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평점 :
시대의 우울함을 읽는 것은 모두에게 간절하게 필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픈 곳을 직시하면 치유할 곳을 알게 된다. 시대가 나아갈 방향, 좀 더 발전적인 조건들, 이런 것들이 간절하게 필요하다. 그것이 인간이 아닌가? 그렇지만 제대로 시대의 우울함을 읽는 사람이 흔치 않다. 사회가 인정하는 실천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정한 시대의 우울함과 사명에 다가가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곧 시대의 퇴물이 될테지. 이 ‘시대의 우울함’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시대의 어른이 얼마나 있느냐로 그 사회를 평가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 사회는 이 어른들이 얼마나 있을까? 시대의 우울함을 시대의 어른들에게 듣고 싶다. 간절하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겪은 역사적 절망은 풍요로운 시대의 우울함(!)을 낳았다. 위안부 문제, 분단 문제, 자본주의의 문제, 정치 탄압 문제까지... 이 열거가 뜨겁게 보이는가, 지루하게 읽히는가. 우리 시대의 문제는 이 질문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우울함 불감증에 있을 것이고 경각심 없이 지루해 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것에 우선하여 자신의 생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여기거나 내 생존만 보장되면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치열하게 구분하자면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문제 삼겠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친일파가 그러했고 나치가 그러했다. 심지어 그들은 이것을 과한 비유라고 생각한다는 사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사실도 놀랍도록 흡사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겐 칸트와 이 사람들의 거리보다 원숭이와 이 사람들의 거리가 더 가까워 보인다.
드물지만 우리에게도 시대의 어른은 있고, 그 중 가장 진보적인 어른이 서경식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인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는데 ‘국민, 국가, 애국심’이 내포하는 폭력에 대해 이 어른이 아니었으면 생각하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다. 진보적인 사람들도 국가라는 틀 안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리면 간단하다. 게다가 서경식 선생을 읽다보면 이 시대는 선생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시대에서 조차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시대의 원숭이들이 이 시대의 어른 행세를 하는 모습도 종종 발견하거니와 새로운 원숭이들도 심심치 않게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는 그리 성숙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이 시대의 우울함의 핵심이다. 시대의 우울함을 더 얘기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서경식 선생의 저작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2006)라고 생각한다. 이 저작은 ‘쁘리모 레비’를 처음 내게 소개하였고, ‘아우슈비츠’와 그 안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였다. 책은 서경식 선생이 ‘쁘리모 레비’의 삶과 죽음을 찾아 가는 여행기 형식이다. 한국판 서문에서 서경식 선생은 “이 책은 쁘리모 레비라는 드문 인물과 나의 대화로 이뤄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책이 흔한 여행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서경식 선생의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책임을 보여준다.
2008년 책을 접한 후 나는 지금도 주변에 이 책을 추천하고, 함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를 권한다. 내게 이 두 권의 책은 2008년 이후 내 삶의 방향을 정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나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삶이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흐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버릴 수가 없다(사실 그 소망이 별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전까지 나는 원숭이와 비슷해서 삶을 희망으로만 보았고, 원하는 것은 노력한 만큼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 크기가 얼마나 컸던지 내 진심이 통하지 않았을 때, 내 주변이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삶이 희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때 우주가 무너지는 절망을 맛보았다. 우주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던 바로 그 때,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정확히 그 지점에서 레비는 조용히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서경식 선생은 나지막이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우주의 붕괴는 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하찮았다. 비로소 난 원숭이에서 칸트 쪽으로 작은 한 걸음 걸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그 때 이 책을 만난 것을 운명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쁘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다. 생존 이후 수용소에서 겪은 자신의 체험을 증언한 위대한 증언가다. 그리고, 1987년에 자살했다. 우리는 그의 절망의 심연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동료의 죽음에 무감각한 눈을 거두고, 하루 더 살아남았음에 무감각한 눈을 꿈벅이고,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간 사회는 계속되고 있음에 절망하는 것을. 무엇이 인간인지 끊임없이 성찰한 진짜 시대의 어른이 쁘리모 레비리라.
“단지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대다수는 이런 생각이었다) 체험하고 인내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지녔던 것이 나를 도와준 것이다. 그리고 가장 괴롭고 힘든 나날에도 친구와 나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을 집요하게 계속 품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완전한 굴복 상태와 도덕적 타락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었다.”(p.40)
이것이 인간인가. 절망의 나락에서 ‘그래도 인간이다’는 생각을 품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쉽게 얘기할 수 없다. 인간은 나약하고, 쉽게 원숭이로 퇴화한다. 잔혹함에,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우리는 얼마나 쉽게 그것을 내면화하는가. 서경식 선생은 쁘리모 레비 시대의 끔찍한 정치폭력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 경감되기는커녕 절망적으로 일상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아주 작은 신호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고 말한다. 나는 종종 지나치게 예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선생의 이 말을 떠올린다.
지금 우리 시대를 보자. 정치, 사회, 문화 어느 것 성숙하지 않은 시대를. 절대적인 경제적 수준이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과연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천진난만하게 말해도 되는지. <소금꽃나무>에서 김진숙은 취조 당하던 당시를 이렇게 얘기한다.
“그들 중엔 껌도 씹었고, 자기 딸 얘기도 했고, 지리산 대원사 계곡에서 좆 내놓고 미역 감은 얘기도 했다.(중략)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입에서 나는 김치 냄새조차 절망이 되어 갔다. 저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간이 인간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그 몸서리쳐지는 사실이,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온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절망이었다.”(<소금꽃나무>, p.29~30)
쁘리모 레비의 절망은 김진숙에게까지 통했다. 여기서, 분노하게 된다. 결국 이 시대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 시대의 그림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사이에 윤동주가 있고 나치가 있으며, 한국 민주화에 투신했던 서경식의 두 형이 있다. 그리고 우리.
“패배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일이다. 주어진 명령을 모두 실행하고, 배급만 먹으며, 수용소의 규칙이나 노동규율을 지키면 그만이다.”(p.123)
이 문장이 몇 단어만 바꾸면 아주 간단하게 내 삶의 문장이 된다.
“패배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일이다. 주어진 업무를 모두 실행하고, 월급만 받으며, 상사의 규칙이나 지시에 따르면 그만이다.”
내 삶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내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그저 부속의 삶이고 한정된 자유감옥 안의 삶이다. 그 시절 적은 악마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을 억압했지만 이 시절 적은 세련된 모습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것을 우리는 자유라 믿고, 삶을 희망한다. 도대체 무엇이 현명한 것이냐. 진정한 인간성은 물 속에서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대해 생각하고, 흐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물의 흐름을 거스를 줄 아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시대의 흐름은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거슬러야 한다. 거슬러야 한다고 책이 말해주고 있다. 서경식 선생을 더 읽고 싶은 이유다. 아직도 유의미한 레비의 삶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