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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다녀왔습니다. 사람이 많더라고요. 노동절로 시작되는 5월이라 그랬나 봅니다. 읽고 싶은 책도 많고 추천하고 싶은 책도 많았어요. 옆사람이 내가 읽은 책을 뒤적이기에 반가워서 같이 책 이야기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 아쉬움을 여기서 달래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게, 현실을 뛰어 넘기는 어려울 겁니다. 뉴스만 봐도 그래요. 늘 내 상상을 뛰어 넘는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죠. 

<좀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소재가 된 실제 사건이 너무 충격적인데요. 이 사건이, 그리고 인물의 심리가 얼마나 깊이 있게 작품 속에서 다뤄지는지 기대가 됩니다. 

불편한 작품을 피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저는 되려 찾아서 읽는 편이에요. 심연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악의적 본능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요. 그런 면에서 <좀비>는 우선 순위 첫 번째의 필독서가 되겠네요.  








장강명 작가의 소설 <표백>에서는 혁명은 커녕 개혁 조차 꿈꾸지 못하는 무기력한 젊은 세대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들의 문제냐, 시대의 문제냐는 논쟁거리가 되겠지만 어쨌든. <우리였던 그림자>를 뒤적이면서 <표백>이 떠오른 이유는 뭘까요? 

이제 막 30대가 된 저로서는 역사의 한 장면에 살았던 '혁명' 세대에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긴 합니다(그다지 현실성 없는 동경입니다). 성취의 경험이랄까 역사의식이랄까 하는 것들이 우리 세대에는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찰나는 지나가게 마련이고 혁명 동지들도 생활인의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야겠죠. 그들의 삶은 요즘 세대와 다를까요? 어쩌면 더 소외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가지 않은 길을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참 궁금합니다. 






옌렌커란 작가를 아시나요? 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로 처음 알게 됐어요. 게다가 이 작품, 중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어(이를테면 '불온하다'는 거겠죠) 중국 모든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부했다고 하는 군요. 
한국판 서문을 보니 작가는 '부담스럽지만 반역자'라고 스스로 이름했어요. 현실을 감안한 글쓰기가 아니었다는 거죠. 출판하지 못하더라도 꼭 써야 하는 내용은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 작가가 중국에 있다는 게 부러운 일이기도 해요. 시대가 암울할수록 좋은 작품은 더 빛을 발하나 봅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국가로부터 부정당한 인민들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우리랑 닮아 있기도 하고요. 네가지 책. 뭘까요? 






표지가 정말 매력적이지 않나요? 이것만으로도 읽고 싶은 욕구는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장르 소설을 좋아하거든요. 살인과 사랑이라는 장치도 흥미롭고요. 이런 책은 덥고 잠 안 오는 여름밤에 맥주 한 잔 하면서 읽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더위도 잊고 맥주 마시는 것도 잊고는 '결말이..! 결말이 어떻게 되는 거야..!??!'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어 버리곤 하죠. <제 3의 여인> 역시 제게 그런 기대감을 안겨주는 작품입니다. 작가 이력도, 작품의 수상 경력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무 정보 없이 그저 읽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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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개정판
팀 버튼 지음, 임상훈 옮김 / 새터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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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였던 그림자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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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좀비-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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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로렌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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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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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채식을 해보려고.”

상대의 반응은 뻔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는 모든 판단을 끝낸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눈빛은 정확히 그렇게 말한다. 가능한 얘기를 해라. 말이 되냐? 나는 그 눈빛에 맞서 자못 엄중한 선언을 하고 만 심정으로 열심히 의견을 더 개진해 본다.

“사회 규범 때문에 ‘금기’가 됐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을 먹는 건? 인간은 사실 맛만으로 돼지고기와 사람고기를 구분하지 못해. 우리는 그저 시체를 먹고 있는 거라고. 시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봤지. 안되겠더라고.”

상대는 이제 모든 ‘생명’에 대해 이야기 한다. 모기를 죽이는 건? 네가 언제부터 생명에 그렇게 깊이 생각했냐. 이런 토양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건 불가능하다.


실로 우리 사회에서 ‘채식’을 바라보는 수준은 이런 정도다. 그런 것이 있다는 건 알지만 내 우주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에너지 소비랄까, 동물 권리랄까 이해는 하지만 육식을 끊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한 발 나아가 애써 관대한 반응을 해보려는 사람들은 변명하곤 한다.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기 때문에 현명한 소비 안에서 그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이 있다고. 그 모든 변명에 답하는 책이 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동물을 먹는’ 것에 현명한 대응법이 있을까? 과연?


사실 내 삶에서 ‘채식’에 대한 생각은 깊이 있게 진행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변에 채식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느끼기에 그것은 아주 소수의 목소리일 뿐이었다. 내 삶에서만 그랬을까? 사회적으로는? 논의가 얼마나 진행된 상태지? 사람들 본인의 생존 문제조차 이 사회에서 마음 편하게 해결되지 않았다(인간 생존의 문제가 동물 생존의 문제에 우선하느냐에 대한 쟁점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 더구나 불과 우리의 부모 세대까지도 육식은 부(富)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나. 사실 육식을 끊기 어려운 조건들이 참 많다. 너무나, 많다.

상상해 본다. 이 토양에서 채식주의자들의 삶을. 채식주의자 부부의 결혼식, 음식을 채식으로만 준비한다면? 채식주의자가 속해 있는 가족 모임, 날 위해 정성껏 준비한 어른의 요리를 거절한다면? 이런 질문을 작가 역시 책에서 하고 있다. 이런 장면은 작가가 속한 미국사회보다 우리 삶 속에서 더욱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육식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채식이라는 건 너무 순진하잖아? 이런 생각의 끈이 탁(!) 끊어진 것은 책의 한 구절을 읽고 나서였다.


  “가축들이 사육되는 조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혹은 관심만 보여도) 감상주의자라고 무시를 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누가 감상주의자이고 누가 현실주의자인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좋겠다.”(p.100)


모두가 하는 일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흔히 다른 의견에 대해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순진하다는 평가를 한다. 마치 그런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다는 듯이. 이것은 굉장히 나태한 발상이고 다른 의견을 쉽게 무시하게 된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자.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순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동물의 사육 환경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행동(육식 거부)은 순진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짓인가? 도축의 실상을 알고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감상주의자란 말인가?


이와 관련한 뉴스를 관심 있게 봤던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축산 시설의 비윤리적인 관리에 대한 뉴스를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지. 무엇보다 자본의 논리로 그곳의 동물들은 ‘상품’이고 보다 경쟁력(도대체 무슨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비용 절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산업을 발전시킬 방법이 되니까. 식용으로 이름표 붙은 사육 동물들은 온갖 호르몬제와 항생제, 저질의 사료에 시달린다. 소는 인간으로 따지면 청소년 정도 되는 나이에 도축을 당한다. 닭은 아사(餓死) 직전 상태에 몰렸다가 이어 과도하게 사료와 성장 촉진제를 맞고 그에 발생하는 질병을 방지하기 위한 항생제를 맞는 등 실로 악의 근원이다.

불과 얼마 전에도 어느 축산 시설에서 충격적인 영상이 공개돼 큰 논란이 됐었다. 영상에 등장한 사람은 닭의 목에 줄을 감고 카우보이처럼 줄을 돌리며 낄낄댔고, 닭을 담뱃불로 지졌다. 그 축산 시설의 닭고기는 맥도날드로 들어가는 업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먹은 햄버거는 그처럼 잔인한 짓을 당한 닭고기다. 죽음의 공포와 긴장을 간직한 조직이다. 아마 암(癌)의 원인이 될지도 모르고, 또 다른 어떤 질병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이 채식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육식을 이런 ‘질병 방지’, ‘건강’의 측면에서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있다. 책에 그려진 도축 현장을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책은 내 아이에게 무엇을 먹일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작가가 직접 축산업의 현장을 취재한 내용이다. 미국이 우리 사회의 확장판이라고 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사례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닭들은 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비좁은 닭장에 층층이 쌓여 사육 당하고 있고, 위층의 닭 배설물은 아래층 닭에게 떨어진다. 소를 도축할 때 죽은 상태가 오래되지 않아야 육질이 좋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피를 쏟고 가죽이 벗겨지는 경우도 있다.


  “농담거리로 삼을 만한 것도 없고, 외면할 방법도 없다. 말한 그대로이다. 동물들은 의식이 있는 채로 피를 흘리고, 껍질이 벗겨지고, 절단된다. 이런 일이 항상 일어난다. 업계와 정부도 이를 안다. 살아 있는 동물을 피 흘리게 하나, 껍질을 벗기거나, 절단했다고 거론된 많은 공장들이 자기들의 행동은 업계에서 흔한 일이라고 변명하면서 왜 자기들한테만 그러느냐고 되물었다.”(p.291~292)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 생명을 이렇게 취급하는지? 답은 간단하다. 인간의 미각. 식욕.

이를 인간 사회에 대입해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단지 배부름, 어떤 사람의 포만감, 욕심을 위해서 다른 생명을 앗아도 된다는 말인가? 커다란 빌딩 건설을 위해서 자신들의 거처에서 내몰린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면 비약일까?


정밀하게 분화된 작업 덕분에 우리는 지금 먹는 고기가 어떻게 내 식탁까지 왔는지 깊이 고민해보지 않아도 된다. 그것들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죽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징그럽고 잔혹한 작업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육류 업계는 실로 도축 작업 공개를 꺼리는데, 사람들이 도축 작업에 대해 ‘알면 알수록 고기를 덜 먹게 되리라(p.289)’는 사실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이 감상적인지, 무엇이 현실적인지. 그런 모든 사태를 알긴 하지만 나의 식욕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그런 잔인한 상황을 알기 때문에 육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감상적인가?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며 내 삶에서 작은 문제라고 ‘느껴질’지라도 예민하게 느끼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전히 TV는 육식을 권장하기도 하고, 살생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기도 한다. 나는 책을 읽고 나서 그런 것들을 불편해하게 됐고 급기야 육식을 할 때마다 어떤 죄책감에 시달리게 됐다. 이런 차원에서나마 육식에 대한 논의가 계속될 수 있다면 어떨까. 천진한 얼굴로 ‘난 육식주의자라서’라든가 ‘이 맛있는 걸 어떻게 포기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산업이 좀 더 윤리적인 방향으로 갈 순 없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 소비자로서 비용을 더 지불할 의향이 가지고 나의 윤리의식에 반하지 않는 수준을 이루도록 노력해 보는 것. 공장식 축산에 대해 문제제기 해보는 것. 자본의 논리로 폐기되는 다양한 양심을 찾아보는 것. 그리 거대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주부로서 알뜰한 살림과 균형 잡힌 식단, 건강한 식재료는 주요한 나의 관심사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란 책 덕분에 양심과 죄책감 사이에서 방황한다. 나의 채식은 아직은 다이어트와 비슷해서 매일 아침 시도하고 매일 저녁 후회한다. 우유를 마시고 계란을 사면서. 완벽한 채식을 실현할 날을 꿈꾸고, 끊임없이 죄책감을 가진 채.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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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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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우울함을 읽는 것은 모두에게 간절하게 필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픈 곳을 직시하면 치유할 곳을 알게 된다. 시대가 나아갈 방향, 좀 더 발전적인 조건들, 이런 것들이 간절하게 필요하다. 그것이 인간이 아닌가? 그렇지만 제대로 시대의 우울함을 읽는 사람이 흔치 않다. 사회가 인정하는 실천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정한 시대의 우울함과 사명에 다가가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곧 시대의 퇴물이 될테지. 이 ‘시대의 우울함’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시대의 어른이 얼마나 있느냐로 그 사회를 평가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 사회는 이 어른들이 얼마나 있을까? 시대의 우울함을 시대의 어른들에게 듣고 싶다. 간절하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겪은 역사적 절망은 풍요로운 시대의 우울함(!)을 낳았다. 위안부 문제, 분단 문제, 자본주의의 문제, 정치 탄압 문제까지... 이 열거가 뜨겁게 보이는가, 지루하게 읽히는가. 우리 시대의 문제는 이 질문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우울함 불감증에 있을 것이고 경각심 없이 지루해 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것에 우선하여 자신의 생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여기거나 내 생존만 보장되면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치열하게 구분하자면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문제 삼겠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친일파가 그러했고 나치가 그러했다. 심지어 그들은 이것을 과한 비유라고 생각한다는 사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사실도 놀랍도록 흡사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겐 칸트와 이 사람들의 거리보다 원숭이와 이 사람들의 거리가 더 가까워 보인다.


드물지만 우리에게도 시대의 어른은 있고, 그 중 가장 진보적인 어른이 서경식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인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는데 ‘국민, 국가, 애국심’이 내포하는 폭력에 대해 이 어른이 아니었으면 생각하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다. 진보적인 사람들도 국가라는 틀 안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리면 간단하다. 게다가 서경식 선생을 읽다보면 이 시대는 선생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시대에서 조차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시대의 원숭이들이 이 시대의 어른 행세를 하는 모습도 종종 발견하거니와 새로운 원숭이들도 심심치 않게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는 그리 성숙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이 시대의 우울함의 핵심이다. 시대의 우울함을 더 얘기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서경식 선생의 저작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2006)라고 생각한다. 이 저작은 ‘쁘리모 레비’를 처음 내게 소개하였고, ‘아우슈비츠’와 그 안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였다. 책은 서경식 선생이 ‘쁘리모 레비’의 삶과 죽음을 찾아 가는 여행기 형식이다. 한국판 서문에서 서경식 선생은 “이 책은 쁘리모 레비라는 드문 인물과 나의 대화로 이뤄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책이 흔한 여행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서경식 선생의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책임을 보여준다.

2008년 책을 접한 후 나는 지금도 주변에 이 책을 추천하고, 함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를 권한다. 내게 이 두 권의 책은 2008년 이후 내 삶의 방향을 정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나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삶이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흐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버릴 수가 없다(사실 그 소망이 별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전까지 나는 원숭이와 비슷해서 삶을 희망으로만 보았고, 원하는 것은 노력한 만큼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 크기가 얼마나 컸던지 내 진심이 통하지 않았을 때, 내 주변이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삶이 희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때 우주가 무너지는 절망을 맛보았다. 우주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던 바로 그 때,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정확히 그 지점에서 레비는 조용히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서경식 선생은 나지막이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우주의 붕괴는 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하찮았다. 비로소 난 원숭이에서 칸트 쪽으로 작은 한 걸음 걸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그 때 이 책을 만난 것을 운명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쁘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다. 생존 이후 수용소에서 겪은 자신의 체험을 증언한 위대한 증언가다. 그리고, 1987년에 자살했다. 우리는 그의 절망의 심연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동료의 죽음에 무감각한 눈을 거두고, 하루 더 살아남았음에 무감각한 눈을 꿈벅이고,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간 사회는 계속되고 있음에 절망하는 것을. 무엇이 인간인지 끊임없이 성찰한 진짜 시대의 어른이 쁘리모 레비리라.


  “단지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대다수는 이런 생각이었다) 체험하고 인내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지녔던 것이 나를 도와준 것이다. 그리고 가장 괴롭고 힘든 나날에도 친구와 나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을 집요하게 계속 품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완전한 굴복 상태와 도덕적 타락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었다.”(p.40)


이것이 인간인가. 절망의 나락에서 ‘그래도 인간이다’는 생각을 품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쉽게 얘기할 수 없다. 인간은 나약하고, 쉽게 원숭이로 퇴화한다. 잔혹함에,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우리는 얼마나 쉽게 그것을 내면화하는가. 서경식 선생은 쁘리모 레비 시대의 끔찍한 정치폭력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 경감되기는커녕 절망적으로 일상화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아주 작은 신호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고 말한다. 나는 종종 지나치게 예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선생의 이 말을 떠올린다.


지금 우리 시대를 보자. 정치, 사회, 문화 어느 것 성숙하지 않은 시대를. 절대적인 경제적 수준이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과연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천진난만하게 말해도 되는지. <소금꽃나무>에서 김진숙은 취조 당하던 당시를 이렇게 얘기한다.


  “그들 중엔 껌도 씹었고, 자기 딸 얘기도 했고, 지리산 대원사 계곡에서 좆 내놓고 미역 감은 얘기도 했다.(중략)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입에서 나는 김치 냄새조차 절망이 되어 갔다. 저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간이 인간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그 몸서리쳐지는 사실이,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온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절망이었다.”(<소금꽃나무>, p.29~30)


쁘리모 레비의 절망은 김진숙에게까지 통했다. 여기서, 분노하게 된다. 결국 이 시대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 시대의 그림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사이에 윤동주가 있고 나치가 있으며, 한국 민주화에 투신했던 서경식의 두 형이 있다. 그리고 우리.


  “패배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일이다. 주어진 명령을 모두 실행하고, 배급만 먹으며, 수용소의 규칙이나 노동규율을 지키면 그만이다.”(p.123)


이 문장이 몇 단어만 바꾸면 아주 간단하게 내 삶의 문장이 된다.


  “패배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일이다. 주어진 업무를 모두 실행하고, 월급만 받으며, 상사의 규칙이나 지시에 따르면 그만이다.”


내 삶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내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그저 부속의 삶이고 한정된 자유감옥 안의 삶이다. 그 시절 적은 악마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을 억압했지만 이 시절 적은 세련된 모습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것을 우리는 자유라 믿고, 삶을 희망한다. 도대체 무엇이 현명한 것이냐. 진정한 인간성은 물 속에서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대해 생각하고, 흐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물의 흐름을 거스를 줄 아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시대의 흐름은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거슬러야 한다. 거슬러야 한다고 책이 말해주고 있다. 서경식 선생을 더 읽고 싶은 이유다. 아직도 유의미한 레비의 삶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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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과거가 되고, 이미 밀려오는 미래가 또 다시 과거가 된다는 사실은 새삼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지금' 안에서 '과거'가 되고 있는 것인가. 새로운 것의 등장은 또한 역사 속에서 조명할 것이기에 두고 볼 만하다.  

민음사에서 새로운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목록이 꽤 눈에 익지만 우선 신선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든 생각. "오, 책장이 또 한번 멋지게 꾸며지겠군."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여 기사를 검색했다. 쏟아지는 외국 문학의 기준을 마련하겠다는 당찬 기획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쏟아지는 신작 중 중요하지 않다 말하는 작품은 거의 없으며 그때마다 '낚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허무했고, 실망스러웠던 적도 꽤 있다. 때문에 '민음사 모던 클래식'의 등장은 고무적이다. 적어도 '세계문학전집'과 같다면 그 '목록'은 신뢰가 가니까.  

온라인에 올라온 리뷰를 보니 표지에 대한 설왕설래가 꽤 있던데, 내 생각은 이렇다.  

- 이 정도면 훌륭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란한 일러스트와 난잡한 서체로 뒤덮인 표지보다는 훨씬 정돈되고 깔끔하다. 솔직히 인정한다.   

- 직접 받아 보니 훨씬 깔끔하고 참신하다. 적어도 문학 작품의 표지에 있어 이런 시도는 '민음사 모던 클래식'의 등장 만큼이나 신선하고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 똑똑하게 접근했다. 독자의 구매욕과 수집욕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않았나. 이 정도 돈냄새는 우리 출판 시장 사정을 고려했을 때 '민음사' 같은 출판사에서 문을 열어줘야 좀 성장하지 않겠나.   

지켜봐야 할 일이다. 원래 새로운 것은 낯설고, 낯선 것은 날카롭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이 '현재' 역시 '과거'와 '역사'가 될 일이고 판단은 그 후에 해도 좋다. 우리는 다만 이 흐름이 보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열심히 응원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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