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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평점 :
“이제부터 채식을 해보려고.”
상대의 반응은 뻔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는 모든 판단을 끝낸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눈빛은 정확히 그렇게 말한다. 가능한 얘기를 해라. 말이 되냐? 나는 그 눈빛에 맞서 자못 엄중한 선언을 하고 만 심정으로 열심히 의견을 더 개진해 본다.
“사회 규범 때문에 ‘금기’가 됐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을 먹는 건? 인간은 사실 맛만으로 돼지고기와 사람고기를 구분하지 못해. 우리는 그저 시체를 먹고 있는 거라고. 시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봤지. 안되겠더라고.”
상대는 이제 모든 ‘생명’에 대해 이야기 한다. 모기를 죽이는 건? 네가 언제부터 생명에 그렇게 깊이 생각했냐. 이런 토양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건 불가능하다.
실로 우리 사회에서 ‘채식’을 바라보는 수준은 이런 정도다. 그런 것이 있다는 건 알지만 내 우주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에너지 소비랄까, 동물 권리랄까 이해는 하지만 육식을 끊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한 발 나아가 애써 관대한 반응을 해보려는 사람들은 변명하곤 한다.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기 때문에 현명한 소비 안에서 그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이 있다고. 그 모든 변명에 답하는 책이 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동물을 먹는’ 것에 현명한 대응법이 있을까? 과연?
사실 내 삶에서 ‘채식’에 대한 생각은 깊이 있게 진행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변에 채식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느끼기에 그것은 아주 소수의 목소리일 뿐이었다. 내 삶에서만 그랬을까? 사회적으로는? 논의가 얼마나 진행된 상태지? 사람들 본인의 생존 문제조차 이 사회에서 마음 편하게 해결되지 않았다(인간 생존의 문제가 동물 생존의 문제에 우선하느냐에 대한 쟁점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 더구나 불과 우리의 부모 세대까지도 육식은 부(富)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나. 사실 육식을 끊기 어려운 조건들이 참 많다. 너무나, 많다.
상상해 본다. 이 토양에서 채식주의자들의 삶을. 채식주의자 부부의 결혼식, 음식을 채식으로만 준비한다면? 채식주의자가 속해 있는 가족 모임, 날 위해 정성껏 준비한 어른의 요리를 거절한다면? 이런 질문을 작가 역시 책에서 하고 있다. 이런 장면은 작가가 속한 미국사회보다 우리 삶 속에서 더욱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육식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채식이라는 건 너무 순진하잖아? 이런 생각의 끈이 탁(!) 끊어진 것은 책의 한 구절을 읽고 나서였다.
“가축들이 사육되는 조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혹은 관심만 보여도) 감상주의자라고 무시를 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누가 감상주의자이고 누가 현실주의자인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좋겠다.”(p.100)
모두가 하는 일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흔히 다른 의견에 대해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순진하다는 평가를 한다. 마치 그런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다는 듯이. 이것은 굉장히 나태한 발상이고 다른 의견을 쉽게 무시하게 된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자.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순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동물의 사육 환경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행동(육식 거부)은 순진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짓인가? 도축의 실상을 알고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감상주의자란 말인가?
이와 관련한 뉴스를 관심 있게 봤던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축산 시설의 비윤리적인 관리에 대한 뉴스를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지. 무엇보다 자본의 논리로 그곳의 동물들은 ‘상품’이고 보다 경쟁력(도대체 무슨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비용 절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산업을 발전시킬 방법이 되니까. 식용으로 이름표 붙은 사육 동물들은 온갖 호르몬제와 항생제, 저질의 사료에 시달린다. 소는 인간으로 따지면 청소년 정도 되는 나이에 도축을 당한다. 닭은 아사(餓死) 직전 상태에 몰렸다가 이어 과도하게 사료와 성장 촉진제를 맞고 그에 발생하는 질병을 방지하기 위한 항생제를 맞는 등 실로 악의 근원이다.
불과 얼마 전에도 어느 축산 시설에서 충격적인 영상이 공개돼 큰 논란이 됐었다. 영상에 등장한 사람은 닭의 목에 줄을 감고 카우보이처럼 줄을 돌리며 낄낄댔고, 닭을 담뱃불로 지졌다. 그 축산 시설의 닭고기는 맥도날드로 들어가는 업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먹은 햄버거는 그처럼 잔인한 짓을 당한 닭고기다. 죽음의 공포와 긴장을 간직한 조직이다. 아마 암(癌)의 원인이 될지도 모르고, 또 다른 어떤 질병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이 채식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육식을 이런 ‘질병 방지’, ‘건강’의 측면에서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있다. 책에 그려진 도축 현장을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책은 내 아이에게 무엇을 먹일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작가가 직접 축산업의 현장을 취재한 내용이다. 미국이 우리 사회의 확장판이라고 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사례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닭들은 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비좁은 닭장에 층층이 쌓여 사육 당하고 있고, 위층의 닭 배설물은 아래층 닭에게 떨어진다. 소를 도축할 때 죽은 상태가 오래되지 않아야 육질이 좋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피를 쏟고 가죽이 벗겨지는 경우도 있다.
“농담거리로 삼을 만한 것도 없고, 외면할 방법도 없다. 말한 그대로이다. 동물들은 의식이 있는 채로 피를 흘리고, 껍질이 벗겨지고, 절단된다. 이런 일이 항상 일어난다. 업계와 정부도 이를 안다. 살아 있는 동물을 피 흘리게 하나, 껍질을 벗기거나, 절단했다고 거론된 많은 공장들이 자기들의 행동은 업계에서 흔한 일이라고 변명하면서 왜 자기들한테만 그러느냐고 되물었다.”(p.291~292)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 생명을 이렇게 취급하는지? 답은 간단하다. 인간의 미각. 식욕.
이를 인간 사회에 대입해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단지 배부름, 어떤 사람의 포만감, 욕심을 위해서 다른 생명을 앗아도 된다는 말인가? 커다란 빌딩 건설을 위해서 자신들의 거처에서 내몰린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면 비약일까?
정밀하게 분화된 작업 덕분에 우리는 지금 먹는 고기가 어떻게 내 식탁까지 왔는지 깊이 고민해보지 않아도 된다. 그것들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죽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징그럽고 잔혹한 작업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육류 업계는 실로 도축 작업 공개를 꺼리는데, 사람들이 도축 작업에 대해 ‘알면 알수록 고기를 덜 먹게 되리라(p.289)’는 사실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이 감상적인지, 무엇이 현실적인지. 그런 모든 사태를 알긴 하지만 나의 식욕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그런 잔인한 상황을 알기 때문에 육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감상적인가?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며 내 삶에서 작은 문제라고 ‘느껴질’지라도 예민하게 느끼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전히 TV는 육식을 권장하기도 하고, 살생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기도 한다. 나는 책을 읽고 나서 그런 것들을 불편해하게 됐고 급기야 육식을 할 때마다 어떤 죄책감에 시달리게 됐다. 이런 차원에서나마 육식에 대한 논의가 계속될 수 있다면 어떨까. 천진한 얼굴로 ‘난 육식주의자라서’라든가 ‘이 맛있는 걸 어떻게 포기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산업이 좀 더 윤리적인 방향으로 갈 순 없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 소비자로서 비용을 더 지불할 의향이 가지고 나의 윤리의식에 반하지 않는 수준을 이루도록 노력해 보는 것. 공장식 축산에 대해 문제제기 해보는 것. 자본의 논리로 폐기되는 다양한 양심을 찾아보는 것. 그리 거대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주부로서 알뜰한 살림과 균형 잡힌 식단, 건강한 식재료는 주요한 나의 관심사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란 책 덕분에 양심과 죄책감 사이에서 방황한다. 나의 채식은 아직은 다이어트와 비슷해서 매일 아침 시도하고 매일 저녁 후회한다. 우유를 마시고 계란을 사면서. 완벽한 채식을 실현할 날을 꿈꾸고, 끊임없이 죄책감을 가진 채.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하다.