열정』을 썼을 때부터 생의 활력을 바탕으로 사회와 인생을 조망하는 문학을 지향했다. 문학은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하기보다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것이니, 삶의 활력과 즐거움도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가벼운’ 네루다 이미지는 분명 파격이었다. 네루다의 인생 역정이나 작품은 그에게 ‘무거운’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스페인 내전 이래의 반파시스트 운동, 공산당 입당 및 상원 의원으로서의 정치 활동, 정치적 탄압으로 인한 망명 경험 등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고,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사회를 조망한 초유의 대서사시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1950)를 쓴 네루다에게 투사의 이미지가 고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스카르메타가 내세운 친근한 이미지의 네루다가 사실을 왜곡한 것은 아니다.

좀 더 찬찬히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들여다보면, 마리오가 시를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정도로 네루다에게 영향받았음을 알게 된다. 작중의 네루다가 메타포의 뜻을 가르쳐 주기 위해 비를 하늘이 우는 것이라 비유해서 설명하고, 바다를 관찰하면 메타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자, 마리오는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따분한 일상 혹은 평범한 삶을 시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준 네루다야말로 진정한 시인임을 시사한 대목이다. 이처럼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을 때 마리오는 ‘말’을 할 줄 아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마리오가 시인으로 변신하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네루다가 파리에서 병이 들어 이슬라 네그라가 그립다는 편지를 보내자, 마리오는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따스한 위로를 담아 송가 한 편을 지어 보낸다. 네루다가 민중 시인으로 변신하면서 삶의 지표로 삼았던, 인간들끼리의 진정한 연대가 이 시 한 편을 통해 성취된 것이다.

이슬라 네그라의 소리가 그립다는 네루다의 부탁에 따라 마리오가 한 녹음은 가히 이 소설의 백미다. 그 녹음에는 종소리,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벌집의 윙윙거림 등 네루다에게 시상을 떠올려 주던 자연의 소리가 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원하는 소리를 얻지 못해 성질을 부리는 마리오의 소리도 담겨 있다. 상스러운 욕지거리지만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소리다. 네루다와의 우정을 지키려고 아등바등하는 인간미 넘치는 소음이기 때문이다. 이 녹음은 네루다가 파리에 간 뒤 태어난 마리오 아들의 울음소리로 막을 내린다. 네루다의 시가 사랑의 씨앗을 뿌리더니, 새 생명이라는 열매까지 맺었다는 설정이야말로 한 시인에게 표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일 것이다. 시가 문학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삶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여운이 남는 이런 감동 때문에 스카르메타 스스로도 오랫동안 남을 작품이라고 꼽는 것일 테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잔잔하면서 진한 감동 외에도 재치 넘치는 묘사와 대화, 해학적인 성 묘사, 순수함이 빚어낸 각종 일화 등으로 해서 소설을 읽는 재미 또한 그만이다.

다만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작품의 성격이 번역에서도 느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음을 밝혀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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